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
해가 질 무렵 로마인의 농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법 큰 규모의 농장이었지만, 수만 명의 서고트족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도 창고에 곡식이 많이 들어있기를 기대하면서 농장으로 들어섰다.
농장에서 일을 하던 사람은 몰려온 서고트족을 보고 놀라다 못해 얼어붙었다. 로마 영내에 이렇게 많은 야만족이 출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비상사태였다. 알라리크는 그에게 말했다.
“오늘 하룻밤 묵어가야겠소. 주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모자를 벗어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은 로마에 있고, 여기는 일하는 사람뿐입니다. 관리자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알라리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뒷걸음질 치며 관리자를 부르러 갔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서고트족은 슬금슬금 농장 안으로 들어섰다. 낮에 전투를 치른 그들은 허기져있었다. 어디선가 빵 굽는 냄새가 나는 통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기가 부엌인가?”
몇 명이 냄새를 쫓아 코를 킁킁거리며 걸어갔다. 그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 쪽으로 우르르 뛰어갔다. 늦게 가면 빵은커녕 부스러기도 없을 것이다.
부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놀란 닭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서 지평선까지 쉬지않고 달려서 도망쳤다. 서고트족은 한참 구워지고 있는 설익은 뜨거운 빵을 화덕에서 꺼내서 허겁지겁 뜯어먹었다.
관리자는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도망쳤을 것이다. 알라리크는 병사들에게 농장의 곡식창고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도록 했다.
“이 정도면 며칠은 넉넉히 먹겠네.”
창고에는 밀가루 포대가 쌓여있었다. 며칠 후에는 떨어지겠지만, 또 다른 농장을 가서 조달하면 그만이었다. 알라리크는 밀가루를 사람 숫자대로 나눠주도록 했다.
농장 여기저기에 불이 피워지고 밀가루로 죽을 끓이거나 빵을 구웠다.
“돼지다!”
배가 고픈 병사들은 돼지를 잡아서 통째로 불 위에 올려놓았다. 소, 양, 닭 등 다른 가축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백 여 마리의 동물이 모두 각각 불 위에 올려졌다. 고기를 굽는 노릿한 냄새에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숲에서 살 때는 사냥을 해서 종종 고기를 먹었지만, 로마 영지에 살게 된 이후로는 가축을 키워도 그 고기는 고스란히 로마인의 식탁에 올려졌다.
창고의 곡식 배급은 공정하게 했지만,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챙기는 사람 것이었다. 서고트족은 농장의 건물마다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값나가는 물건을 찾아다녔다. 금괴라도 발견하면 횡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베갯속까지 칼로 파헤치며 이 잡듯이 뒤졌다. 가위, 거울, 옷 등 값이 나가 보이는 것은 모조리 수레에 실렸다.
오랜만에 고기도 먹고 불룩하게 배를 채운 서고트족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매일이 오늘같기만 하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보다는 훨씬 살만 할 것 같았다.
알라리크는 첫 승리에도 들뜨지 않았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스틸리코가 동로마에 도착한 다음이 진짜 승부였다. 서고트족의 움직임은 모두 스틸리코에게 보고가 되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언제 어디서 스틸리코가 나타날지 그로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간간이 사람들 눈을 피해서 전달되는 루피누스의 서신으로는 스틸리코가 배로 출발했다고 하니, 조만간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최대한 빨리 하드리아노폴리스로 가서 약탈을 하고 군자금을 두둑히 챙겨놓아야 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에 남쪽으로 출발했다. 알라리크는 갈림길에서 왼쪽을 택했다.
“하드리아노폴리스로 가려면 오른쪽 길이 더 가깝지 않습니까?”
아타울프가 물었다.
“우리가 오른쪽 길로 올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왼쪽 길로 가는 거야.”
알라리크는 굳이 먼 왼쪽 길로 돌아갔다. 오른쪽 길로 가면 루피누스의 농장이 있다. 약탈할 목표만 찾고 있는 서고트족의 눈에 그의 농장이 띄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예 피해가는 편이 나았다.
