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루피누스는 매일같이 알라리크에게 언제 어떤 규모로 출정하는지 물어왔다. 예상보다 출정하려는 사람의 숫자가 적자 루피누스는 실망하며 중얼거렸다.
“스틸리코의 로마군을 상대하려면 그보다 두세 배의 숫자는 되어야 할 텐데.”
로마군에 대한 공포를 이기려면 더 큰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루피누스는 서고트족을 더 쥐어짜기로 했다.
“이래도 버틸 수 있나 보자.”
그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건의해서 서고트족에게 주던 농사 보조금을 정지시키도록 했다.
서고트족 땅은 척박해서 개간해도 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세금을 내고 이자를 내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굶어죽지 않도록 얼마간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다니 서고트족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알라리크는 족장회의를 소집했다. 족장회의를 통해서 로마 공격을 공론화하고 최종 의결하려는 것이었다. 동로마군을 이끄는 티마시우스 장군이 훈족을 상대하느라 소아시아에서 바쁜 지금이 공격의 적기였다. 루피누스의 보조금 지급 중단 정책으로 서고트족의 불만도 높아진 상태였다.
“로마는 우리에게 약속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금과 이자는 꼬박꼬박 떼어가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불공정한 처사를 항의하고 서고트족을 로마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알라리크는 족장들에게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지금 그리스는 텅 비어 있습니다. 티마시우스가 곧 돌아올 겁니다. 그 전에 그리스를 공격해야 합니다.”
그를 지지하는 족장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맞소. 우리도 로마인들처럼 살고 싶은 곳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비옥한 땅에서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황제에게 요구합시다.”
“빚도 탕감해달라고 합시다.”
반면에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족장들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그들을 설득하려면 뭔가 충격적인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예상 가능한 범위의 계획으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변방을 공격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본토, 그리스로 들어가서 동로마제국의 심장인 콘스탄티노플로 갈 겁니다.”
알라리크의 말에 장내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한 족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동방으로부터 오는 향신료와 비단, 아프리카로부터 오는 상아, 북부로부터 오는 모피 등 제국의 온갖 사치품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었다. 이야기만 들었지 서고트족 가운데서 콘스탄티노플에 가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서로마를 통틀어서 가장 번화한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럼 다른 콘스탄티노플이 있습니까?”
알라리크는 뭐가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한 번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서고트족은 콘스탄티노플에 가면 안됩니까?”
서고트족장들은 놀라서 웅성거렸다. 서고트족 거주지역을 벗어나는 것도 로마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동로마제국의 수도에 들어가자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
족장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물론 가보고 싶지.”
서고트족은 기대감에 들썩거렸다. 지금까지 로마군과의 전투는 국경지대나 서고트족 거주지역에서 벌어졌다. 로마의 영토 내부에서 전쟁을 치른 적은 20년 전 프리티게른이 이끌던 때 이후로는 없었다.
그런데 알라리크는 동로마제국의 심장부에 단검을 찔러 넣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싸우기만 하면 지던 로마인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는 상상만 해도 피가 끓어올랐다.
“가보자! 가는 거야!”
수염을 길게 기른 한 족장이 일어나서 소리쳤다. 다른 족장도 일어나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우리가 언제 콘스탄티노플에 가보겠어. 로마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가자! 가자! 콘스탄티노플!”
단숨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비단과 향신료의 도시로 간다고 생각하니 족장들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이미 양손에 약탈한 보석을 쥔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에 보이는 목표를 제시하자 불끈 힘이 솟았다.
그때 구석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실적으로 서고트족이 로마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달아오른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사루스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족장들이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알라리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기지 못할 거라면 왜 시작하겠습니까.”
사루스는 그에게 빈정거리며 아픈 곳을 찔렀다.
“그 잘난 영웅심으로 서고트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건가? 프리기두스에서 만 명을 죽인 걸로는 부족해?”
그는 칼을 뽑아들었다. 족장들이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서고트족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장검이었다. 팔 길이보다도 긴 칼에 족장들의 얼굴이 어른거리며 비쳤다.
