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집
알라리크는 떠나기로 동의하는 족장들에게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모이도록 했다. 족장들은 각자 자신이 이끄는 부족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을 약탈하러 갈 테니 따라갈 사람들은 짐을 챙겨서 오라고 했다. 족장들이 모두 알라리크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부족원들이 다 족장의 말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안정된 삶을 버리고 떠나기 싫어하는 서고트족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자신의 부족의 나이 많은 노인을 만나러 갔다. 노인은 땅이 녹으면 뿌릴 씨앗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알라리크가 어려서부터 아저씨라고 불렀고, 그가 자라는 것을 보아왔던 노인이었다. 알라리크는 그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다가가며 말했다.
“올해 농사를 준비하시나요?”
그는 알라리크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짐작했다.
“그래야지. 날이 따듯해지니까.”
“농사를 지어봐야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을 텐데요.”
“그래. 헌데 뭐 별 수 있나. 이정도 사는 거라도 감사해야지.”
노인도 농사를 지어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수탈에 그들의 삶이 나아질 가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는 난처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손수 지은 집과 내 손으로 일군 밭을 버리고 갈 수는 없어.”
노인은 훈 족의 위협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나우 강을 넘었다. 20년 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과의 전쟁 끝에, 이 곳에 살도록 허락받았다. 로마는 그들에게 못 쓰는 땅을 주고 개간하도록 했다. 숲에서 살던 그는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고생 끝에 이제야 그럭저럭 밭도 넓어지고 농사를 지을 만 했다. 평생을 걸쳐서 일군 것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아저씨가 결심하지 않으면 아저씨 가족의 삶도 변화가 없을 겁니다.”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훈 족에게 목숨이 위태롭던 그에게는 안전하게 살 땅이 생긴 것만 해도 감사했다. 그러나, 그의 자식과 손자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생명의 안전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 애들은 몰라. 이렇게 안전한 곳에서 굶어죽지 않고 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맞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아저씨같은 분이 로마에 맞서서 싸우지 않았으면, 우리는 여전히 아저씨가 사셨던 것처럼 힘들게 살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아저씨께 감사합니다.”
알라리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땅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로마에 감사하지는 않아요. 겪어봐서 아시잖아요. 그들은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싸우지 않으면 우리를 착취하고 이용하려고만 들어요. 그들에게 우리가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노인의 머릿속에 평생 동안 제국에게 당했던 억울한 기억들이 스쳐갔다. 로마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이긴 그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했지만, 막상 가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땅을 갈고 돌을 고르고 먼 곳에서 물을 날라서 일 년 내내 고생해서 농사를 지으면, 세금을 떼고, 농기구와 땅을 빌려준 댓가라며 추수한 곡식을 빼앗아갔다.
그 와중에 수십 번의 크고 작은 마찰과 전투들이 일어났다. 때로는 폭동을 일으켜서 로마군과 싸웠고, 때로는 로마군의 전쟁에 동원이 되어서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야만족과 싸웠다. 그때마다 마을의 상당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거나 부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었다.
파란만장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 어떻게 그 고생을 다 이겨냈을까 하는 감회가 들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냈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처럼 처절하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식들은 자신과 같이 힘들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프리티게른이 도나우 강을 넘자고 할 때 아무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발티 가문도 훈족과 싸우면서 고향을 지키자고 했죠.”
알라리크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알라리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전해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는 몸소 겪은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프리티게른이 강을 넘어서 로마 영내에 살게 되자, 몇 년 사이에 서고트족이 모두 그를 따라서 건너왔고, 훈족의 위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고향을 떠나기를 두려워했다면, 우리는 훈족에게 몰살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노인은 잠시 말없이 농기구를 쥐느라 마디가 튀어나온 주름진 손으로 그릇 속의 씨앗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집을 떠나지 않을 거야. 나야 따라 가봐야 짐만 되지.”
알라리크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노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내 자식들이 간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노인은 과거를 떠올리는 듯 말했다.
“나는 20년 전에 프리티게른과 함께 로마군과 싸웠어. 그때 나는 물러서면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구부정하던 그의 가슴이 펴졌다.
“그 전투에서 우리는 로마의 황제를 죽였어.”
그는 한 손으로 알라리크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네가 우리보다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라리크는 자신을 격려해주는 그에게 마음이 뭉클해서 노인의 굽어진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로마군에게 이기고 돌아올게요.”
서고트족은 20년 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를 죽인 승리를 발판으로 해서 로마제국 영토 내에 살도록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이제 그 승리의 역사를 재현해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어쩔 거야?”
로데리크는 죽을 먹다말고 동생 비터리크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뭘?”
“갈 사람들은 내일까지 짐 싸가지고 오라잖아. 알라리크를 따라 갈 거야?”
“너는?”
그의 가족들은 모두 예전에 죽었다. 어머니는 훈 족에게, 아버지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형은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죽었다. 누나는 로마에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끌려갔다. 그에게 가족은 하나 남은 동생 비터리크 뿐이었다. 비터리크는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아껴 먹기 위해서 멀겋게 끓인 죽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투덜거렸다.
“로마 황제가 이제 보조금을 안 준다잖아. 알라리크의 말이 맞았어. 로마는 우리를 소처럼 부려먹고 나서 빨리 뒈지기를 바라는 거야.”