로마에서 유일하게 그를 돕는 루피누스이고, 동로마 재상이라는 그의 지위 또한 스틸리코 못지않은 위치이니 관계를 잘 가져가야했다.
왼쪽 길은 외진 길이어서 농가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농가라고 해도 그들의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당장 내일 먹을 것 하나 없이 탈탈 털렸다. 식량만 털리면 다행이었다. 값나가는 물건이 없자 노예로 팔릴 만 한 젊은 청년과 여인들은 팔기 위해서 끌고 갔다.
“제발 애들을 데려가지 마세요.”
로마인들이 울면서 사정했다. 서고트족이 십대 아들 딸을 모두 빼앗아 간 것이다. 졸지에 집에서 끌려 나와서 가족들과 헤어져서 줄에 묶여 끌려 다니게 된 로마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겁에 질려 있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서고트족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겪어온 일이었다. 로마에 진 빚을 갚지 못해서 아이들을 빼앗기고 전쟁에서 포로가 된 청년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일은 그들의 마을에서 흔한 일이었다. 로마인들이라고 그런 일을 겪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니, 로마인들도 그런 일을 겪어봐야 했다. 그래야 서고트족의 분노를 이해할 것이다.
좁은 산길을 빠져나가자, 넓은 대로가 나왔다. 이제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는 이 대로를 따라 가면 된다. 대로 양쪽에는 기름진 밭이 줄지어 있었다. 봄이라서 밭에는 아직 수확물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아스파라거스가 뾰족뾰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스파라거스를 꺾어서 입에 물었다. 신선한 양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이 야채들은 매일같이 수확해서 근처의 도시로 날라져서 귀족들의 식탁에 올려질 것이다. 그것들도 파서 수레에 실었다.
커다란 농장도 나왔다. 양떼가 언덕을 달려 내려왔다. 소의 목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렸다. 로데리크가 입맛을 다셨다. 비터리크가 휘파람을 불며 그에게 눈짓을 하더니 농장 울타리를 향해서 갔다.
“오늘 저녁은 포식하겠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농장의 울타리를 넘어갔다. 이 농장은 원로원 의원 누구누구의 소유이며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붙어있었지만, 아무도 그 문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서고트족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농노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빈집이나 다름없는 농장은 서고트족의 안방이 되었다. 창고에도 곡식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는지 얼마 없었다.
귀족의 대농장은 미리 서고트족의 경로를 입수해서 대피했다. 반면에 정보가 없는 평범한 로마인 개인농장은 아무 대책이 없이 서고트족에게 당했다.
포장도로를 걷게 되자, 속도가 빨라졌다. 로마인 도시가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으로 마주친 도시였다. 도망친 로마인들은 아마도 저 곳에 피신했을 것이다.
로마인 도시에 들어와 본 서고트족은 소수였다. 통행허가를 받아야 로마인 거주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리고 오두막에서 지내며 신화처럼 상상하던 로마제국의 도시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저거 봐, 저거!”
성벽위로 삐죽이 솟아있는 높은 교회 지붕을 보며 서고트족은 감탄했다. 서고트족 마을에는 저렇게 높은 건물은 없었다. 저런 높은 건물을 지을 기술을 가진 자가 없었다.
“정말 집집마다 금이 있어요?”
유리크의 동생 발리아가 알라리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글쎄. 그야 모르지. 가서 물어보자. 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야. 금이 있나요 라고.”
알라리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들은 성으로 다가갔다. 놀란 제국의 병사들이 황급히 성문을 닫았다. 국경이 아닌 제국내부의 도시인 그곳에는 고작해야 백여 명의 제대한 병사들만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시민자원군까지 해도 1천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서고트족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남자들만 1만 명이 넘었다.
서고트족은 넓게 성을 포위했다. 알라리크는 앞에 나가서 성을 향해서 소리쳤다.
