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약탈자

황제 추대

원로원 의원들은 호노리우스 황제를 폐하고 아탈루스를 황제로 세우라는 알라리크의 서신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야만족의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라는 협박에 원로원이 굴복해야 할 것인가.

잠시 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했지만, 이내 한 의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못해줄 게 뭐 있소? 아탈루스는 평판도 좋고, 우리도 잘 알다시피 가톨릭 기독교인이고, 오랜 원로원 집안 출신의 정통 로마인이오.”

서로마 원로원은 15년 전에도 프랑크족 아르보가스트가 추대한 유게니우스를 황제로 승인한 바 있었다. 서고트족이 추대했다 해도, 로마인을 황제로 세운다면 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은 아니었다.

“옳소. 아탈루스를 황제로 추대합시다.”

“곡물창고가 없어지는 것보다 낫지.”

격론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한 알라리크의 생각과 달리 원로원은 딱히 반대하는 사람 없이 일사천리로 황제 승인을 의결했다. 아탈루스를 황제로 받들겠다고 금방 답변을 보냈다.

호노리우스에 대한 불만으로 쉽게 통과된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랜 경험으로 황제에 대한 충성은 누구 한 사람이 인위적으로 빨리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역사상 수많은 장군과 권력가들이 황제를 칭하고 나섰지만, 로마시민과 속주민과 장군들로부터 모두 진정한 황제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관문이 있었다. 원로원의 승인은 그저 첫 단추일 뿐이었다.

아르보가스트도 발렌티니아누스2세를 시해하고 유게니우스를 황제로 세우고 원로원의 승인도 받았지만, 실력 있고 정통성을 가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나타나자 허무하게 몰락했다.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도 몇 년 째 황제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그를 황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주위의 몇 명의 장군들뿐이었다. 갈리아의 총독들도 지금은 그에게 굽신 거리지만, 호노리우스가 병사를 보내면 당장 태도를 바꿀 것이다.

알라리크와 그가 세운 아탈루스도 그들을 견제하는 다른 무장세력이 나타나면 금새 몰락할 거라고 여겼다. 그때까지는 눈치를 보면서 살아남다가 기회가 왔을 때 뒤통수를 치면 그만이었다.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나면 또다시 재빨리 그를 새로운 황제로 승인하면 되는 것이다.

원로원은 아탈루스를 황제로 승인하고 황제만이 입는 자주색 옷과 왕관을 보내왔다. 아탈루스는 그 옷을 입고 서고트족 호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로 갔다.

아탈루스는 자신의 측근을 각료로 임명했다.

알라리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타울프를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임명했다. 일단 황제가 된 이상, 호노리우스가 그를 암살하려고 들 테고, 로마인 중에 누가 호노리우스 파인지 알 수 없기에 차라리 서고트족을 믿는 편이 안전했다.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그는 의원들을 모아놓고 전 세계를 로마로 통합하겠다고 황제 취임 연설을 했다. 의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시민들은 새로운 황제가 누가 되건 간에 일단 전쟁이 끝난 것을 기뻐했다.

이로서 서로마에는 호노리우스, 아탈루스,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까지 3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알라리크가 계획한 마지막 4단계는 실질적 통치권 확보였다. 이탈리아 도시와 서로마 속주들에게 새로운 황제의 승인을 요청했다.

가톨릭의 본산 밀라노는 이단인 서고트족과의 협약을 가장 극렬히 반대했던 곳인데 의외로 아탈루스의 편에 섰다.

볼로냐는 라벤나와 가까워서 호노리우스에게 충성심이 깊은 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호노리우스 황제를 지지했다.

일리리쿰은 호노리우스가 복직시킨 게네리두스가 호노리우스에게 충성했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는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인정한 상태였다.

남아있는 서로마 속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아프리카 속주였다. 아프리카는 로마의 식량을 공급하는 곳이기에 가장 우선적으로 가져가야 했다.

아프리카의 코메스는 스틸리코 파를 숙청하는데 앞장서서 그 공으로 임명된 헤라클리아누스였다.

아탈루스는 대화로 그가 자신을 지지하게 만들려 했다. 알라리크는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아탈루스를 설득했다.

“헤라클리아누스는 호노리우스가 임명했소. 그가 뭐 하러 자신을 신임하는 호노리우스를 배신하고 알지도 못하는 당신을 황제로 지지하겠소?”

아탈루스는 평화적으로 아프리카를 접수할 수 있다고 우겼다. 그는 아프리카로 사신을 파견해서 자신을 황제로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아프리카로부터 답변이 올지, 안 올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알라리크는 아프리카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기 보다는 호노리우스와 해결을 볼 생각을 하고 라벤나 황궁으로 진격해서 포위했다. 호노리우스를 끌어내리고 아탈루스가 라벤나를 차지하면 아프리카도 별 수 없이 손을 들 것이다.