“용기가 있다면 칼을 뽑아라. 나 한사람도 이기지 못하면서 서고트족을 전쟁터에 끌고 가는 건 말이 안 돼지.”
알라리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알라리크가 사루스의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겁쟁이가 되는 것이고, 사루스의 결투를 받아들이면 글라디우스로 스파타를 상대해야 했다.
사루스는 그에게로 한발 다가가며 도발했다.
“설마 또 피하려는 건 아니겠지?”
지난번에 사루스가 칼을 뽑아들었을 때는 싸움을 피하며 말로서 족장들의 마음을 바꾸도록 했지만, 지금은 설득보다는 밀고나가는 용기를 보여줘야 할 때였다. 두 번 피하면 사람들에게 비겁한 자라는 인상을 줄 것이다. 로마와 싸우려는 그의 결심이 죽음을 각오할 만큼 단단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사루스는 대답이 없는 알라리크를 보고 히죽 웃었다.
“서로의 죽음의 책임을 묻지 않는 정정당당한 결투를 신청한다.”
상대보다 훨씬 긴 칼을 들고 정당한 결투라니. 아타울프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알라리크의 팔을 잡았다.
“장검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사루스가 든 칼은 알라리크의 칼보다 한 뼘은 길었다. 반 뼘만 찔려도 치명상을 입는데 한 뼘이나 긴 칼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무기를 같은 것으로 하자는 둥 쓸데없는 말은 안하느니만 못했다. 그런 변명을 할 바에는 싸우지 않겠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상관없어.”
알라리크는 아타울프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왔다.
“긴 칼을 들면 이길 수 있다고 믿다니, 너다운 생각이군. 그러니까 서고트족이 로마와 싸우면 진다고 생각하지. 그게 네 한계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아.”
알라리크는 글라디우스를 뽑아서 사루스에게 겨누었다. 사루스는 괴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바람소리와 함께 장검이 알라리크의 코 앞을 스쳤다. 베이지 않으려면 뒤로 물러나야 했다.
뒤로 한 발 물러났는데도 긴 검이 알라리크의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한 치만 덜 물러났더라면 목을 베었을 것이다.
사루스의 칼이 알라리크의 복부로 찔러 들어왔다.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어서 피했다. 칼이 허공을 찌르며 멈출 곳을 찾지 못하고 공기를 휘저었다. 사루스의 핏발선 눈과 앙다문 이빨이 그를 씹어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캉!”
알라리크는 몸을 세우며 사루스의 긴 칼을 받아쳤다. 짧은 칼로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수비는 할 수 있었지만, 공격을 하기는 무리였다. 상대방에게 가 닿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몸에 칼이 박힐 것이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사루스의 칼이 책상을 내리쳤다. 족장들이 놀라서 일어나 몸을 피했다.
알라리크는 사루스를 피해 기둥 뒤로 숨었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대치했다. 사루스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기둥 오른쪽으로 찔렀다. 알라리크의 왼쪽을 노린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칼을 피하며 자신의 오른손으로 찔러서 사루스의 왼쪽을 노렸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기둥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공격방향인 오른쪽으로 전진하며 천천히 빙글빙글 돌게 되었다.
기둥 때문에 칼이 걸려서 상대의 칼을 피하지 않고 쳐내려면 왼손으로 칼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칼을 옮겨잡는 짧은 찰나에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그 순간 상대가 공격해오면 위험에 노출되었다.
사루스의 칼이 기둥 옆에 서 있는 알라리크를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알라리크는 사루스의 칼을 피하며 반대편으로 사루스를 공격했다. 사루스도 피하며 기둥을 돌았다. 서너 번이 그런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마.”
사루스는 기둥을 돌며 알라리크를 노려보았다.
“네가 피하는 거잖아.”
알라리크도 옆으로 돌며 대꾸했다.
사루스의 칼이 찔러 들어올 때 이번에도 알라리크가 피했다. 사루스는 그가 반대편으로 역습해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피했다.
