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솔레 전투
로마군은 목책의 마지막 구간을 봉쇄하기 위한 작업을 했다. 통나무를 세워 묶고 미리 만들어놓은 문을 가져다 달면 끝이었다. 동고트족은 목책의 완성을 막으려고 공격했다.
공병이 마무리 작업을 하는 동안 로마군 정예병이 동고트족과 대치했다.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의 백 미터 앞에서 나란히 창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동고트족은 방패로 창을 밀치며 몸무게를 실어 부딪쳐왔다.
“버텨! 밀리지 마!”
수만 명이 동시에 밀어내는 데 아무리 용을 써도 버틸 수 없었다. 땅을 디딘 발이 뒤로 질질 밀렸다.
“창을 높이 들어!”
무거운 긴 창을 떨어뜨리지 않고 높이에 맞게 들고 서있기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났다. 시간이 흐르자 어깨와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발사!”
로마군의 투석기에서 돌이 날아갔다. 땅이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잠시 주춤 하는가 싶더니 또다시 몸으로 밀어왔다.
이번에는 휘릭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 신음소리가 들리고 밀어내는 힘이 약해졌다.
“전진!”
이때를 놓치지 말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뒤로 밀렸던 자리를 도로 찾아와야 했다. 그렇지 않고 공사중인 지점까지 뒤로 밀려버리면 낭패였다.
“마지막 구간만 완성하면 돼. 서둘러!”
공병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짝에 줄을 끼워 통나무에 단단히 묶어서 고정했다. 로마군과 야만족이 싸우는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작업에 집중해야 했다.
마침내 문짝이 달리자 공병은 문이 잘 열리고 닫히는지 시험해보았다. 긴 목책이 피렌체 성벽까지 이어지며 완성되었다. 아르노 강으로 가는 길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됐어! 나와! 문을 닫아!”
수비하던 로마군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완성된 목책 문으로 한 명씩 빠져나왔다. 목책 위에서는 궁병들이 조준사격을 하며 동고트족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그들을 엄호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로마병사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목책 문이 위에서부터 덜커덕 닫혔다. 동고트족은 절벽이나 다름없이 깊이 파인 참호 앞에서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낭패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물이 떨어진 동고트족은 새벽에 풀에 맺힌 이슬을 빨아먹거나 빗물을 받아 마시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비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었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뜨거운 햇빛은 점점 강렬해졌다. 며칠이 지나자, 갈증과 탈수로 쓰러지는 자들이 생겨났다.
동고트족 내부에서 서로 약탈이 시작되었다. 물과 먹을 것이 떨어진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칼부림을 하며 죽였다. 아이들과 여인들은 난폭해진 병사들을 두려워하며 로마군에게 투항했다. 투항하는 자들은 노예로 팔릴 것이었다. 죽는 것보다는 노예가 되는 편이 나았다.
“포위망을 뚫어! 공격해!”
라다가이수스는 거듭해서 가망 없는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
목책 앞에는 깊은 참호 구덩이 때문에 상당수는 목책에 가 닿기도 전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고, 대부분은 구덩이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미끄러졌다. 나머지도 목책 앞에 사다리를 놓고 기어오르다가 창에 찔려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십명이 한 조가 되어서 사수해. 뒤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번갈아 교대한다.”
스틸리코는 숫자가 부족한 로마군으로 긴 목책의 수비라인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로마군과 노예병을 섞어 조를 짜서 드문드문 병사들을 배치해서 보초를 서도록 했다.
“야만족 무리가 백 명 이상 목책에서 사정거리 내로 다가오면 즉시 보고한다.”
야만족이 수비를 뚫고자 공격하면 그 지점에 숙련된 정예병을 순간적으로 집중투입해서 물리치는 방법을 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고트족의 저항은 살벌해졌다. 모든 동물을 잡아서 피를 마신 그들은 더 이상 마실 것이 없자, 이제는 죽기 살기로 목책을 넘어서겠다고 달려들었다.
“빨리 보고해!”
로데리크는 자신이 서 있는 목책 방향으로 수만 명의 동고트족이 유령처럼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옆에 선 병사에게 소리쳤다. 병사는 허둥지둥 연락병에게 알리러 달려갔다. 연락병이 다시 스틸리코에게 보고하고 병사들을 끌고 오기까지 반시간 정도는 오십 명이서 버텨내야 했다.
“이런, 제길!”
점점 가까워지는 동고트족 전사들의 살기어린 눈빛을 보면서 로데리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온다!”
동고트족이 함성을 지르며 일시에 목책으로 뛰어왔다. 로데리크는 창을 들고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그들을 내리찍었다. 자신도 목책을 뛰어올라봤고 성벽을 공략해봤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찔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어억! 살려줘!”
그의 옆에 서있던 신참 노예병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동고트족 여러 명에게 붙잡혀서 아래로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십여 개의 팔에 붙잡혀 허우적거리는 그는 마치 거미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개미 같았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로데리크는 다른 병사들에게 조심하라고 소리치며 노예병을 붙잡고 있는 손들을 칼로 베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튀며 손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이미 목책 위로 뛰어오른 동고트족도 있었다. 목책이 점점 그들에게 잠식당해갔다. 로데리크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동고트족을 걷어차서 다시 목책 밖으로 떨어뜨렸다.
“스틸리코다!”
그가 로마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칼과 창을 든 로마군이 목책위로 올라가서 동고트족을 거꾸러뜨렸다. 로마군이 침착하게 동고트족을 도로 목책 아래로 밀어냈다.
