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미르
달도 뜨지 않고 깜깜한 밤이었다. 텅 빈 로마군의 요새 앞의 강을 건너 백여 척의 반달족의 배가 나타났다. 자신의 손을 눈앞에서 흔들어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넌 그들은 배를 뭍에 대고 물속으로 내려섰다.
군데리크는 강 건너편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부엉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나머지 배들도 강변으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쿵 하고 배가 뭍에 닿는 소리와 물속에서 철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고디기젤도 배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험이 많은 그는 어둠속에서도 공기의 냄새만으로도 적을 감지했다. 로마군이 좋아하는 포도주, 치즈, 향료 냄새가 섞인 그들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잠깐.”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들을 붙잡았다.
그때 휫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며 왼쪽에 있던 반달족 병사가 휘청거리다가 군데리크에게로 쓰러졌다.
“왜 그래?”
군데리크가 그의 몸을 더듬자, 그의 몸에 박힌 긴 화살이 만져졌다.
“적이다!”
군데리크는 방패를 들어서 아버지와 자신의 몸을 가리며 소리쳤다. 휘리릭 소리와 함께 탁탁 소리가 나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로마군이 요새를 비웠다고 했는데?”
반달족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화살이 날아오는지 보이지 않아서 방패를 어느 방향으로 들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배 주위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요새에 로마군이 있다 해도 숫자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강을 건너온 반달족이 많으니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욱!”
이번에는 오른편에서 날아온 화살에 반달족이 쓰러졌다. 아무래도 포위된 모양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화살에 맞아서 모두 쓰러지고 말 것이다. 희생을 각오하고 전진해서 적을 쓰러뜨려야 했다.
“요새를 점령해!”
고디기젤의 명령에 군데리크는 병사들을 이끌고 요새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어둡다는 것이 반달족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로마군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니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화살을 쏠 수밖에 없였다.
화살이 자신을 피해가기만 바라며 반달족은 공포심을 이기고 전진했다. 결국은 한 병사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불을 켰다. 불을 켜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고 마는 자살행위였다.
“불을 꺼!”
군데리크는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날아온 화살에 불을 켠 병사는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덕분에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오는지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군데리크와 반달족은 요새로 올라서기 위해서 목책을 기어오르며 요새 안에 있는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반달족이 있는 곳에 불화살을 쏘아서 불을 밝혔다. 로마군의 불화살이 날아와서 반달족의 배에 꽂혔다. 배에 화르륵 불이 붙자 주위가 밝아지며 전투의 실체가 드러났다. 로마군이 요새와 양쪽 3면에서 반달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었다.
“이길 수 있어! 공격해!”
군데리크는 소리치며 목책을 기어올라 자신의 앞을 막아선 로마군을 떠메서 목책 아래로 내던졌다. 그를 따라 올라온 반달족이 보루를 점령했다.
그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프랑크족 기병대가 도착했다. 프랑크족 기병은 반달족 사이로 뛰어들어서 휘젓고 다니며 숲에서 관목을 헤치고 다니는 것처럼 칼로 목을 벴다. 백병전이 벌어지자 로마군도 활쏘기를 멈추고 그들에게 가세했다.
“빌어먹을!”
군데리크는 점령한 보루에서 쑥대밭이 된 자신의 군대를 내려다보았다.
그 가운데 고디기젤이 있었다. 그는 칼을 뽑아서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며 칼을 내리치는 프랑크족 기병의 칼을 받아쳤다. 기병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그 역시 기병과 부딪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아버지!”
군데리크는 보루를 내려가서 고디기젤에게 달려갔다. 고디기젤을 일으켜 세우자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아들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후퇴해.”
프랑크족 기병대까지 가세한 이상 이기기는 어려웠다. 군데리크는 반달족을 향해서 소리쳤다.
“퇴각!”
반달족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탔다. 군데리크도 고디기젤을 부축해서 배로 데려갔다. 화살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뒤를 쫒아 날아가서 물속에 떨어졌다.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반달족 상당수는 어두운 물가에서 배를 찾으며 서성이다 포로가 되었다.
희미하게 동이 트며 피에 얼룩진 강변에 전사자들의 널브러진 시체가 드러났다. 포로까지 합하면 꽤 많은 반달족이 돌아가지 못했다.
“내일 공격한다더니 왜 갑자기 작전을 바꾼 겁니까? 강을 건너갔다가 돌아왔잖습니까.”
마르코미르가 스틸리코에게 다가왔다. 스틸리코는 그를 보고 물었다.
“반달족이 왜 하필 오늘 이 곳으로 쳐들어 왔겠소?”
“글쎄요.”
가우덴티우스가 프랑크족 사내를 끌고 왔다.
“이 자가 어제 고디기젤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마르코미르의 전령이었다.
“고디기젤에게 정보를 알려준 것을 알고 있소. 이미 이 자에게서 자백을 받았소.”
마르코미르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체포해.”
로마군이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르코미르의 동생 순노가 놀라서 소리쳤다. 마르코미르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프랑크족 족장이오. 나를 체포하는 것은 프랑크족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오.”
스틸리코는 냉정하게 말했다.
“체포할 뿐 아니라 군사작전을 노출한 죄를 물어 처형해야 마땅하다.”
마르코미르의 행동은 그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오늘 반달족이 요새를 점령했다면 며칠 안에 수만 명의 반달족이 강을 건너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수장을 처형하는 것은 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릴 위험이 있었다.
“지금까지 십년간 프랑크족이 로마군에게 협력한 공을 생각해서 처형은 하지 않겠다. 감옥에서 자숙하도록 해.”
