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너는 나와 네 번 싸워서 네 번 모두 졌어. 그러면 이제 전술이 아니라 전략을 바꿔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이미 알라리크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점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스틸리코의 머릿속에는 온갖 지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적을 상대로 전투를 치러 온 로마군의 경험과 전쟁사가 들어있었다.
게다가 그의 의도는 스틸리코에게 속속들이 읽혔다. 알라리크의 주변인물이나 족장 중에 로마군에게 매수되어서 정보를 주는 다수의 첩자들이 있음이 분명했다.
반면에 알라리크가 로마군의 정보를 빼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매수할 자금도 부족했지만, 로마군의 누구에게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에 대한 정보 자체가 없었다. 로마군은 수백 년 간 이민족과 전쟁을 하면서 제국 구석구석에 쌓아온 인맥 망과 정보를 빼내는 기술과 방법론이 축적되어 있었지만, 알라리크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이 얻는 정보의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틸리코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솔직히 야전지휘관으로서 네 전투능력은 그저 그래. 객관적으로 말해줄까? 라인강의 야만족과 비교해서 네 능력은 반달족의 군데리크보다 못하고, 알라니족의 고아르보다는 나은 수준이야.”
알라리크는 반박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평가가 과장되고 야박하기는 해도 귀 기울여야 할 점이 있었다.
“네가 다른 야만족 지도자보다 뛰어난 점도 있어. 선동과 협상은 월등히 잘 하더군. 서고트족을 위해서라면 전쟁보다는 그쪽 재능을 살리는 편이 낫지 않겠나?”
스틸리코는 알라리크가 순순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자 하고 싶던 마음속의 말을 꺼냈다.
“내가 왜 너를 살려줬다고 생각해?”
스틸리코는 로마에 충성한 마스케젤도 만에 하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죽였고, 그가 발탁한 가이나스도 스스로 끌어내렸다. 로마제국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희생시킬 수 있고, 자기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칠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수도 없이 로마를 공격하고 배신한 자신을 살려두는지 알라리크도 의문이었다.
“로마는 너 같은 군사령관이 필요해. 다른 부대는 병사가 줄어들 동안, 네 부대에는 계속 병사들이 늘어났지. 자발적으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이 네 밑으로 몰려들었어.”
스틸리코의 말에 알라리크는 외면하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들은 로마를 위해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전리품 약탈을 하려고 나를 찾아왔을 뿐이야.”
그 역시 과장하기는 했지만, 일부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일리리쿰 군사령관일 때 재정도 안정되고 치안도 좋아져서 로마인들도 만족했지. 로마인과 야만족 모두에게 지지를 받은 사람은 드물어. 지금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야.”
로마군은 야만족 병사가 필요하고, 야만족은 로마 영내에 들어와서 살고 싶어 했다.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졌지만, 그것을 이루어내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가이나스가 동고트족을 끌고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보면, 다수의 야만족이 일시에 동로마에 들어와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바람에 충돌과 학살이 일어났다.
서로마도 사정은 비슷했다. 원로원과 로마인들이 야만족을 영내로 받아들이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있어서, 스틸리코도 포로로 잡은 야만족을 몇 명 씩 로마군으로 편성하는 것 외에는 대규모 이주를 섣불리 추진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알라리크는 잡음 없이 야만족과 로마인 모두를 만족시키며 매끄럽게 해냈다. 일리리쿰에서 수만 명의 서고트족이 일시에 로마인들 틈에 정착하는 데도 몇 년간 아무런 충돌이나 큰 사건사고가 없었다. 그는 로마인과 야만족 사이에서 불신을 원활하게 해소해서 두 집단이 문제없이 어울려 살도록 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로마인과 야만족이 함께 살면서 공생관계로 인력을 충원하고 침체되어가는 서로마의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알라리크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로마군을 뽑을 때 나를 탈락시킨 건 나를 제대로 봤기 때문이야. 내 마음속의 로마에 대한 분노를 알아차렸던 거지. 로마와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내 본성을 말이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일리리쿰에서 로마군에 복무하는 내내 적은 봉급으로 홀대받으면서도 맨 앞에 서서 싸우는 서고트족을 보며 안타까웠다. 표면적으로는 잘 지내는 척 했지만, 농노로 착취 받고 군대에서도 차별받고 공직에도 선출되지 못하는 서고트족을 보면서, 다 같이 싸웠는데 혼자만 군사령관이 되어 출세한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스틸리코가 본 것은 외양으로 드러나는 모습뿐이었다. 알라리크가 얼마나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야만족 부대로 로마군을 이길 수는 없어. 이길 수 없다면 차선으로 어떻게든 로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로마인과 어울려 살아봤지만 서고트족에게 좋을 게 없었어. 내가 하고 싶은 건 서고트족의 나라를 만드는 거야. 의미 없이 로마인을 위해서 가축처럼 일하다 죽을 바에야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알라리크는 숨을 고르고 다시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나는 계속 졌어. 서고트족은 셀 수도 없이 로마군에게 졌지. 그런데도 왜 우리는 져도 다시 일어나서 싸울까? 서고트족에게는 희망을 걸 미래가 없기 때문이야. 우리도 우리의 아이들도 로마인이 농노로 살거나 로마군의 화살받이가 되는 길밖에 없어. 그러니 계속해서 목숨 걸고 로마와 싸우는 거지. 서고트족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면 이 싸움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어. 나는 실패해도 제2의 제3의 알라리크가 계속 나올 거야. 서고트족만 그럴까? 다른 야만족도 마찬가지야.”