그런데 알라리크는 반대편으로 역습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왼손으로 칼을 바꿔 잡았다. 칼이 길지 않아서 순간적으로 바꿔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사루스의 칼을 막아내며 한 발 앞으로 전진하며 몸무게를 실어 밀쳐냈다.
알라리크가 피하지 않고 쇄도해 들어오자 놀란 사루스는 잠시 주춤 하며 한 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다시 알라리크는 곧바로 다시 오른 손으로 칼을 잡고 이전처럼 오른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사루스는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스텝이 꼬여서 중심을 잃었다. 왼손으로 칼을 바꿔 잡고 막으려고 했지만, 긴 칼이 기둥에 부딪쳐서 막히는 바람에 바꿔 잡지 못했다.
“앗!”
모두의 눈이 그들을 향한 가운데 알라리크의 칼이 사루스의 목에 들이대졌다. 사루스의 칼은 기둥에 걸려서 아래로 향한 채였다. 퍼런 칼날이 사루스의 목줄을 눌렀다.
족장들은 알라리크가 사루스를 죽일 것인지 숨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아무리 서로 죽음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동의한 결투라지만, 사람을 죽이면 로마법에 의해 처벌받을 것이다.
알라리크가 칼을 사루스의 목 앞에서 멈춘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평상시라면 그를 죽이고나서 재판을 받으며 정당방위였다고 호소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서고트족의 동향과 알라리크의 움직임을 은밀하게 탐문하고 있었다. 출정을 앞둔 상황에 알라리크의 조그만 실수라도 로마에서 꼬투리를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으면 서고트족의 결집은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서고트족의 로마 정벌이라는 대업은 언제 또 기회가 올 지 몰랐다.
그리고 사루스를 죽이면 아말리 가문과 오랫동안 그들을 따르는 족장들과도 완전히 척을 지게 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서고트족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사루스는 알라리크가 그를 찌르지 않자 당장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끼고 얼굴의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고마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법적 처벌을 의식해서 살려주는 것뿐이니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증오와 모멸감에 얼굴을 떨며 금방이라도 알라리크의 목을 비틀 듯이 쳐다보았다.
“칼을 버려.”
알라리크의 말에 사루스는 불끈 하며 스파타를 꽉 쥐었다. 칼을 버리지 않으면 모든 족장들에게 알라리크가 자신을 정당방위로 죽이는 것을 납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손을 펴서 칼을 떨어뜨렸다.
알라리크는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서고트족의 대표로서 서고트족을 분열시키는 너를 부족에 남겨둘 수 없다. 즉시 서고트족을 떠나라.”
사루스는 결투에서 패배했다. 살려준 것만 해도 관대한 처사였으니 그의 추방을 반대하는 족장은 없었다.
추방령이 내려졌으니, 더 이상 마을에 머물 수 없었다. 사루스도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그는 애초부터 마을을 떠나 로마군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품었던 목표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알라리크를 죽이는 것도, 싱게리크를 서고트족 대표로 만드는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모욕감에 불타는 표정으로 회의장 문을 나섰다. 나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손가락으로 알라리크를 가리키며 내뱉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는 반드시 죽이고 만다.”
그는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사루스를 살려둔 것은 그의 복수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족장이 쳐다보는 가운데 결투에서 지고 추방령을 당한 그는 생전 처음 겪는 이런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제 알라리크의 죽음은 그의 삶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아타울프가 알라리크에게 다가왔다. 마치 그가 싸운 것처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했다.
“괜찮으십니까?”
알라리크의 어깨의 상처는 피가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별로 깊지 않았다.
족장들은 방패도 없이 글라디우스로 긴 스파타를 이긴 알라리크를 입을 벌리고 감탄하며 쳐다보았다.
“역시 알라리크야.”
“짧은 칼을 든 우리도 긴 칼을 든 로마를 이길 수 있겠어.”
“그래. 알라리크에게는 불가능한 게 없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야.”
서고트족은 알라리크에 대한 믿음으로 동로마 출정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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