“성문을 여시오. 우리는 배가 고프니 돈과 먹을 것을 주면 물러가겠소.”
시장은 성벽에 나와서 호통을 쳤다.
“어디 감히 야만족이 로마제국의 도시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느냐! 썩 물러가라!”
그도 알고 있었다. 야만인 약탈자들이 지나간 후에는 그 자리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다는 것을. 물건은커녕 사람이라도 상하지 않고 남아있으면 다행이었다. 식량과 값나가는 물건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싹쓸이해서 가져가버렸고, 부유해 보이는 사람은 납치해서 끌고 가서 몸값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허락은 받지 못했지만, 들어가겠소.”
알라리크는 여인과 아이들에게 수레를 몰고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한 후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도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돌로 된 성벽 위에 로마군이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도시의 성벽은 그렇게 높지 않아서 공성기가 없어도 공략이 가능했다. 사다리로 오를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목책을 넘어 본 서고트족은 이전처럼 적을 보고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은 이전에 목책을 방비하던 로마군보다도 적은 숫자였다.
“한 줌 밖에 안 되는구먼.”
한 서고트족이 소리쳤다. 승리의 경험이 있는 그들에게 로마군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로마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들이 창과 칼을 들고 서 있는 성벽을 오르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선발대로 기병대가 적진에 들어가서 시선을 분산시킬 수도 없었다.
알라리크는 성벽을 둥글게 포위하도록 하고 서고트족 앞에 섰다. 그들은 알라리크가 무슨 말을 할 지 쳐다보았다. 알라리크는 그들의 얼굴을 죽 돌아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모두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서고트족은 그가 갑자기 왜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나 눈을 껌벅였다.
“성 안에 들어가면 기독교인과 반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마라. 알겠나?”
그의 말에 서고트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리크는 성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이후의 행동지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성을 곧 점령할 거라는 기분이 들며 두려움이 사라졌다.
“기독교인과 반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말래.”
서로서로 알라리크가 한 말을 반복하며 머리에 담았다.
“교회는 불태우거나 약탈해서는 안 돼.”
다시 강조하는 알라리크의 말에 서고트족이 일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투를 하고 약탈을 하다보면 흥분해서 불필요한 살육을 하거나 도를 넘는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알라리크는 종교적 교리와 금기사항을 주지시킴으로써 그들이 감정에 치우쳐서 이성을 잃고 행동하지 않도록 규율을 정했다.
서고트족의 다짐을 받은 알라리크는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성벽 위에 서있는 시장을 가리켰다.
“가장 먼저 성벽을 넘어서 성벽에 깃발을 꽂는 자는 시장의 침실에서 자게 해주겠다.”
그것은 단순히 어디에서 자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침실에 있는 귀중품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었다. 수십 개의 보석 박힌 반지, 금목걸이, 비단옷, 칼, 갑옷 등 하나하나가 그들의 일 년 수익에 맞먹는 귀중품을 남들의 손이 닿기 전에 고스란히 혼자 챙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박!”
“오늘은 내가 시장 침실에서 잔다.”
서고트족은 왁자지껄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한 번 목책을 넘어 보니 요령이 생겼다. 어떻게 공격을 막아야 하는지, 어느 타이밍에 벽을 뛰어넘어야 하는지, 올라갈 때는 어떤 자세로 올라가야 공격을 피하기 쉬운지, 그들은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격준비를 했다.
“공격!”
알라리크가 신호를 주자, 서고트족은 함성을 지르며 성벽으로 돌진했다.
괴성을 지르며 서고트족 전사들이 개미떼처럼 성벽에 달라붙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수비하는 로마군은 화살을 쏘고 창으로 성벽을 오르는 서고트족을 찔러댔지만, 숫자가 너무나 차이가 났다.
“어서 올라가!”
아타울프는 서고트족을 독려했다. 그러나 그의 잔소리는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은 흥분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열심히 기어올랐다. 화살을 맞고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믿는 듯이 위로 위로 계속해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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