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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재단사님의 서재입니다.

제국의 약탈자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공기재단사
작품등록일 :
2019.01.11 23:16
최근연재일 :
2019.05.2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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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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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부록]대체역사

DUMMY

스틸리코는 천국에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 로마에 연이어서 벌어진 혼란과 참혹한 상황을 보면서 그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서로마의 멸망으로 이어지기까지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탈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아프리카까지 휩쓴 전란 속에서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로마인 야만족 가릴 것 없이 전쟁 통에 이전에 없던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나.’


살면서 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로마를 위한 최선의 길만을 선택했다고 자부해왔지만, 막상 자신의 사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니, 그것이 자신만의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육신을 벗어나 서로마의 멸망을 보니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명예, 약속, 충성과 같은 가치들이 다 허망했다.


“아직도 지상에 미련이 남았느냐?”

그에게 들려오는 천상의 목소리가 있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면 바꿔보겠느냐?”


암울한 멸망기의 로마에서 힘겹게 하루하루 버텨온 날들로 돌아가라니?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예. 바꾸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그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눈을 뜨자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례식장에 있었다.


선황제의 아들들을 배신하지 않고 황제로 섬기겠다고 했으니 그 약속을 깰 것인가 지킬 것인가부터 선택해야 했다. 여러 방법을 고민했지만, 정통 로마인이라면 모를까 야만족 혈통을 가진 그로서는 황제가 되지 않고서는 서로마의 난관을 헤쳐 나갈 정통성과 명분을 확보할 수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10살이었다. 스틸리코는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호노리우스에게 개각을 위한 여러 개의 임명장을 내밀었다. 호노리우스는 별 생각 없이 수십 개의 임명장들에 서명했다.

“이건 좀 특별한 겁니다.”

스틸리코는 마지막 임명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호노리우스는 그것을 읽어보았다.

“스틸리코를 서로마의 공동 황제로 임명한다?”

황제의 주위를 지키고 있던 환관들이 놀라서 서로 쳐다보았다. 스틸리코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이전에도 로마에는 여러 번 공동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 편이 폐하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들들에게 충성하고 보호해주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공동 황제가 되어서도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었다. 그편이 더 잘 지킬 수 있었다.


“폐하, 이건 좀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올림피우스가 서명하려는 호노리우스를 말리려고 나서자, 스틸리코가 그를 쳐다보고 뼈있는 어조로 말했다.

“감히 환관이 폐하의 국정 운영에 간섭하는 건가?”

올림피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황제와 황제 후견인인 총사령관의 업무에 일개 환관이 간섭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어린 호노리우스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치를 보았다. 스틸리코는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저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시면 매일 하는 조회와 결재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황제가 되어 뜻도 모르는 서류들을 보고받고 서명하는 일에 지친 호노리우스는 일을 안 해도 된다니 기뻐했다.

“그럼 내일부터 이런 거 안 해도 돼?”

“예. 내일부터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노십시오.”

호노리우스는 좋아하며 서명했다.


스틸리코는 자신이 호노리우스 황제의 임명을 받아서 공동황제가 되었음을 공표했다.


환관들은 스틸리코를 두려워해서 반대하지 못했다. 반대한다 해도 10살짜리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니 말하나마나였다. 이제는 스틸리코가 황제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

스틸리코는 황제로서 황궁의 환관들을 재배치했다. 올림피우스를 내쫓고 나머지 환관들의 업무를 조정하여 임명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환관들은 재빨리 호노리우스를 버리고 스틸리코에게 줄을 섰다.


군부는 어린 호노리우스를 잘 알지도 못했고, 이미 10년 넘게 스틸리코의 명령에 따랐기에 큰 반발은 없었다. 동서로마군을 모두 거느린 총사령관인 그는 이미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다. 선황제인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따르고 야만족 혈통인 스틸리코에 반대하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 황제를 내쫓은 것이 아니고 호노리우스가 그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거라서, 호노리우스만이 유일한 황제라고 말할 근거도 없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야만족 혈통의 스틸리코가 갑자기 공동황제로 취임하자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전에도 야만족 혈통의 황제가 있었고, 공동황제도 종종 있었고, 스틸리코의 부인 셀레나는 황족이니 절대 안 된다고 할 명분도 없었다. 스틸리코는 원로원에 나가서 그들에게 해명했다.


