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
알라리크는 프린키페스에게 속절없이 쓰러지는 서고트족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프린키페스가 출전했다는 것은 로마군이 완전히 우세한 상황이고 전투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퇴각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남은 병사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후퇴! 후퇴해!”
그는 손을 들어서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가 퇴각명령을 내리자, 서고트족은 저마다 무기마저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튀어!”
로데리크는 얼이 빠져있는 비터리크를 잡아당겼다. 방패를 버리고 서고트족이 일시에 달아났다.
프린키페스는 그들을 쫒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는 그들을 나이 많은 프린키페스가 쫒아갈 수는 없었다. 그들을 쫓는 것은 기병대의 역할이었다.
기병대는 뒤에서 그들을 쫒으며 풀을 헤치듯이 칼을 좌우로 휘두르며 척척 베었다.
뒤쪽에 서있던 서고트족의 가족도 죽기 살기로 있는 힘을 다해서 숲으로 달렸다. 여인들은 아이를 안고 업고 뛰었다. 꿈같은 그들의 1년간의 여행은 삽시간에 악몽으로 변했다.
알라리크도 말을 달려서 도망쳤다. 스틸리코의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틈틈이 훈련을 한다고 했지만, 1년 내내 엄격한 훈련을 하는 스틸리코의 군대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약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서고트족이 싸우면 몇 번을 싸운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숲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만약에 패할 경우에는 각자 도망쳐서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괜찮으십니까?”
아타울프가 숨을 헐떡거리며 다가왔다. 한 명씩 두 명씩 살아남은 자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알라리크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살 땅을 마련해주겠노라고 이끌고 왔는데, 이렇게 로마군에게 완패하다니 면목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수 천 명이 모여들었다. 숲 가까이 숨어있던 부녀자들은 무사했지만, 병사들의 피해는 제법 컸다. 전사자와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생각하며 흐느끼는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알라리크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름대로 훈련을 했는데도 로마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로마군은 하스타티, 트리아리, 프린키페스, 기마병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며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야만족을 무찌를 수 있었다. 로마군을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로마와 싸우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서고트족 병사들에게 일어나서 말했다.
“오늘의 패전의 책임은 내게 있소. 나는 로마군을 얕보았고, 로마군의 전술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소.”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려나왔다. 그들도 로마군의 3단 공격에 정신없이 얻어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압도적인 전력 격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나 싸울 것이오. 그래야만 하오.”
그는 의지를 다졌다. 서고트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었다. 알라리크의 말에도 서고트족은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여 땅을 쳐다보았다. 다시 로마군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숙연해진 분위기속에서 알라리크는 한 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꼭 내가 서고트족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여러분들이 내가 서고트족을 이끌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서고트족 지휘권을 넘기겠소.”
놀란 서고트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라리크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일개 병사가 되어서 맨 앞에서 로마와 싸우겠소.”
서고트족 족장들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누가 알라리크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는 일년 동안 로마군을 무찔러 왔습니다. 한 번 패배했다고 알라리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패배는 알라리크의 책임이 아니오! 우리 모두의 책임이오!”
서고트족 병사도 소리쳤다.
“나도 오늘 죽을 뻔 했지만, 고향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소. 우리가 이렇게 로마군과 로마군의 영토에서 대등하게 싸울 날이 올 줄은 몰랐소. 이게 다 알라리크 덕분이오.”
다른 서고트족도 일어나서 말했다.
“나는 오늘 살아남았지만, 죽었더라도 여한이 없소. 알라리크와 함께 그리스 전역을 돌면서 온갖 것들을 보았소. 알라리크가 아니었다면 서고트족 마을에 갇혀서 로마인에게 착취당하면서 보냈을 내 남은 생애 전부를 지난 1년과 바꾸더라도 후회는 없었을 것이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알라리크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패전은 오히려 그들의 결속력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알라리크는 솟아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돌아섰다. 그러나, 서고트족은 그에게 달려들어서 그의 어깨를 치고 그를 껴안았다.
“싸우다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소.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된다 해도 상관없소. 알라리크와 함께 싸울 수 있다면 난 아무 것도 상관없소.”
로데리크도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가족도 동생 한 명 뿐이고 재산도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알라리크가 제시하는 길로 가는 것뿐이었다. 알라리크가 아니라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알라리크는 그를 믿어주는 서고트족의 격려와 위로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오늘의 패배는 반드시 설욕할 것이오. 다시 일어서서 서고트족에게 승리를 안겨드리겠소.”