스틸리코 역시 로마제국과 야만족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라리크의 생각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로마제국이 야만족을 배척하면서 동시에 착취하고 부를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원인에는 동의했지만 해결책은 달랐다. 스틸리코는 지금까지 야만족들이 로마와 살 길은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로마의 제도 안에 편입되고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소수의 야만족 개인을 위한 길이 아니라, 서고트족 전체를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부 유능한 야만족을 로마군으로 포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야만족 집단을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고 평등하게 땅과 이익과 공직을 나누는 구조를 만들어야 싸움이 끝날 거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로마 영내에서는 로마인들의 반대로 실현이 불가능할 테니, 땅을 얻어서 독립된 서고트왕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로마영토를 서고트족에게 떼어줄 수는 없어. 하지만, 로마의 동맹이 되어서 싸우다 보면 국경지역에 실질적으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점유하고 수비하며 살 수는 있을 거야.”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는 로마군단이 철수해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들이 있었다. 그런 지역이라면 명목상의 왕국을 세우지는 못해도 서고트족이 해당 지역을 지켜주고 실질적으로는 지배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혹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알라리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프리기두스 전투를 겪고 나서, 다시는 로마군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서고트족이 로마군을 위해서 대신 피를 흘리는 일은 없을 거야.”
로마의 이이제이 전술에 희생당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스틸리코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프리기두스 전투의 일은 나도 안타까워. 그 때는 서고트족에게 작전권이 없었으니까 참사를 막을 수 없었지. 앞으로는 서고트족이 치르는 전투는 모두 네가 작전권을 가지고 지휘하도록 해. 목표만 달성한다면 네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싸우던 관여하지 않겠다.”
알라리크가 대답이 없자, 스틸리코는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협력할 방법은 많아. 네가 진정 서고트족의 미래를 위한다면, 로마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은 접어두고 냉정하게 판단해.”
그는 나가다가 말고 알라리크를 돌아보고 말했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이제부터는 로마제국의 일에는 중립을 지켜줬으면 해. 로마제국에 어떤 전쟁이나 내전이 발발하더라도 관여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주게.”
최소한 그의 뒤통수를 치는 짓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동로마와 서로마 궁정과 직접 대화해서 황제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로마와의 대화는 나를 통해서만 했으면 좋겠네. 어디까지나 부탁이네.”
“부탁이라.”
알라리크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로마식 후원관계였다. 로마에서는 상대가 베푼 돈이나 후원 또는 도움을 받으면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라도 반드시 보답을 하는 것이 암묵적 사회규칙이었다. 그런 관계를 통해서 사회속에서 신용과 인맥을 쌓고 사회가 돌아갔다. 원로원 의원들과 행정관리들도 서로 돈을 대주거나 그 지위에서 할 수 있는 청탁을 받아주고 편의를 봐주는 상부상조하는 후원관계로 얽혀있었다.
은혜를 베푼 후원자들은 대놓고 상대방에게 은혜를 갚기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저 친한 친구니까 도와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언젠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주어 보답을 해야만 했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그런 식의 은혜를 주고받는 후원 거래를 트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스틸리코에게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빚졌다. 그렇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행동으로 은혜를 갚아나가면 되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갚기만 한다면,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영원히 굴복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스틸리코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지만, 이미 알라리크는 그에게 여러 차례 은혜를 입었다. 두 번이나 그의 목숨을 살려줬고, 가족들까지 살려줬으니, 로마식 후원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도리로 더 이상 스틸리코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모략을 꾸미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로마의 일에 중립을 지키고 간섭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도 서고트족의 이익에 반하는 일도 아니었다.
알라리크는 방으로 가서 긴 여행에 지쳐 잠이 든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밤새도록 이렇게 쳐다보고 있고 싶었다.
알라리크는 방향을 바꿔서 새로운 판을 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틸리코를 이길 수 없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로마제국의 패권을 인정하면서 서고트족이 최대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현명했다.
로마제국도 황제도 황궁도 로마인도 믿을 수 없지만, 그리고 스틸리코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는 야만족을 이용해먹기만 하고 배신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동맹인 프랑크족을 대하는 걸 봐도 장기적인 동맹 관계를 가져가면서 야만족과 한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스틸리코가 그를 적대하지 않고 서고트족과 전략적으로 공존하고자 한다면 그도 로마제국을 전복시키려고 하기보다,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서고트족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도모하는 편이 현실적일 것이다.
뒤척이면서 쌔근쌔근 숨을 내쉬는 아들을 쳐다보던 알라리크는 완전히 새로 태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족을 위해서 서고트족을 위해서 어떤 힘든 일도 견디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두 번째로 주어진 이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랜만에 가슴에 의욕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죽은 것 같았던 그의 혈관에 새로운 생명의 힘이 달려갔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득번득 머리를 스쳐갔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