“제가 황제에 취임한 것은 호노리우스 황제를 잘 보필하고 황제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이지 권력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핏줄로만 이어지도록 할 것을 신께 맹세합니다. 제 핏줄이 황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로마인 혈통으로 계승되고 야만족 혈통이 왕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스틸리코가 로마인들의 불안을 잠재우며 다짐하자 원로원의 불평이 잦아들었다.


문제를 삼은 것은 동로마황궁이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와 루피누스는 스틸리코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고 펄쩍 뛰며 비난했다.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당분간 그들의 힘을 빌릴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조급할 것이다. 알라리크가 곧 동로마제국으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스틸리코를 인정할 수 없다던 동로마황궁이 이내 잠잠해졌다. 계산이 빠른 루피누스는 스틸리코가 공동황제가 되었다면 자신도 공동황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스틸리코를 비난하기를 멈추고,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그리고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해서 자신을 동로마 공동황제로 임명해달라고 졸랐다. 아르카디우스는 17살인데다, 에우트로피우스의 조종을 받고 있어서 호노리우스처럼 쉽게 공동황제를 임명하지 않았다.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쳐들어오자 동로마는 서로마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루피누스와 에우트로피우스는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고트족이 동로마를 휘젓고 다녀도 스틸리코는 출정하지 않았다. 동로마에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대신 스틸리코는 아프리카의 길도를 먼저 처리할 요량이었다.


길도가 저지른 온갖 악행의 죄를 물어 처벌하고 해임하려 하자, 길도는 동로마를 섬기겠다고 하며 밀 공급을 중단했다. 길도를 정벌하는데 원로원의 동의를 얻을 필요도 없었다. 황명을 거역하고 밀 공급을 중단한 길도는 공공의 적으로 선언할 필요도 없이 반역자가 분명했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매제 바타나리우스에게 병사를 주어서 카프라리아 수도승을 앞세워 아프리카를 정벌했다. 가톨릭교도와 로마군장교들은 속주 장군 길도가 아닌 스틸리코 황제에게 충성하겠다고 하며 돌아섰다. 거의 싸우지 않고 진압했다.



이제 세금제도를 정비할 차례였다. 스틸리코는 농노와 노예에 대해서도 소유주에게 세금을 걷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원로원이 반발하자, 스틸리코는 지금처럼 자유민이 줄어드는 추세에서는 언젠가는 재정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고 연설했다.


“농노도 노예도 로마제국의 혜택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들도 평화를 위한 비용을 내야 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소유주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절충방안을 내놓으며 그들을 설득했다.

“노예의 세금은 소유주가 내더라도, 농노의 세금은 소유주가 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농노의 세금만큼 소작료를 올려서 받아서 내면 됩니다.”

세금을 농노에게 전가시키고, 필요 없는 노예는 해방시켜서 세금을 줄이는 절세방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하면 노예 소유주는 세금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노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농노의 세금은 소작료를 올려 받으면 그만이니 손해볼 일이 없었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직접적인 손해를 줄일 수 있는 절충안을 제시하니, 원로원도 마냥 거부할 수 없어 법안을 통과시켰다.


개혁으로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토지소유주가 아니라 농노들이었다.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땅을 팔고 농노가 되는 건데, 세금을 포함한 소작료를 내야한다면 굳이 농노가 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자유민이 아니기에 법률 개혁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시민권을 가진 자영농이 될 필요성을 느꼈다.