일단 가둬놓고 프랑크족의 반응에 따라서 마르코미르의 처벌수위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로마와 프랑크족이 맺은 협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너는 프랑크족 족장의 자격이 없다. 프랑크족은 협약을 지킬 거라고 기대하고 너를 족장으로 인정한 것이지, 협약을 깨라고 족장을 시켜준 게 아니다.”
스틸리코는 그를 가두도록 명령했다. 순노가 끌려가는 마르코미르를 보며 소리쳤다.
“이럴 수는 없소. 형을 풀어주시오!”
스틸리코는 그와 프랑크족 기병대에게 말했다.
“마르코미르는 로마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반달족의 편에 섰다. 마르코미르는 당분간 로마의 감옥에 수감될 것이다. 프랑크족은 새로운 족장을 뽑던지, 마르코미르를 기다리던지 알아서 결정하도록 하라.”
“십년 간 로마에 충성한 대가가 이겁니까?”
순노는 분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반발했지만, 무기를 든 로마군에 둘러싸여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프랑크족이 어떻게 나올까요?”
가우덴티우스가 화가 잔뜩 난 듯한 순노의 뒷모습을 보며 스틸리코에게 물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반달족과 내통한 것은 마르코미르 혼자의 일탈이었다. 프랑크족 내부의 분위기는 로마에 호의적이고 반달족에 적대적이었다. 마르코미르는 처벌하더라도, 프랑크족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도록 해서 그들을 로마의 동맹으로 잘 붙잡아 놓아야 했다.
“지켜봐야지.”
자신들의 족장을 체포했으니 프랑크족이 굴욕적이라고 느끼고 반발할 수도 있었다. 프랑크족이 로마를 등진다면 로마는 몇 배로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외교를 잘 하는 것도 총사령관인 그의 몫이었다.
스틸리코가 진지로 돌아오자, 브리타니아에서 소식이 와 있었다. 게르마니아의 야만족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마커스라는 장군이 부하들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브리타니아에 군대의 대부분은 이미 이탈리아로 철수시켰다. 남아있는 소수의 병력으로 브리타니아를 방어할 수도 없었고, 중앙정부에서 돈을 보내주지 않는데 병사들의 봉급을 제대로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병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반란을 일으키는 길 뿐이었다.
마커스는 스틸리코가 잘 아는 자였다. 허황된 권력을 탐할 자가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 원해서 황제가 되었을 리가 없었다. 황제가 되라는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서 수락했을 것이다.
당분간은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야만족과 싸우기도 바쁜데 로마군끼리 내전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 갈리아로 넘어오지만 않는다면 마커스가 브리타니아에서 병사들을 다독이며 자급자족을 해서 잘 살아남기를 바라는 길뿐이었다.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서고트족을 막으니, 동고트족이 쳐들어오고, 그들을 막으니 반달족이 공세를 펴고, 또 그들을 막으니 로마군 내부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모든 일이 3년 사이에 일어났다. 제국 곳곳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하루가 지나도록 프랑크족 마을에서는 회의만 거듭할 뿐 소요사태는 없다고 했다. 평화적으로 마르코미르를 풀어달라고 협상단을 보내올 듯 했다.
스틸리코는 감옥에 갇힌 마르코미르를 찾았다. 프랑크족이 그를 풀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해오면 풀어줘도 좋을지 마음을 떠봐야 했다. 하루가 지났으니 생각이 좀 정리되었을 것이다.
“왜 반달족과 손을 잡으려 한 거요?”
십여 년 간 로마에 충성한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물었다.
“프랑크족은 로마군과의 협약과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마르코미르는 고개를 들었다.
“고디기젤은 지금처럼 야만족끼리 싸우면 답이 없다고 했습니다. 야만족끼리 손을 잡고 로마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를 공격해서 얻는 게 뭐 길래? 반달족이 뭘 주겠다고 했소?”
마르코미르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달족에게 얻을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로마의 발밑에서 로마를 대신해서 싸우며 살 수는 없습니다.”
“반달족이 강을 건너와서 갈리아를 휩쓸고 다니면 프랑크족의 미래가 더 좋아지는 거요?”
스틸리코의 예리한 지적에 마르코미르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 세수를 했다. 반달족이 강을 건너오면 결국 그들은 프랑크족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반달족과 같이 로마제국을 약탈하고 나면 만족할 것 같소? 더 행복해질 것 같소? 약탈 이후에는 뭐가 남겠소?”
스틸리코는 야만족이 스스로 원하는 것도 잘 모른 채 탐욕에 눈이 멀어 로마를 공격하는 것은 의미 없는 약탈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임을 깨닫기 바랐다.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를 공격하는 건 당신들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한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라면 막연한 예감을 따르는 게 아니라, 무엇을 얻고 잃을 건지는 확실히 알고 선택해야 하지 않소.”
마르코미르는 깊은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스틸리코의 말대로 프랑크족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얻을 것은 많았지만, 반달족으로부터 얻을 것은 없었다. 고디기젤의 꼬임에 넘어간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스틸리코가 마르코미르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가우덴티우스가 다가와서 말했다.
“고디기젤이 죽었답니다.”
멀리 있는 반달족 마을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이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장작에 고디기젤의 시신을 올리고 불태워 화장하는 것이었다. 탄식하는 반달족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끝내 라인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다. 스틸리코는 기독교인이었지만 그가 발할라에 무사히 갔기를 바랐다. 별이 뜬 밤하늘로 반딧불이 날아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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