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
“알라리크가 빠져나갔다고?”
사루스는 씩씩거리며 아쉬워했다.
“왜 강 건너에 매복을 하지 않은 거야?”
그의 물음에 가우덴티우스는 어깨를 으쓱 했다.
“몰라. 스틸리코 사령관님이 생각하신 뜻이 있겠지.”
사루스는 이를 부드득 갈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내가 선봉에 섰어야 했어. 그러면 가장 먼저 놈을 찾아내서 목을 쳤을 텐데.”
가우덴티우스는 입을 비죽였다.
“선봉에 섰던 사울이 죽었어. 넌 운 좋은 줄 알아.”
알라리크는 도망쳐 온 자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천여 명에 불과했다. 아녀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도망친 자들은 말을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기병대와 족장들, 강을 헤엄쳐서 건너온 자들뿐이었다.
4년을 준비한 전투가 처참한 패배로 돌아갔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죽고, 그들의 가족은 로마의 포로가 되었다.
서고트족은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숨을 몰아쉬었다. 다들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패배를 곱씹고 있을 것이다. 로마군 사이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울먹이는 자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들어서 서고트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로마군이 설마 부활절에 공격을 해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기독교를 믿게 된지 겨우 30년 된 서고트족도 교회는 불태우지 않고, 기독교인은 죽이지 않으며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해 준 로마인들이 부활절에 살인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쁜 놈들! 이교도만도 못한 놈들! 천벌을 받을 거야!”
가족을 빼앗긴 한 병사가 흐느껴 울면서 중얼거렸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와 로마군을 원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부활절이라고 마음을 놓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예상했어야 했다. 느슨해져서 빈틈을 보인 스스로의 책임이었다.
호노리우스 황제를 붙잡아서 스틸리코를 협박할 계획이었는데, 반대로 가족을 사로잡혀서 스틸리코에게 협박당하게 되었다. 자괴감에 그저 죽고만 싶었다.
족장들은 알라리크만을 쳐다보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알라리크라면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낼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혼자라면 알라리크는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4년 동안 전쟁을 준비했던 시간과 가족과의 행복한 미래가 모두 사라졌다. 포로가 된 아내와 아이는 로마의 축축한 지하 감옥에 갇혀서 병들어 죽거나 로마인들의 변덕에 의해 언제든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들을 다시 볼 희망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서고트족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를 왕으로 만들어주고 지금까지 믿고 따라준 서고트족들을 위해서 최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지금 여기 있는 자들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안락한 집을 버리고 가족을 잃으면서도 여전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살아남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살아갈 희망을 주어야 했다.
알라리크는 일어나서 족장들과 병사들에게 결연하게 말했다.
“오늘의 패전은 모두 지휘관인 내 책임이오. 가족을 잃은 슬픔이 내 마음을 짓누르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계속해서 로마와 싸울 것이오. 이탈리아를 갖겠다는 내 결심은 변함이 없소. 여러분과 함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서 토스카나를 정복하고, 로마를 공격하러 갈 것이오. 나와 뜻이 다르다면 떠나도 좋소.”
얼마 남지 않은 기병대만으로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를 공격하러 간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었다.
게다가 로마를 공격하면 로마군에게 사로잡힌 그의 가족들은 보복당해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강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그의 가족들은 로마군의 수중에 있고 언제 죽을지 몰랐다. 가족들의 목숨 때문에 로마군에게 비굴하게 구는 것은 서고트족 전체의 운명을 짊어진 그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었다.
이런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갈 길을 가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가족에 대한 생각은 일절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미안합니다. 우리 부족은 이제 일리리쿰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 부족장이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가족과 부족민을 잃고 혼자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함께 해줘서 고맙소.”
구석에 돌아 앉아있던 싱게리크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결국 스틸리코에게 이렇게 깨질 걸. 전리품도 다 잃고 가족도 잃고 이게 무슨 꼴이야.”
아타울프가 화가 나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너 말 조심해라.”