스틸리코는 농노들에게 땅을 살 자금을 융자해줘서 자영농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농노의 숫자가 줄어들고 차츰 자영농 숫자가 늘어났다. 농노와 노예로부터 세금을 걷자 세수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는 사이에 알라리크는 동로마황궁과 협상해서 일리리쿰 군사령관이 되어 서고트족과 일리리쿰에 정착했다.


루피누스가 에우트로피우스의 계략에 죽고 나서, 동로마에 트리비길트가 이끄는 동고트족이 넘어왔다. 동로마가 자신의 군대를 돌려달라고 스틸리코에게 요청했다.


스틸리코는 가이나스를 자신의 곁에 기병대장으로 놔두고, 대신 정통 로마인인 가우덴티우스에게 동로마 병사를 주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가톨릭 로마인을 선호하는 동로마 황궁과 무리 없이 어울려 지낼 사람으로 고른 것이었다.


가우덴티우스는 스틸리코의 명령대로 에우트로피우스를 실각시키고 트리비길트와 싸워 그들을 패퇴시켰다.


스틸리코는 동로마가 트리비길트와 싸우는 와중에 가이나스를 알라리크에게 보내서 협상을 시도했다. 다키아와 모에시아 등 동로마 소유의 속주를 서로마 관할로 가져와서 방어선을 구축하면, 게르마니아와 갈리아에 프랑크족과 다른 야만족을 정착시킨 것처럼 다키아 속주에 서고트족이 정착하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동로마가 그를 일리리쿰 군사령관에서 해임해도 서로마가 그를 계속 군사령관으로 인정하고 지원해주겠다고 회유했다.


알라리크는 동로마에서 이단과 야만족 배척이 시작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야만족에 대한 차별이 덜한 서로마에 협력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에 몇 년 살면서 로마에 대한 반감이 줄어 있었다. 가이나스는 그를 설득했다.

“내가 옆에서 긴 시간 지켜본 바로는 스틸리코 황제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 네가 생각하는 로마인들과는 달라. 야만족 혈통이라서 야만족도 차별하지 않아.”


어차피 서고트족이 정착할 땅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던 알라리크는 서로마에 협조하기로 했다. 군대를 이끌고 출정해서 동로마속주를 서로마로 편입시켜 도나우강 방어선을 완성했다.


동로마는 야만족과 이단을 수용하고 로마를 공격한다고 스틸리코를 비난했지만, 트리비길트와 이단을 몰아내고 내부 수습을 하느라 알라리크가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점유하는데도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동고트족에 라에티아로 넘어왔다. 40만명의 대규모 무리였지만, 이미 로마에 정착한 프랑크족, 서고트족 등 야만족 부대를 활용해서 쉽게 갈리아에서 포위해서 잡았다.

그들 일부는 병사로 편입시키고 일부는 노예로 팔고 나머지는 라에티아에 정착시켰다. 일부는 브리타니아의 픽트족 방어를 위해서 보냈다


몇 년 후 반달족과 알라니족이 넘어왔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라에티아에 정착한 동고트족을 이용해서 그들과 싸웠다.

친 로마파인 알라니족 고아르에게 갈리아에 정착할 땅을 주겠다고 회유해서 알라니족과 반달족을 이간시켰다. 알라니족을 반달족과 싸우게 해서 반달족을 도로 라인강 건너편으로 쫒아버리고, 알라니족만 받아들였다.


야만족이 한꺼번에 넘어오지 않도록 막았지만, 부족별로 선별해서 적극적으로 로마화되겠다고 하는 소수의 부족은 조금씩 받아들여 병사나 농노로 정착시켰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와 이탈리아는 전란을 당하지도 않았고 야만족 인구가 늘면서 세금도 꾸준히 늘었다. 야만족으로 병사를 충원해서 로마군의 숫자도 늘어나고 방어도 쉬워졌다.


야만족을 영내로 받아들여 정착시키는 것에 대해서 반감도 있었고, 스틸리코가 야만족에게 로마를 팔아넘긴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비판의 효과는 미미했다.


