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거
일리리쿰에 도착한 알라리크는 혼자 조용히 숨어서 지냈다. 병사를 잃고 사방이 적인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약탈하고 다닌 동로마와 서로마에는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많았고, 서고트족 내에도 아말리 가문이 그를 암살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의 적이 워낙 많아서 숨어 지내는 편이 안전했다.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어서 때로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암암리에 야만족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여전히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고자 하는 야만족도 있었다. 야만족의 일부 분파의 부족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찾아왔다.
특히 동고트족 지도자들은 그를 거듭 찾아왔다. 로마제국을 휩쓸고 다니며 약탈하고 황제를 포위하고 사로잡을 뻔했던 알라리크의 경험이 그들에게는 절실했다. 그들은 아타울프에게 찾아가서 알라리크를 만나게 해주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하는 수 없이 알라리크는 그들을 만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동고트족은 로마제국에 들어와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우리도 서고트족처럼 로마제국 영내에 살고 싶습니다.”
“40만명의 고트족이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막상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는다고 생각하면 길도 잘 모르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막막할 것이다. 그들은 라틴어조차 못해서 로마인과 의사소통도 안 되었다. 약탈을 하려고 해도 말이 통해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의 도움이 필요했다.
알라리크는 거절했다.
“나는 그런 능력이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지난번에 트리비길트가 찾아왔을 때는 도와주셨잖습니까. 로마제국을 상대로 당신만큼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은 없습니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트리비길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봤잖습니까. 결과적으로 내 모든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로마제국을 이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스틸리코가 있는 한 거의 불가능할겁니다.”
알라리크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보였다. 국경은 어찌어찌 넘겠지만, 결국 스틸리코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죽거나 포로가 되어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노예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내가 동고트족을 이끈다 해도, 지금까지 한 일 이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알라리크의 거듭된 사양에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실패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숲에서는 훈 족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도와주던 도와주지 않던 우리는 강을 건널 겁니다.”
서고트족 선조들도 동고트족과 마찬가지로 훈족에게 쫓겨서 목숨을 걸고 로마영지로 들어왔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스틸리코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다. 자신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남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혹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단 말인가.
훈족에게 살해당하면서 남아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굳이 제 발로 로마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예가 되러 오겠다는 동고트족을 말릴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이끌어주겠다고 할 수도 없고, 잘해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소용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동고트족의 우두머리 라다가이수스는 알라리크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의 기개는 어디로 간 거요? 이탈리아를 정복하지 못하면 차라리 이탈리아에서 죽겠다고 하던 불굴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소? 모두가 그대를 우러르며 따르겠다고 하는데 어째서 동족의 부름을 외면하는 거요?”
알라리크는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죽었소. 여기 있는 것은 껍데기뿐이오. 내가 시도한 것들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소. 그대들이 생각하는 알라리크는 이미 한 물 갔고, 시대가 지나서 사라졌소. 그러니 당신들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시오.”
그가 택했던 전략은 서고트족을 이끌고 다니면서 약탈하고 로마황궁을 협박해서 땅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몇 차례의 시도 결과, 그런 식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루어낼 수 없었다.
로마황궁은 백성들이 몇 년 씩 약탈당하건 말건 신경도 안 썼다. 그를 제국 내부의 정쟁에 이용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스틸리코가 출정하면 패배해서 포로로 잡히고 노예로 팔려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동고트족이 돌아간 후에 아타울프가 물었다.
“어째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수락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알라리크는 처음부터 권력을 누리고자 서고트족을 이끈 것이 아니었다. 서고트족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땅을 얻어서, 착취당하지 않고 일한만큼 능력만큼 제대로 대우받으면서 살고, 소모품취급당하지 않으면서 싸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서고트족의 지도자가 된 것이었다.
그 방법이 보이지 않는 지금, 그에게 더 이상의 권력의지는 없었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한계가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저들을 이끌겠어.”
“40만 명이면 로마군의 열 배의 병력입니다. 그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스틸리코와 싸워봤으니 알 텐데.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아타울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느끼기에도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스틸리코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쓸쓸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알라리크는 빈 집의 문을 열었다.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스틸리코는 그를 이기는 것으로 모자라 그를 놓아주기까지 했다. 언제든지 다시 잡아서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괴감에 머리가 멍하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 하러 살아야 하지?’
자신은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죽고 싶도록 괴로웠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금했고, 그는 서고트족의 왕이었다. 가이나스처럼 전장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 말고는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죽음은 없었다.