알라리크가 그를 제지했다.
“싱게리크, 네 기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일 거다.”
아무 말이 없는 것보다 오히려 싱게리크와 같이 그를 비난하는 말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결국 이건 우리의 선택이다. 로마의 노예로 살 것인지, 끝까지 싸우다 죽을 것인지. 노예의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일리리쿰에 남아 있던 서고트족을 비난하지 않았듯이, 지금 돌아간다고 해서 우리를 비웃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패배로 끝났지만, 목숨을 걸고 로마와 싸우고 돌아온 사람을 비웃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싱게리크에게 다가가서 말을 한 그는 몸을 돌려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으니 각자 결정하시오. 다만 나는 패배하더라도 이 길을 갈 것이오. 왜냐하면 그것이 서고트족으로서 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오. 나는 로마인으로 살 생각은 없소. 로마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아들을 보면서 결심했소. 내 아들이 로마인의 노예로 살지 않도록 하겠다고. 그래서 일리리쿰을 떠났소. 비록 실패했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서고트인으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 것이오.”
서고트족은 코를 훌쩍거리고 눈이 벌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끄덕였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로마는 내 아이와 아내와 전리품을 가져갔소. 하지만,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나는 이제 더 빨리 전진할 수 있소. 이제 나를 주저하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소. 나는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소.”
서고트족은 가족을 잃고도 포기하지 않고 전의를 다짐하는 알라리크를 인간이 아닌 듯이 쳐다보았다. 알라리크의 눈이 눈물로 반짝이며 빛났다. 슬픔을 장작으로 해서 로마에 대한 투지를 활활 불태웠다.
“내 동지들은 나에게 반대하고, 내 친구들은 나를 싫어하고, 내 추종자들은 떠났소. 내 삶은 내게 가혹한 짐덩어리요. 하지만, 스틸리코와 이탈리아의 명성이 들리지 않게 도망칠 수 있는 땅이 있소? 세상에 그런 곳은 없소. 그렇기에 내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소.”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를 보며 서고트족은 말이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악이 받쳐 올랐다. 알라리크의 말처럼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알라리크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출발준비를 했다. 그들은 다시 묵묵히 알라리크의 말을 곱씹으며 덩굴풀이 머리에 엉겨 붙고 나무뿌리가 그들의 발을 붙잡는 험한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마군은 전리품으로 얻은 서고트족 수레마다 실린 물건을 꺼내서 종류별로 분리했다. 곡식과 밀가루가 바닥에 펼쳐놓은 천 위에 눈 덮인 산처럼 쌓였다. 그것을 계량해서 군량으로 쓰기 위해서 다시 자루에 담았다. 금화와 은화, 동전은 분리해서 역시 주머니에 담았다. 갑옷, 무기, 보석, 장신구 등은 값어치를 환산해서 상인에게 팔 것이다.
걷히는 세금이 부족해서 월급을 주기도 빠듯한 지금으로서는, 서고트족이 약탈해서 쌓아놓은 전리품은 요긴한 재원이었다.
스틸리코는 전리품 목록을 들여다보며 액수를 확인했다. 몇 달은 병사들 월급 걱정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로마제국에서 걷어서 로마제국이 쓰는 것이고 걷는 사람만 세금징수원에서 서고트족으로 바뀐 셈이었다.
세금을 내는 자영농이 매달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야만족이 수시로 출몰하고 황제가 있는 이탈리아까지 약탈을 당하다보니, 겁에 질린 농민들이 땅을 팔고 대농장의 농노로 들어가 버렸다.
대농장의 농노로 들어가면 농장이 약탈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재산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이다. 야만족이 가까이 오면 도시에 사는 정보력 빠른 주인이 미리 알려주었다. 소득의 절반에 가까운 무거운 세금도 안 내도 되고, 징집대상이 되더라도 주인이 알아서 빼주었다. 이런 혜택이 많은데 굳이 자유민으로 있을 필요가 없었다.