농사를 지어봐야 희망이 없는데 일을 할 의욕이 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똑같지. 이자랑 세금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는데. 어디로든 가야지.”
한창 피가 끓는 나이인 20대의 그들에게는 알라리크의 말이 구구절절이 옳았다. 로마제국은 평소에는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배를 불리고, 야만족이 쳐들어오면 그들을 앞세워서 싸우게 했다. 이제 로마황제에게 누가 진짜 강한 자들인지 보여주고 정당한 몫을 요구해야 했다.
다음날 그들은 집에 남은 식량과 무기로 쓸 농기구를 빈 수레에 실었다. 가난한 그들에게 달리 더 실을 것도 없었다.
“이게 다네.”
그들은 단촐한 짐이 담긴 수레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알라리크는 병사들만 소집한 것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 가족 모두 짐을 수레에 싣고 모이라고 했다. 로마로부터 땅을 빼앗으면 바로 그 곳에 정착해서 살 계획이었다.
그들은 수십 년 전 도나우 강을 넘어서 처음 로마제국의 영지로 들어왔을 때처럼, 전 재산을 수레에 싣고 이동할 준비를 했다. 화로불이 꺼지고 집은 텅텅 비었다.
평야에는 수만 명의 서고트족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새장에 든 닭과 수레를 끄는 말, 양까지 북적거렸다.
“정착하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라리크는 남아있는 노인들과, 떠나지 않겠다는 족장들에게도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의 최종 정착지가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로마의 도시를 공격한다고 해서 그 곳에 눌러앉아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범죄자들이었다. 농사짓는 것과 싸우는 것 밖에 모르는 그들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불안한 표정과 기대에 찬 표정이 뒤섞인 서고트족을 보면서 알라리크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결심을 하고 말에 올라탔다.
“출발하자.”
알라리크는 무리를 이끌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수만 명의 서고트족의 행렬이 마을을 떠났다. 말을 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짐을 지고 수레를 끌고 걸었다. 정든 집을 버리고 몸만 빠져나가는 그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어서 젖먹이 아이를 안은 채 수레에 앉아있는 여인도 있었다.
“우리가 정말 콘스탄티노플에 갈 수 있을까?”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는 서로에게 나지막하게 물어보며 걸어갔다.
“그러게. 거기까지 갈 수는 있겠지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20년 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를 죽일 정도로 선전했던 서고트족이었지만, 끝내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입성하지는 못했다. 평야에서의 전투는 이겼지만, 단단한 성벽 안에서 방어하는 로마군을 물리치고 성을 빼앗는 것은 무리였다.
당시에 그들은 공성기나 투석기를 비롯해서 성을 공격하기 위한 어떤 무기도 없었다. 농기구를 제외하면 맨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때보다는 칼과 방패로 무장한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절반 가량이 농기구로 무장했다. 달라진 거라면 지도자가 프리티게른에서 알라리크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발렌스 황제를 전투중에 사망하도록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서고트족의 영웅이 된 프리티게른의 뒤를 알라리크가 따를 수 있을까. 프리티게른도 해내지 못한 하드리아노폴리스와 콘스탄티노플 입성을 해낼 수 있을까.
로데리크가 소리높여 외쳤다.
“콘스탄티노플!”
그러자, 비터리크도 형을 따라서 소리쳤다.
“콘스탄티노플!”
메아리처럼 서고트족의 입에서 같은 소리가 퍼져나갔다.
“콘스탄티노플로 간다!”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어느새 서고트족은 시름을 잊고 기대감에 들썩거렸다. 동로마제국의 심장부를 약탈하러 가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황금이 가득 찬 도시를 상상하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여자들은 아름다운 보석과 비단을 볼 수 있다는 상상에 눈이 반짝였다. 수레에 걸터앉은 아이들은 다가올 일들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어른들을 보며 따라서 기뻐했다.
사루스는 라인강변에 있던 스틸리코의 진영에 도착했다. 스틸리코와 가이나스는 그가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가이나스의 물음에 사루스는 입술을 깨물며 스틸리코에게 고개를 숙였다.
“면목없습니다.”
스틸리코는 쯧 혀를 찼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생겼다. 로마군이 출정하면 서고트족을 박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로마군이 도착할 때까지 로마의 도시와 농민들이 서고트족의 약탈에 피해를 입을 테니 그것이 문제였다.
가이나스는 조급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서고트족은 어떻게 되는 거야? 출정하는 거야?”
“알라리크가 곧 그리스로 출발할 겁니다.”
사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콘스탄티노플로 간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가이나스와 스틸리코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동로마의 수도가 서고트족에게 짓밟힐 수도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군.”
스틸리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군대를 둘로 나눠.”
그는 가이나스와 함께 라인강을 지키던 부대의 절반을 이끌고 그리스로 향했다. 알라리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있어서 쉽게 정복되지는 않겠지만, 동로마의 수도가 공격당하는 것의 상징적 의미는 컸다.
스틸리코가 있는 곳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의 거리는 서고트족이 있는 곳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의 거리보다 서너 배는 멀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레와 어린아이들까지 따라가는 행렬이어서 이동속도가 느릴 것이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 약탈을 하며 가야하니 더욱 느려질 것이다.
로마군이 로마가도를 따라 행군하거나 도나우 강을 따라 배로 가면 충분히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서둘러야 했다. 이미 서고트족이 마을을 떠나서 로마 영내에 출몰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잇달아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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