스틸리코는 황제였기에 그가 야만족에게 로마를 팔아넘긴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로마가 그의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야만족에게 로마를 팔아넘기는 손해 보는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과거에는 황제가 되려는 욕심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정적들이 몰아갔지만, 이미 황제인 그가 굳이 그런 일을 할 동기가 없었다.


이교도나 이단과 손잡았다는 비난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스틸리코는 야만족을 로마 영내로 받아들이기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이 가톨릭을 믿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주교들은 야만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야만족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헌금을 하는 스틸리코를 성자로 칭송했다.

“스틸리코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1세 다음으로 기독교에 큰일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들처럼 대제의 칭호를 받아 마땅합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에게 2년간 볼모로 보냈던 아에티우스를 다시 훈족에게 2년 간 보냈다. 18살이 되자 아버지인 가우덴티우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2년을 지내며 동로마 원로원과 인맥을 쌓도록 한 후에 불러들여서 갈리아 사령관으로 배치했다.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 정착한 다수의 야만족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진압하고 협상하며 그들이 잘 정착하도록 도왔다.


호노리우스는 성인이 되었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밀라노 황궁에 틀어박혀서 로마에도 가지 않고, 원로원도 장군들도 만나지 않아서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몇 없고, 뭘 하고 지내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스틸리코가 황제로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국사를 도맡아서 하니, 호노리우스는 황제로서 형식적인 서류 결제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업무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서,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본적인 것도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스틸리코는 굳이 호노리우스의 교육에 열을 올리거나, 업무를 나눠서 하거나, 호노리우스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려고 애쓰지 않았다. 가능하면 황제의 업무에서 차단시켰다.


군인들은 스틸리코의 명령만 들었고, 원로원은 호노리우스에게 무관심했다. 황궁 관료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답답한 호노리우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환관의 임명도 황제인 스틸리코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직접 했다. 호노리우스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환관들은 즉시 갈아치웠다. 환관들은 스틸리코 황제에게 충성하고, 호노리우스 황제는 존경하기보다 그저 아기처럼 돌보았다.


호노리우스에게 줄을 대서 출세해볼까 하고 접근했던 자들도 한 시간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갔다. 스틸리코와 너무 비교가 되었다. 국정의 기본도 모르고 의지도 박약한 호노리우스가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서 현황제인 스틸리코와 맞서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황궁 안에서 조용히 닭을 키우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고, 외토리로 지내다가 후사가 없이 39살에 죽었다.


64살의 스틸리코는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이 아닌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핏줄을 다음 황제로 즉위시키겠다고 다시 한 번 원로원에게 확언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핏줄로 남자는 동로마의 황제로 재위중인 손자 테오도시우스2세뿐이었다. 서로마에는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스틸리코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녀를 여황제로 임명해서 자신과 공동황제로 만들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핏줄로 황제를 잇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유언에 따라 호노리우스 뿐만 아니라 갈라 플라키디아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후견인으로서 갈라 플라키디아의 결혼상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스틸리코는 아에티우스를 그녀와 결혼시켰다. 아에티우스를 공동 황제로 낙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른 살이 넘도록 황궁에만 갇혀 있다가 결혼을 하게 되어서 기뻐했고, 아에티우스도 3살 연상이었지만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줄 그녀와의 결혼을 당연히 원했다.


원로원도 테오도시우스의 딸과 정통 로마인 아에티우스에게 권력이 자연스럽게 이양되는 것에 만족했다.

야만족도 그동안 자신들과 협상을 해왔고 야만족에게 유화적인 아에티우스가 황제가 되자 기뻐했다.

동로마도 동로마 사령관인 가우덴티우스의 아들이며 콘스탄티노플에서 지냈던 그가 서로마 황제가 되자 반겼다.

스틸리코는 자신이 말한 약속을 지키면서 원하는 후계자를 황제로 만들었다.


스틸리코와 공동 황제가 된 아에티우스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했다. 펠릭스, 보니파키우스, 마요리아누스 등 유능한 장군들을 견제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황제의 정통성이 있는데 그들은 경쟁자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신하였고 자신이 황제이니, 그를 불안하게 하는 내부의 적은 없었다.


