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가이수스
“라다가이수스는 언제 처리할 거야?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동고트 족이 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를 지나 피렌체까지 오도록 내버려두는 스틸리코에게 협상을 지속하기 위해서 찾아온 알라리크가 물었다. 스틸리코가 동고트족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서고트족과의 협상이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다 됐어.”
40만의 야만족부대가 몰려왔다는 소문에 기존의 병사들까지 겁을 먹고 군대를 그만두는 형편이었다. 스틸리코는 원로원을 설득해서 노예들을 해방시켜서 군대를 충원했다. 스틸리코의 인내심은 탄복할 만 했지만,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다.
“우리 쪽도 다들 들썩들썩 하고 있어. 동고트족에게 합류하자고 난리야.”
라다가이수스의 약탈이 길어지면서 알라리크 역시 내부를 단속하기에 나름대로 바빴다. 서고트 족 내부의 과격파들은 라다가이수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틈에 서고트족도 로마제국을 약탈하자고 알라리크를 졸라댔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달래며 중립을 지켰다. 꿀릴 것 없는 정예 병력을 가지고 스틸리코와 4번을 싸워 본 그로서는 주먹구구식으로 싸우는 동고트족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했다.
“동고트족이 피에솔레 평원에 도착했어.”
스틸리코의 말은 적이 그가 선택한 전투 장소로 이동했고, 곧 결전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알라리크는 과연 스틸리코가 어떻게 40만의 동고트족을 부실한 노예병 3만의 군대로 이길지 예상을 해 보았다.
스틸리코의 집무실에 지도에 표시된 참호의 위치를 들여다보았다. 피렌체 성의 좌우에 멀찍이 둥글게 참호를 파놓았다.
“베로나 전투처럼 성벽으로 접근했을 때 포위해서 3면에서 공격할 생각인가?”
스틸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
알라리크의 머리를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플로이 전투 때의 전술을 쓸 생각이군.”
그가 한 번 당했던 전술이었다. 목책으로 야만족이 물을 마시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 둘러싸서 천천히 굶겨가며 항복을 받는 방법이었다. 노예가 많은 로마군의 특성상 정면전투보다는 토목공사를 통해서 적을 가두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그때 서고트족은 자신들이 안전한 분지에 있다고 착각했지만, 알고 보니 거대한 우리에 갇혀 있었다. 동고트족도 자신들이 피렌체를 공격한다고 믿겠지만, 먹음직스런 미끼에 달려들다 거대한 우리에 갇히는 늑대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스틸리코는 그런 심리전에는 당할 자가 없었다.
“적을 고사시키는 전술은 적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효과적이지.”
스틸리코의 말에 알라리크는 마음속으로 동고트 족을 동정하며 쯧쯧 혀를 찼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운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알라리크가 서고트족과 포위망 속에서 갈증에 말을 죽여 피를 마시며 죽을 고비를 넘길 때, 스틸리코는 후방에서 편안하게 포도주를 마시고 연극을 관람하며 그들이 항복해오기를 기다렸다.
동고트족은 자신들의 많은 숫자를 믿고 의기양양하겠지만, 숫자가 많다는 것은 결국 식량과 물이 빨리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보급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숫자가 오히려 패배를 가속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건 그래. 풀은 무성할수록 더 베기가 좋지.”
알라리크는 옅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스틸리코는 수 백 년 간 축적된 로마군의 풍부한 경험과 전술을 모두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전술이 가장 효과적인지 최적의 해결책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적의 숫자가 많을 때와 적을 때, 흩어져 있을 때와 모여 있을 때, 기병이 많을 때와 보병이 많을 때와 궁병이 많을 때, 강이나 산이 있을 때와 평원에 있을 때 등 경우에 따라서 셀 수 없이 다양한 전술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것들을 적절히 조합해서 선택하기만 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로데리크의 부대는 피렌체로 이동한 이후에도 계속 참호만 파고 있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이렇게 많은 땅을 파 본 적이 없었다.
“도시를 하나 새로 짓겠구먼.”
고된 노동에 힘들어하며 중얼거렸지만, 야만족과의 전투보다는 그래도 참호 파는 게 나았다.
백인대장은 깐깐하게 참호의 넓이와 깊이를 관리 감독했다. 손가락마디 하나 만큼이라도 남거나 모자라면 다시 하라는 호통이 돌아왔다.
이렇게 땅을 미리 파 놓고, 그 위에 통나무만 가져다 꽂으면 사람 키보다 높은 목책을 몇 시간 만에 뚝딱 쌓을 수 있었다.
새로 투입된 부대가 그들의 옆에다 통나무를 날라다 주었다.
“쟤들은 뭐야? 어디 부대야?”
로데리크가 동료에게 물었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나이 많은 사람들인데다 군복을 입은 것도 어색하고 군화 끈도 조일 줄 몰라서 대충 칭칭 감고 있었다. 햇빛을 보고 지내지도 않은 듯이 피부가 허연 병사도 있었다.
“도시에서 온 노예들이잖아.”
동료가 그들의 발을 가리켰다. 발뒤꿈치에는 노예임을 나타내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스틸리코가 노예를 해방시켜서 부대에 편입시켰다더니 그들로 이루어진 부대인 모양이었다.
로데리크는 동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노예로 팔려갔다면 군대에 자원해서 해방된다면 좋을 텐데. 아마도 주인이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옆 부대만 봐도 힘 좀 쓰고 일을 잘하게 생긴 노예는 거의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주인에게 방출된 나이든 노예뿐이었다.
“저 사람들은 뭐야?”