겁먹은 호노리우스는 협상을 하자고 사신을 보냈다. 아탈루스를 황제로 인정하고 제국을 분할해서 통치할 용의가 있다고 꼬리를 내렸다.

아탈루스는 호노리우스의 분할통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기를 원했다. 호노리우스에게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답장을 썼다.

요비우스는 아탈루스의 답장을 들고 호노리우스에게 갔다.

타협의 희망이 옅어지자 호노리우스는 답답해하며 물었다.

“분할 통치도 싫다면 어쩌자는 거야? 아탈루스가 바라는 게 뭐야? 내가 어떻게 하면 협상을 해줄까?”

얼마 전만 해도 요비우스에게 협상을 거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맹세하라고 노발대발 하더니, 목숨이 위태로운 지금은 갑자기 제국의 절반을 떼어줄 테니 협상을 하자고 하고 있었다.

요비우스는 감정을 억누르며 예의를 잃지 않고 말했다.

“분할 통치를 안 하겠다는 말뜻은 혼자만 유일한 황제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즉,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호노리우스는 찡그리고 손으로 이마를 긁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난 굳이 황제라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아. 많은 걸 바라지도 않고. 그냥 어디서든 안전하고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황제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줏대도 없이, 끝까지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했다. 황제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말이야, 혹시 내가 황제에서 은퇴해서 속주의 작은 섬에 가서 혼자 조용히 살겠다고 한다면, 그건 아탈루스가 허락해 줄까? 응? 난 그냥 작은 섬 하나만 있으면 돼.”

진작에 그가 황제에서 물러났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는 이런 사단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노리우스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요비우스는 심술궂게 대답했다.

“폐하의 간이나 심장, 팔다리 일부는 조용한 섬에서 편안히 살게 해줄지도 모르지요.”

요비우스의 잔혹한 말에 호노리우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제는 즉시 동로마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망명을 요청했다.

호노리우스의 측근과 관료들은 하나 둘 그를 떠나서 아탈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시작했다.

요비우스도 호노리우스를 부정하고 아탈루스만을 황제로 인정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우리는 아탈루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호노리우스는 황제가 아니니,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노리우스는 자신의 측근들 중에서 혹시나 누가 자신을 암살해서 머리를 아탈루스에게 바치지 않을까 밤에도 잠을 못자고 벌벌 떨면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누가 자신을 부르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랐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호노리우스는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서 접근하는 하인에게도 소리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가 옷 속에 칼을 숨겨 와서 자신을 찌를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독살될까봐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던 호노리우스에게 동로마제국이 지원 병력을 보냈다. 6천명의 동로마 정예군을 태운 배가 라벤나에 도착했다.

동로마는 서로마에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야만족에게 서로마가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고, 호노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오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동로마로 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자, 도망치려던 호노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라벤나에 황궁에 머물렀다. 아프리카가 그의 편을 들지, 아탈루스의 편을 들지, 답변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프리카가 아탈루스의 편을 들면 희망이 없지만, 호노리우스의 편에 서면 희망이 있었다.

알라리크는 아탈루스에게 아프리카에 병사를 보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지만, 아탈루스는 거부했다.

요비우스도 아프리카를 접수하려면 서고트족 부대를 아프리카로 파견해야 한다고 원로원에서 직접 연설을 하며 적극적으로 알라리크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런데도 아탈루스는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고 말로 설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서고트족 병사를 배에 태우지 않고 사절들만 실어서 아프리카로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아탈루스파와 호노리우스파가 싸우다가 결국은 호노리우스파가 승리했다. 아탈루스가 아프리카에 보낸 사신은 살해되고 아프리카는 호노리우스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탈루스는 아프리카를 다스릴 관리를 임명하고, 그에게 돈을 주어서 아프리카로 보냈다. 뇌물 몇 푼으로 아프리카를 어떻게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없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아탈루스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쓸데없는 짓을 반복하는 것에 실망했다.

그럼에도 알라리크는 아탈루스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이탈리아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도시를 포위하고 협박해서 아탈루스를 황제로 인정하는 서약을 받아내고 다녔다.

호노리우스도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보내온 돈을 지금껏 관심 없이 내팽개쳐두었던 브리타니아에 보내서 자신을 황제로 지지해달라고 매달렸다.

아프리카는 로마로 가는 밀 등 식량 공급을 중단시켜 아탈루스를 공격했다. 로마의 밀과 식량 가격이 올라가자 이번에는 아탈루스의 인기가 떨어졌다.