갈리아지역에 야만족이 많아지면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에티우스와 마요리아누스가 재빨리 잘 무마했다. 아프리카도 바타나리우스의 뒤를 이어 아프리카 사령관이 된 보니파키우스가 도나투스파와 가톨릭교도의 대립을 중재하며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스렸다.



다른 야만족은 거의 다 순차적으로 로마제국 안에서 정착했지만, 아직까지 유일하게 로마제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배척받는 부족은 훈족과 반달족이었다. 훈족은 로마에 정착할 마음이 없었고, 반달족은 그럴 마음은 있었지만, 스틸리코가 허락해주지 않고 있었다.


반달족을 배척한 것은 3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그가 반달족혈통이기에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더 엄격하게 한 것도 있었고, 둘째는 반달족이 로마에 적대감이 가장 강한 부족이었고, 셋째는 가이세리크가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반달족을 로마영내에 들여놓았다가 가이세리크가 아프리카로 넘어가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다른 부족들이 로마화되어 정착하도록 반달족은 여전히 라인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배제되었다.


스틸리코는 반달족과 싸워 이긴 후에 반달 왕 군데리크와 평화협정을 맺으며 그의 아들 가운데 2명을 로마에 볼모로 보내라고 했다. 군데리크의 아들들은 로마에서 살면서 로마 문물에 감화되어 점차 로마화되었다.


군데리크가 죽자 가이세리크는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지만, 로마에 있는 2명만은 죽이지 못했다. 스틸리코는 로마군 병사들을 붙여서 군데리크의 아들들을 암살자들로부터 보호했다.


스틸리코는 군데리크의 아들들에게 병사를 주어서 가이세리크를 정벌하고 왕위를 되찾도록 했다. 그들이 교활한 가이세리크의 상대가 되기에는 벅차니 도와주어야 했다. 아에티우스에게 로마군과 훈족 용병을 이끌고 가이세리크를 물리치도록 했다. 스틸리코는 아에티우스에게 당부했다.


“가이세리크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로 믿지 마. 그는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아. 그를 제거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유일한 목표야.”


아에티우스는 군데리크를 따르던 반달족 장수들에게 가이세리크 대신 군데리크의 아들을 왕으로 섬기면 반달족도 로마 영내로 받아줄 수 있다고 회유해서 반달족을 이간했다. 반달족은 군데리크의 아들을 지지하는 파와 가이세리크 파로 나눠져서 내분이 생겼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가이세리크는 거짓말로 군데리크의 아들에게 왕좌를 넘기겠다고 협상했다. 아에티우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이세리크는 왕좌를 넘기는 즉위식에서 군데리크의 아들들을 암살하려 했지만, 아에티우스는 이미 그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다. 암살자가 군데리크의 아들에게 덤벼들었지만, 옷 속에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주위에 있던 호위대가 재빨리 나서서 다치지 않았다. 밖에 있던 로마군은 가이세리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주위를 완전히 봉쇄했다. 그는 도망치지 못하고 군데리크 파의 반달족에게 살해당했다.


군데리크의 아들은 반달족 왕으로 무사히 즉위했다. 가이세리크가 죽고 로마에 호의적인 왕이 반달족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반달족을 배척할 필요가 없었다. 비로소 그들에게도 로마 영내에 정착지를 주고 문호를 개방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는 아틸라였다. 아틸라는 페르시아에 이어 동로마를 공격했다. 다키아와 일리리쿰을 서고트족이 단단히 수비하고 있었기에 흑해를 끼고 아르메니아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아틸라가 로마군을 물리치며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군하자 동로마는 공포에 질려서 아틸라에게 평화협정을 요청했다. 아틸라는 막대한 금을 요구했다. 동로마는 절망에 빠져서 굴욕적인 협정에 응하려고 했다.