밤이 깊도록 알라리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두워지면 더욱 더 아내와 아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살아있기는 할까.
얼마 전에 로마에서 개선식이 있었다. 보통은 개선식에 이름난 포로들을 앞세워서 행진을 하니 그의 처자식도 쇠사슬에 묶여서 로마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끌려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선식에서 끌려 다닌 포로는 몇 명 없었고, 그 가운데 그의 가족은 없었다고 했다. 비밀감옥에 은밀히 갇혀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병들어 죽었기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지하감옥에서 햇빛도 보지 못하고 갇혀있다 죽었을 지도 모르는 그들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차라리 자신이 폴렌티아나 베로나에서 죽었더라면 이런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괴로움을 맛보라고 스틸리코가 일부러 자신을 살려둔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 지경이었다.
동서로마를 약탈하면서 서고트족은 많은 로마인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았다. 아들과 딸을 빼앗기고 땅에 쓰러져서 울부짖던 로마인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제발 저를 데려가고 아이들을 돌려주세요.’
그들의 울음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한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몫이었다. 당연히 자신도 그들만큼 괴로워야 했다.
로마군에 포로가 된 서고트족의 가족도 모두 같은 신세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가족을 헤어지게 만들었으면 자신도 똑같이 그런 일을 당해야 했다. 그것에는 억울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가족을 빼앗기는 고통이 이렇게 큰 것인지는 미처 몰랐다. 차라리 칼에 찔리는 고통이 백번 나았다. 마음이 아픈 고통은 더욱 참기 어려웠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가슴속에서 구토가 올라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에 뚫린 구멍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공허했다.
낮에는 술을 자제하는 그도, 밤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침대 밑에 술병을 보관해 둔 상자를 꺼냈다. 하나를 꺼내서 막 뚜껑을 열어 들이키려는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밤중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급한 일이라곤 없었다. 이상한 예감에 술병을 상자에 도로 넣어 침대 밑으로 밀어 넣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 옆에 걸어놓은 칼에 시선이 갔지만, 굳이 집어 들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를 죽이러 왔다면 기꺼이 그 칼 앞에 목을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문을 당겼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 스틸리코였다.
알라리크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가 있는 곳은 서고트족들 사이에도 몇몇만 알고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직접 이 곳까지 찾아왔다.
“들어가도 되겠나?”
스틸리코는 알라리크가 대답을 하지 않고 서있자, 그를 지나쳐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알라리크는 이것이 꿈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스틸리코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알라리크는 분노할 기운마저 없었다. 그는 차갑게 물었다.
“왜 굳이 여기까지 직접 왔지?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나를 죽이고 싶어진 건가?”
스틸리코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문 밖에 서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방 안으로 한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알라리크는 심장이 뚝 멎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바로 알라리크의 아내와 아들이었다.
“아빠? 아빠!”
몇 달 못 본 사이에 훌쩍 큰 그의 아들은 그의 얼굴을 잊었는지 머뭇거리다가 달려와서 그에게 안겼다.
“알라리크.”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알라리크에게 다가와서 그를 안았다. 알라리크는 부끄러운 것도 굴욕감도 잊어버리고 가족들을 안고 흐느끼며 울었다.
다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말라붙어버린 줄 알았던 그의 감정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스틸리코는 병사들을 도로 내보내고 자신도 뒤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을 닫고 가려는 그를 알라리크가 불러 세웠다.
“잠깐.”
알라리크는 아내에게 아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 있으라고 한 후에 스틸리코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조건으로 가족들을 돌려보내준 거지? 더 이상 로마를 공격하지 말라는 조건인가?”
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돌려보내주면서 조건이 없을 리 없었다. 스틸리코는 짧게 대답했다.
“조건은 없네.”
“뭐라고?”
알라리크는 대체 그가 무슨 속셈인지 혼란스러웠다. 무슨 수작인지 알아내지 않고 무작정 좋아할 수는 없었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생각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이 말했다.
“조건을 내세우면 분명히 거절하고 가족을 다시 데려가라고 하겠지. 그러니 달리 조건은 걸지 않겠네.”
스틸리코는 다시 뒤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지 않고서는 보낼 수 없었다.
“조건은 없어도 바라는 건 있겠지. 그게 뭐지?”
그제야 스틸리코는 천천히 돌아서서 알라리크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겼나?”
마침내 오랜 시간 끝에 그들은 책상에 마주앉았다. 밤이 깊어가며 양초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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