로데리크는 목책 안에서 한 동고트족 궁사가 화살을 겨누는 것을 보았다. 화살 끝은 스틸리코를 향하고 있었다. 저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스틸리코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떨어져있던 돌을 집어 들어서 화살을 매긴 동고트족에게 있는 힘껏 던졌다.
날아가는 새를 맞춰서 사냥할 정도로 정확한 돌팔매질과 어깨 힘을 자랑하는 그였기에 서있는 사람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앗!”
궁사가 화살을 쏜 것과 돌에 맞아서 쓰러진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로데리크는 놀라서 스틸리코를 쳐다보았다. 그가 화살에 맞았을까?
스틸리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화살은 그의 앞의 목책에 박혀 있었다. 궁사가 돌을 맞고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화살을 발사해서 빗나간 모양이었다.
“위험합니다. 물러나계십시오.”
가우덴티우스가 그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갑옷을 입고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화살이 날아오는 곳에 있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로데리크는 비록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스틸리코가 화살을 맞을 뻔 한 것을 구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 켠이 뿌듯했다.
그 순간에는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군대의 장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그 때문에 4번이나 죽을 뻔 한 스틸리코를 따르는 로마군 병사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서쪽 목책 문을 오전에 잠시 열어 놔. 천 명 정도 빠져나가면 도로 닫아. 오후에는 동쪽 목책 문을 열어서 천 명 정도 나오게 하고.“
스틸리코는 상황을 보아가면서 이쪽 저쪽의 포위망을 조금씩 터 주었다. 어차피 40만명을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으니 나눠서 잡는 것이었다.
열린 문으로 일부가 도망쳐 나오면 문 앞에서 빙 둘러싸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는 자들을 한 명씩 붙잡았다. 반항하는 자는 죽이고, 항복하는 자는 포로로 잡고, 위협이 되지 않는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은 도망치게 놔뒀다.
그렇게 주머니 안에 든 공기를 조금씩 빼는 것처럼 적을 조금씩 포위망에서 빼내서 체포했다. 동고트족은 거대한 우리에 갇힌 가축 신세였다.
처음부터 각자 이해관계가 다른 부족들이 뭉친 것이어서 도망갈 길만 몰래 터주면 부족별로 알아서 도망쳐 나와서 투항했다.
다급해진 라다가이수스는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스틸리코는 거절하며 그의 사절에게 말했다.
“이미 너희들은 목책 안에 갇힌 포로다. 포로와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
동고트족이 공격을 할 때마다 그들만 죽어나갔다. 로마군은 목책 위에서 수비하며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동고트족은 굶주림과 탈수로 죽어갔지만, 로마군은 도망쳐나온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서 넉넉해졌다.
라다가이수스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우두머리 자리에서 쫒겨난 그는 미련없이 동고트족을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았다. 다른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반대편 목책의 포위를 뚫고 도망쳤다.
스틸리코는 그의 휘하에 있던 훈족과 알라니족 기병대에게 라다가이수스를 추격해서 잡아오도록 명령했다. 라다가이수스는 재빠른 훈족과 알라니족 기병대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가지 못하고 얼마 안 되어 붙잡혔다.
“라다가이수스를 잡았습니다. 로마로 이송할까요?”
가우덴티우스의 보고에 스틸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즉결처형해.”
원칙대로라면 전범자인 그는 재판에 붙여져야 했지만, 스틸리코는 바로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지도자는 필요 없다.”
재판으로 질질 끌 시간이 없었다. 라인강 유역에는 금방이라도 로마로 넘어오려고 기회를 보는 반달족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에게 로마를 침공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2달이 지나서 8월이 되자, 얼마 남지 않은 야만족들은 모두 항복했다. 40만 명 중에 10만명 가량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서 라에티아로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신입노예 병사가 포함된 3만명으로 이루어낸 승전이었다.
포로들 가운데 건장한 병사들은 로마군으로 편입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로 팔았다. 한꺼번에 10만 명 이상의 노예가 시장에 풀리자, 노예 가격이 폭락해서 헐값에 팔아야 했다.
나이든 노예를 징집하도록 풀어주면서 투덜거렸던 로마시민들은 젊은 야만족 노예를 싸게 사들일 수 있게 되자 기뻐했다.
동고트족이 궤멸되었고 라다가이수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서고트족에게도 전해졌다.
“3만명으로 40만명을 물리쳤다고? 미쳤군.”
“큰 전투도 없었대. 동고트족이 알아서 손들고 나왔다던데?”
“스틸리코는 사람이 아니야.”
족장들은 이전에 싸웠던 스틸리코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금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에 서고트 족이 라다가이수스를 따라 나섰더라면 우리도 같은 꼴이 되었을 겁니다.”
아타울프의 말에 다른 족장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나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알라리크 왕께서 동고트족에 협력하지 말고 중립을 지키자고 하신 건 현명한 판단이셨습니다.”
동고트족에 합세하자고 했던 족장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타울프는 신음이 섞인 목소리로 알라리크에게 물었다.
“스틸리코는 과연 무적이로군요. 어떤 적이 그를 당할 수 있을까요?”
알라리크는 말없이 창가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틸리코의 가장 무서운 적은 야만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의 밖에 스틸리코의 적수는 없었다. 그의 적은 로마 안에 있었다.
40만명의 야만족의 이탈리아 침입은 큰 사건이었고 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그들을 각성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적은 병력으로 큰 승리를 거둔 스틸리코로 인해서 야만족은 숫자만 많았지 격퇴하기 쉽다는 안이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긴장했던 그들은 이내 느슨하고 편안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스틸리코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동서로마황궁에서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불안감은 커졌다. 그들에게는 돈만 집어주면 조용해지는 야만족보다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의지와 집념을 가진 스틸리코가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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