그때 스틸리코가 동로마에 원군을 보냈다. 동로마가 경계하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아에티우스를 시켜서 동로마의 훈족을 물리쳐주겠다고 제안하도록 했다.


동로마는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알라리크에게 빼앗겨서 스틸리코를 미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황제가 된 선황제의 핏줄 갈라 플라키디아와 정통 로마인인 아에티우스에게는 상대적으로 반감이 없었다.


아에티우스는 젊은 시절에 잠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지내서 동로마 원로원 인사들을 알았다. 갈라 플라키디아를 대동하고 직접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서로마군대를 동로마 영토에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동로마 서로마를 떠나서, 가톨릭 기독교도끼리 서로 뭉쳐서 이교도와 싸워야 합니다. 서로마가 도와줄 테니 함께 훈족과 싸웁시다.”


위기에 처한 동로마는 자신들을 구해주겠다고 나선 황녀 갈라 플라키디아와 아에티우스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되자 서로마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서로마가 자꾸만 야만족을 영내로 받아들여서 서로마가 이교도에게 넘어갈까봐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인 야만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이교도 훈족와 싸운다고 하니 공연한 걱정을 했나봅니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들인 동로마황실은 종교를 앞세운 아에티우스의 설득에 감화되어 함께 훈족과 싸우기로 했다.


배를 탄 서로마군이 동로마 영토인 소아시아에 상륙했다. 아에티우스는 서로마군과 동로마군, 프랑크족과 서고트족을 이끌고 훈족과 맞서 싸웠다. 아틸라의 작전을 아는 아에티우스는 동로마가 쩔쩔매던 훈족을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동로마는 공포스러운 훈족을 아에티우스가 격퇴하자 감격스러워하며 기뻐했다. 아에티우스는 그들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말했다.

“동로마의 뒤에 서로마가 있는 이상 훈족은 동로마를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동서로마는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동로마는 그 말이 맞다고 여겼다. 훈족에게 강한 서로마와의 동맹을 강화해서 훈족이 함부로 동로마를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동로마는 서로마의 다키아, 모에시아 속주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해주었다. 북쪽 국경은 서로마에게 방어를 맡기고 자신들은 동쪽 국경에만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아틸라에게 주려고 마련했던 배상금 절반을 감사의 표시로 서로마에게 주었다.

동로마 황제의 딸과 아에티우스와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을 약혼시켜 동서로마의 화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아틸라는 계속된 정복과 약탈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얻고 결속을 다졌는데, 약탈을 할 수 없게 되자 급속하게 세력이 갈라지고 무너졌다. 그의 전력의 중요한 축인 동고트족도 로마에 포용되어 정착했다. 게피다이족 족도 로마의 회유에 아틸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전쟁에서 이긴 동로마가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자 아틸라의 세력은 더 이상 확장하지 못했다. 돈으로 유능한 현지인과 외국인을 고용해서 부려야 세력을 키울 수 있는데 돈이 없으니 그럴 수 없었다. 도나우강은 서고트족이 지키고 있고, 라인강은 프랑크족이, 라에티아는 동고트족, 노리쿰은 반달족, 판노니아는 수에비족, 게르마니아는 부르군트족이 지키고 있어서 훈족이 약탈할 곳이 없었다. 아틸라가 죽자 그나마 남은 세력도 흩어졌다.


로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제국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없었다. 국경은 게르만족과 로마군이 지키고 있었다. 동서로마 황실과 원로원은 이전처럼 하나의 나라로 지중해를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다.


스틸리코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막고, 제국에 평화롭게 야만족을 로마화시켜 정착시키고, 동서로마의 화합을 이룩하는 명예로운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로마인에게는 국란을 극복한 영웅으로, 야만족에게는 문명의 삶을 허락해준 구원자로 칭송을 받으며 지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갔다.