알라리크는 다시 한 번 아프리카로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부하인 드루마스가 이끄는 서고트족 부대와 소수의 로마군을 함께 보내서 아프리카를 수복하자고 했다.

“서고트족이 아프리카를 점령할까 걱정이 된다면 단 500명만 보내겠소.”

어떻게든 아탈루스가 자신을 믿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곡물수입을 못해서 당장 굶주리게 된 원로원마저도 대다수가 서고트족의 아프리카 파병에 동의했다. 그러나 아탈루스는 혼자 고집을 부렸다. 아프리카에 야만족 군대를 그것도 로마인이 아닌 서고트족을 대장으로 해서 보내는 것을 꺼려했다.

알라리크는 아탈루스가 그를 믿지도 않고 말을 듣지도 않자 점점 화가 났다. 자신은 아탈루스를 위해서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아탈루스는 그와 상의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추진했다. 요비우스의 충고대로, 일단 황제가 되고 나니 통제가 안 되었다.

심지어 아탈루스는 서고트족 군대를 자신이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서고트족 족장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회유했다. 족장들은 알라리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탈루스가 서고트족 회의에서 나오는 정보들을 알려달라면서 돈을 주더군요.”

“저한테 알라리크를 배신하고 자기를 따르면 로마에 관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요비우스는 아탈루스가 언젠가는 알라리크를 암살하고 권력을 독점할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조심하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아탈루스가 야만족 암살자를 수소문해서 구하고 있답니다. 호노리우스를 암살할 거라면 야만족이 아니라 로마인으로 구하겠죠. 아마 당신이 목표일 겁니다.”

알라리크는 아탈루스와 협력관계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탈루스에게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은 언젠가는 쫒아내야 할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갈리아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콘스탄티누스는 서고트족을 몰아내겠다며 이탈리아로 진군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동로마가 서고트족을 몰아내려 하고 있고, 원로원은 그들이 힘이 세지면 언제든 등을 돌릴 것이고, 아탈루스도 믿을 수 없었다. 서고트족은 사방의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것이다.

알라리크는 자신이 수렁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잔잔해 보이는 강이었는데, 막상 건너려고 보니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늪이었다.

원로원을 통해서 황제로 인정만 받으면 될 줄 알았는데, 원로원은 로마의 가장 표면에 불과했다. 파고 들어가면 덩굴처럼 또 다른 문제가 나오고 또 다른 문제가 나왔다.

결국 모든 로마의 도시와 하나하나 전쟁을 하고 설득을 해서 새로운 황제를 인정받아야 했다. 이래서 스틸리코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속에서 내전으로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맨 처음의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로마는 구제불능이었다. 로마에 대한 미련과 감정을 버리고 오로지 서고트족의 이익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증오, 경외, 우호, 동경, 열등감, 경멸, 로마제국에 대한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서고트족을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이 무엇일까.

알라리크는 다시 한 번 결단을 내렸다.

아탈루스가 지금도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향후에는 그를 축출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 계속 밀어줄 이유가 없었다.

알라리크는 아탈루스가 로마 관료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회의장에 들이닥쳤다. 무장한 서고트족이 우르르 들어오자 놀란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라리크는 아탈루스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저 자를 황제에서 폐한다.”

서고트족은 아탈루스에게 달려들어서 황제의 관과 자주색 옷을 빼앗았다.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냐!”

아탈루스는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알라리크는 로마인 관료들에게 말했다.

“이 자가 임명한 당신들도 효력이 정지되었소. 이제 아무 권한이 없으니 일할 필요가 없소. 집으로 돌아가시오.”

관리들은 누구도 아탈루스의 편을 들지 않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알라리크는 원로원에도 황제를 폐위했다고 통보했다. 원로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탈루스에게 등을 돌렸다. 아탈루스가 임명한 관리들도 마치 처음부터 그가 황제로 추대된 일이 없었던 듯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거만하던 아탈루스는 이제 와서 비굴하게 서고트족 진영을 찾아와서 알라리크에게 매달렸다.

“나를 이대로 두고 가면 안 되오. 그랬다가는 호노리우스에게 죽을 거요. 제발 나를 서고트족과 머물도록 허락해 주시오. 부탁이오.”

알라리크는 비록 자신을 배신했지만, 자비를 호소하는 그를 내치지 않고 서고트족 진영에 머물게 허락했다.

“고맙소.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그가 굽신거리며 물러가자 알라리크는 한숨을 쉬었다. 황제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그가 합법적인 땅 한 조각을 얻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세마포]

불쌍한 알라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