로마에서 자유민으로 사는 것도 그만큼 부와 힘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다. 제국의 무거운 세금과 병역 의무, 야만족의 약탈의 이중고를 겪고도 살아남으려면 충분한 넓이의 땅과 돈과 가족 수가 있어야 버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 빈민이 되어 무상으로 지급되는 밀가루에 의지해서 사는 방법뿐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세금이 줄어서는 곤란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스틸리코는 제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에 막사 밖으로 나가서 포로로 잡은 서고트족을 분류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밧줄과 쇠사슬에 묶인 서고트족이 일렬로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쓸 만한 자들은 로마군으로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면, 역시 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 이렇게 유지하면서 올해에는 기필코 미꾸라지같은 원로원을 설득해서 군제와 세제를 개혁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리라 마음먹었다.
“알라리크의 부인과 아들은 따로 빼놓았나?”
“네. 저기 있습니다.”
가우덴티우스가 손으로 그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나무그늘 아래 보초병의 감시를 받으며 금발의 여인이 알라리크를 닮은 아들을 안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순진하게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는 스틸리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돌리고 막사로 도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그들을 죽여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망설이게 되면 곤란했다.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는 산속을 헤매며 알라리크를 찾아다녔다. 알라리크와 족장들은 말을 타고 갔고, 그들은 걸어서 따라가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남은 말발굽 자국과 발자국 흔적을 따라서 무작정 걸어갔다.
그들의 앞에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구냐!”
풀숲 사이로 후다닥 도망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노루인가?”
로데리크가 중얼거리자 비터리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분명히 사람이었어.”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적의 정찰병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긴장해서 몸을 굽히고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로데리크는 눈앞에 이상하게 삼각형으로 꺾어져서 표시가 되어진 나뭇가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뭐지?”
순간 그들의 목에 칼이 들이대어졌다.
“꼼짝 마.”
그들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들었다.
“싱게리크 족장님, 우리 서고트족입니다.”
로데리크가 바짝 얼어서 말했다. 싱게리크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더니 천천히 칼을 내렸다.
“왜 여기 있어?”
“서고트족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이 없어서 걸어오느라 이제 겨우 쫒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싱게리크는 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그들은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서고트족이 야영을 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꿩과 토끼를 잡아서 굽고 나무딸기를 따왔다. 좀 대담한 자들은 인근 농장에 가서 곡식을 털어왔다.
로데리크와 비터리크처럼 도망쳐서 숨어있던 병사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다시 3천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들은 산길을 통해서 천천히 이동했다.
로마군 전령이 숲속으로 알라리크를 찾아왔다.
“로마군이라고?”
“그렇습니다.”
전령은 편지를 내밀었다.
전령을 보냈다는 것은 이미 서고트족의 위치를 로마군이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로마군은 어떤 때 보면 지독히도 무능하고, 어떤 때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능했다. 그들을 지도하는 장군이 누구냐에 따라서 병사들이 전쟁의 신 아레스가 된 것처럼 싸우기도 하고 겁쟁이가 되기도 했다.
편지는 스틸리코가 협상을 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이탈리아를 떠나서 일리리쿰으로 돌아간다면 퇴각하는 동안 공격하지 않겠다고 쓰여 있었다.
알라리크는 편지를 찢어버렸다.
“협상은 하지 않겠소. 나는 마지막 최후까지 싸울 것이오. 스틸리코든 누구든 나와 서고트족을 멈출 수 없을 것이오.”
전령은 그의 답변을 가지고 돌아갔다. 알라리크는 다시 한 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로마군에게 일거수일투족이 읽혀지고 있는데, 그들은 로마군의 움직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로마군을 이길 수 있을까.
- 작가의말
74화와 77화의 알라리크의 연설은 클라우디우스가 남긴 글을 참고했습니다.
74화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Claudian/De_Bello_Gothico*.html
P165
77화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Claudian/De_VI_Consulatu_Honorii*.html
p9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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