(끝)


작가의말

완결후기

추천글 써주신 의천도기, skysword09, 순한양, 장빈, 세마포님 고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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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약탈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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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로마제국지도 19.01.17 2,245 0 -
» [부록]대체역사 +5 19.05.29 600 14 25쪽
128 [외전]제국의 멸망 19.05.28 346 14 14쪽
127 [외전]카탈라우눔 전투 19.05.27 224 12 16쪽
126 [외전]아틸라 +1 19.05.26 245 12 17쪽
125 [외전]가이세리크 +1 19.05.25 214 13 17쪽
124 [외전]테오도릭 19.05.24 245 13 15쪽
123 [외전]보니파키우스 +2 19.05.23 269 16 19쪽
122 [외전]아에티우스 +1 19.05.22 268 10 14쪽
121 [외전]훈 족 +1 19.05.21 410 13 13쪽
120 서고트 왕국 +5 19.05.20 503 26 13쪽
119 아프리카로 +2 19.05.19 361 18 12쪽
118 방랑 19.05.18 302 12 13쪽
117 로마 약탈 +2 19.05.17 337 22 13쪽
116 3차 로마 포위 19.05.16 320 15 12쪽
115 황제 추대 +1 19.05.15 368 17 15쪽
114 오스티아 항구 19.05.14 311 11 12쪽
113 2차 로마 포위 +3 19.05.13 348 15 13쪽
112 권력 암투 19.05.12 336 13 15쪽
111 협상 +1 19.05.11 337 12 14쪽
110 기아 19.05.10 325 13 12쪽
109 1차 로마 포위 +3 19.05.09 338 16 16쪽
108 복수를 위하여 +2 19.05.08 328 16 14쪽
107 충성 +2 19.05.07 326 18 13쪽
106 고뇌 19.05.06 307 12 12쪽
105 숙청 +1 19.05.05 315 12 13쪽
104 올림피우스 19.05.04 298 11 12쪽
103 로마의 명예 +2 19.05.03 324 12 12쪽
102 협약공개 19.05.02 314 12 14쪽
101 제안 +3 19.05.01 342 13 13쪽
100 퇴각 +3 19.04.30 327 10 13쪽
99 비엔느 +2 19.04.29 340 11 13쪽
98 콘스탄티누스의 반란 19.04.28 335 13 13쪽
97 다가오는 위기 19.04.27 315 13 13쪽
96 압박 +2 19.04.26 340 12 12쪽
95 반달족 +1 19.04.25 321 14 12쪽
94 프랑크족 +1 19.04.24 331 14 14쪽
93 마르코미르 19.04.23 329 13 12쪽
92 고디기젤 19.04.22 347 11 12쪽
91 피에솔레 전투 +2 19.04.21 349 12 12쪽
90 라다가이수스 19.04.20 335 12 12쪽
89 노예해방 19.04.19 349 14 12쪽
88 포석 +1 19.04.18 347 13 12쪽
87 재임명 19.04.17 351 13 13쪽
86 동맹 19.04.16 341 15 12쪽
85 개혁 19.04.15 378 16 12쪽
84 휴전 +1 19.04.14 383 21 12쪽
83 은거 19.04.13 387 18 12쪽
82 개선식 +2 19.04.12 444 12 12쪽
81 징병제 개혁 +1 19.04.11 382 15 13쪽
80 베로나 전투 +4 19.04.10 395 16 12쪽
79 싱게리크 19.04.09 365 11 12쪽
78 퇴각협상 +2 19.04.08 384 16 13쪽
77 도주 19.04.07 391 18 13쪽
76 폴렌티아 전투 +1 19.04.06 423 14 12쪽
75 부활절 +1 19.04.05 413 16 14쪽
74 추격 +1 19.04.04 392 20 12쪽
73 호노리우스 +1 19.04.03 433 16 12쪽