저쪽에는 군복도 입지 않은 남자들이 청년부터 노인들까지 땅을 파고 있었다. 그들은 제법 능숙하게 땅을 파서 척척 진도가 나갔다.
“이 근처 사는 농부들이래.”
노예에다 농부에다 군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요상한 풍경이었다. 이래가지고 동고트족을 이길 수 있을까. 동고트족도 정예병은 얼마 없었지만, 이렇게 몇 달간 땅만 파고 있으려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휴식!”
점심 식사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흙투성이가 되어서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서 손을 대충 문질러 씻고 빵과 죽을 먹었다. 특별히 버터와 치즈도 지급되었다.
“웬일이야? 오늘은 버터와 치즈도 있네?”
로데리크는 오랜만에 먹는 고소한 버터와 짭짤한 치즈 향기에 먹기도 전에 입에 군침이 돌았다.
“사령관님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대.”
스틸리코는 항상 병사들의 식사를 잘 챙겨주었다. 가끔씩 이렇게 특식이 나올 때면 소소한 행복을 느끼곤 했다.
“동고트족이 가까이 있대. 내일 싸우러 출정할 거래.”
소식이 빠른 한 병사가 소문을 전해주었다.
드디어 전투인가. 로데리크는 불안한 마음 반, 흥분되는 마음 반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40만 명이래?”
“아녀자들까지 다 합치면 그렇대.”
수학을 배운 적 없는 로데리크는 천이 넘는 숫자를 셀 줄 몰라서 감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의 부대는 일찌감치 동고트족을 향해서 나아갔다.
멀리서 저들을 보았을 때는 마치 거대한 모기떼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야 그 점들이 모두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지평선 너머까지 동고트족의 행렬이 새까맣게 뻗어있었다.
스틸리코는 피렌체 성벽 위에서 동고트족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전투를 겪은 스틸리코조차도 이런 어마어마한 대군을 상대해 본 경험은 없었다. 역사책에 선조들의 전투기록을 봐도 40만 대군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동고트족은 로마군이 멀찌감치 눈에 띄지 않게 지어 놓은 목책 사이로 들어와 있었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피렌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뒤쪽에 미리 파놓은 땅에 통나무를 세우고 앞쪽에 아르노 강으로 통하는 길목만 막으면 적을 완전히 가둘 수 있었다.
스틸리코는 피렌체 성벽 요소요소에 적절히 병사를 배치했다. 그리고 성을 나와서 적을 후방에서 기습하기 위해 기병대를 소집했다.
“피렌체가 함락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우리가 뒤에서 함께 공격한다. 우리 목적은 저들을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가까이 가지 말고, 적이 반격하면 맞서 싸우지 말고 퇴각하라.”
스틸리코가 지시하자 기병대는 동고트족을 향해 달려갔다.
“공격하라!”
라다가이수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야만족이 일시에 피렌체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에 사다리를 촘촘히 걸쳐놓고 올라갔다. 성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달라붙었다.
피렌체는 스틸리코의 지시대로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화살과 돌과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쏴라!”
피렌체의 로마군은 성벽 아래를 향해서 화살을 쏘았다. 워낙에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부상을 입고 떨어져도 또 다른 야만족이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랐다.
피렌체의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이리저리 달리며 성벽을 붙잡는 야만족의 손을 칼로 내리쳤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두꺼운 팔이 밑에서 쑥 올라와서 그들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온 적이 뛰어내리며 덮쳤다.
“후방에 스틸리코가 왔습니다.”
라다가이수스는 부하의 보고에 잠시 긴장했다. 성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었다. 소수의 로마군 기병대가 뒤쪽에서 그들을 급습해서 휩쓸고 다녔다.
“저게 다인가?”
로마군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라다가이수스는 마음을 놓았다.
“공격해!”
라다가이수스는 피렌체를 놔두고 병력을 돌려서 로마군 기병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로마군 기병대는 이내 도망쳤다.
“우리의 숫자에 겁을 먹고 공격하지 못하는 군.”
라다가이수스는 자만해서 우쭐했다.
날이 기울자 동고트족은 피렌체 성벽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이 구덩이는 뭐야?”
동고트족은 피렌체 성의 주위에 군데군데 파여 있는 구덩이를 보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이 참호를 메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뒤쪽에 있는 로마군은 높은 목책을 짓고 있었다.
“뭐하러 저렇게까지 열심히 목책을 짓지? 저런다고 이길 수 있나?”
라다가이수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구덩이에 통나무를 집어넣어서 목책을 세우는 로마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숫자가 부족하니 목책 뒤에 숨어서 싸우려는 거겠지.”
목책은 수비용도이니 로마군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목책을 세운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공격용도로 역이용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목책은 하루가 다르게 옆으로 쭉쭉 늘어났다. 그들이 피렌체 성벽 공격에 열을 올리는 불과 며칠 사이에 목책이 사방을 둘러쌌다.
목책이 세워진 구간이 넓어지자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포위망에 갇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피렌체를 포위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포위당한 것이었다.
“로마군이 아르노강으로 가는 길목을 목책으로 막았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라다가이수스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식량은 몰라도 물이 없다면 이삼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럼 다른 쪽으로 돌아가서 물을 길어오면 되잖아.”
“이미 목책과 성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습니다.”
“그럴 리가!”
직접 한 바퀴 둘러보고 로마군에 목책 위에서 창을 들고 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라다가이수스는 스틸리코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얼굴이 파래졌다.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며칠 만에 그들 주위에 사람 키 보다 훨씬 높은 장벽이 생겨났다.
“아직 목책이 완성되지 않은 곳이 있을 거야. 찾아! 빨리!”
동고트족은 강으로 가는 길목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직 목책공사가 미완성된 구간에 총공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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