72 아스타 성 +1 19.04.02 428 16 14쪽
71 밀라노 +1 19.04.01 420 19 13쪽
70 수에비족 +1 19.03.31 429 21 13쪽
69 알레만니족 19.03.30 402 18 14쪽
68 이탈리아 19.03.29 429 19 13쪽
67 라에티아 +1 19.03.28 440 20 13쪽
66 아퀼레이아 19.03.27 462 16 12쪽
65 연합 +1 19.03.26 457 19 13쪽
64 해임 19.03.25 479 20 13쪽
63 프라비타 +3 19.03.24 497 18 13쪽
62 몰락 19.03.23 439 15 13쪽
61 교회 19.03.22 427 18 13쪽
60 가이나스 19.03.21 441 15 13쪽
59 에우트로피우스의 최후 19.03.20 441 16 12쪽
58 동고트족 19.03.19 475 18 13쪽
57 트리비길트 19.03.18 456 18 12쪽
56 시찰 +1 19.03.17 500 22 13쪽
55 본색 19.03.16 452 16 13쪽
54 픽트 전쟁 +1 19.03.15 485 18 14쪽
53 종교전쟁 19.03.14 451 15 13쪽
52 마스케젤 +1 19.03.13 483 17 12쪽
51 길도의 반란 19.03.12 492 17 14쪽
50 냉전 19.03.11 511 17 15쪽
49 서고트족의 왕 +1 19.03.10 522 18 15쪽
48 출전 19.03.09 485 16 12쪽
47 재판 19.03.08 502 17 14쪽
46 훈련 +1 19.03.07 503 14 13쪽
45 일리리쿰 군사령관 19.03.06 513 20 16쪽
44 에피루스 19.03.05 509 15 13쪽
43 로마의 적 19.03.04 519 18 12쪽
42 코린토스 만 19.03.03 501 15 13쪽
41 탈출 19.03.02 507 17 12쪽
40 19.03.01 510 18 12쪽
39 플로이 19.02.28 524 18 12쪽
38 아르카디아 전투 19.02.27 544 17 12쪽
37 펠로폰네소스 반도 19.02.26 560 20 12쪽
36 아테네 19.02.25 563 23 13쪽
35 아프리카 19.02.24 603 21 12쪽
34 그리스 침공 19.02.23 589 19 12쪽
33 반역죄 19.02.22 609 21 13쪽
32 새로운 동료 19.02.21 614 21 13쪽
31 암살 19.02.20 619 19 14쪽
30 콘스탄티노플 19.02.19 678 22 13쪽
29 회군 19.02.18 685 20 13쪽
28 동로마 황궁 19.02.17 657 20 13쪽
27 패주 19.02.16 660 22 14쪽
26 테르모필라이 19.02.15 680 18 11쪽
25 진군 +1 19.02.14 650 25 12쪽
24 승리 +1 19.02.13 688 23 13쪽
23 약탈 19.02.12 681 24 13쪽
22 돌파 +1 19.02.11 666 22 12쪽
21 결집 19.02.10 732 20 13쪽
20 악연 19.02.09 707 23 13쪽
19 사루스 19.02.08 722 21 11쪽
18 아르카디우스 황제 19.02.07 719 27 12쪽
17 충성 서약 19.02.06 737 25 13쪽
16 루피누스 19.02.05 752 24 13쪽
15 로마군 +3 19.02.04 805 32 13쪽
14 프리기두스 전투 19.02.03 824 28 13쪽
13 희생 19.02.02 784 28 13쪽
12 작전계획 19.02.01 839 26 14쪽
11 출정 19.01.31 865 27 13쪽
10 알라리크 19.01.30 878 22 13쪽
9 서고트족 +2 19.01.29 912 27 12쪽
8 아말리 가문 19.01.28 933 26 12쪽
7 스틸리코 19.01.27 995 24 12쪽
6 테오도시우스 황제 +1 19.01.26 1,128 25 12쪽
5 원로원 +1 19.01.25 1,168 27 12쪽
4 발티 가문 +1 19.01.24 1,504 29 14쪽
3 황제 시해 19.01.23 2,147 41 12쪽
2 대립 +2 19.01.22 3,231 67 16쪽
1 바스타르네이 전투 +3 19.01.21 6,124 7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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