서고트족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다시 일어섰다. 일단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약탈한 식량을 실은 수레는 숲 속에 숨겨놓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이 코린토스를 점령하고 있는 이상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어디로 갈까요?”
아타울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북쪽으로 가자.”
그들은 조금씩 후퇴하며 전진해오는 로마군을 정찰했다. 로마군은 숲을 지나갈 때는 신중하게 천천히 전진했기 때문에 약간의 공격으로도 수레를 끌고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다.
서고트족은 계속 뒤로 밀려서 라도나스 강에 다다랐다.
“여기서 강을 건너오는 로마군을 막자.”
라도나스 강은 큰 강은 아니었지만, 로마군을 허우적거리게 만들 정도의 깊이는 되었다.
서고트족은 강 건너편에 매복하고 로마군이 뒤쫒아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로마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정찰병이 달려와서 보고했다.
“로마군이 강 상류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매복한 것을 눈치채고 상류에서 강을 건너려는 모양이었다.
“우리도 강 상류로 갈까요?”
아타울프의 말에 알라리크는 잠시 지도를 보며 고민했다. 강은 휘어져 있어서 로마군에게는 상류가 가까워있지만,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멀었다. 지금 달려가 봐야 이미 늦었다. 로마군은 이미 강을 건넜을 것이다.
“아니야. 철수해.”
스틸리코도 그리스에서 전투를 해 본적은 없겠지만, 그동안의 전투 경험으로 보면 확실히 알라리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스틸리코는 거의 20년간을 전장에서 누비며 온갖 지형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게다가 스틸리코는 지역 주민을 활용해서 현지 사정을 샅샅이 알아 내 활용했다. 알라리크는 항상 자신이 내는 패를 스틸리코가 한 발 앞서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알라리크는 병사를 이끌고 라도나스 강에서 물러나서 플로이 숲으로 후퇴했다.
플로이는 험준한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숲이었다. 산골짜기의 길목을 막으면 좁은 곳에서 방어가 가능했다.
“서고트족이 플로이로 퇴각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스틸리코는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고트족이 플로이로 퇴각할 거라고 예상해서 이미 병사를 사방의 협곡에 배치해 놓았다.
알라리크는 플로이에서 길목을 막으며 방어할 생각이겠지만, 사실은 거대한 덫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셈이었다. 길목만 막으면 방어가 가능한 것은 반대로 말하면 길목만 막으면 플로이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다는 뜻이었다.
“토끼가 덫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문만 닫으면 되겠군.”
서고트족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들기는 쉬웠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였다.
스틸리코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동로마군과 동로마황궁이었다. 동로마군에게 와달라고 요청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가이나스는 출정하고 싶지만, 황제의 명령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에우트로피우스가 뒤에서 황제를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와 싸우듯이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가이나스가 에우트로피우스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서로마군을 지원하기 위해 동로마군이 출정해야 한다는 가이나스와 그것을 막으려는 에우트로피우스의 싸움에서는 결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에우트로피우스가 이길 것이다.
“군량이 떨어졌습니다.”
동로마군이 오지 않자, 서로마군은 물자가 떨어졌다. 동로마군이 보급을 가지고 와줄 것을 기대하고 몇 달치밖에 식량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들은 오지 않았다.
굶주려가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마에 요청할 수도 없었다. 동로마를 지키기 위해서 서로마군이 비용을 들여서 출정하는 것도 가뜩이나 서로마 원로원이 탐탁지 않아 했는데, 보급을 더 보내달라 할 수도 없었다. 요청해도 원로원에서 거부할 것이다.
“어떻게 하죠?”
부하 장수들의 초조한 얼굴에 스틸리코는 한숨을 쉬었다. 배고픈 병사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서고트족을 놓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 일대에 대 혼란이 올 것이다. 굶주린 병사들이 도적떼로 변신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야했다.
“어쩔 수 없지. 현지에서 조달하는 수밖에.”
사실상 약탈을 하라는 것이었다. 사람을 상하지 않게 한다 뿐이지, 노략질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는 서고트족이 했던 약탈 못지않은 사상자가 발생할 테니, 최악의 사태를 미리 막는 것이다.
로마군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돈과 식량을 수거해왔다. 이미 서고트족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서 남은 것도 없는데 또 서로마군이 약탈을 해가자 원성이 자자했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줄 알았더니 그나마 남은 것마저 가져갑니까?”
그리스 주민들은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그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어떻게 로마군이 야만족하고 똑같이 행동을 합니까?”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보급을 안 해줘서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를 모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틸리코의 부하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우울해하며 한탄했다.
“기껏 멀리서 도와주러 왔더니 욕이나 먹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서고트족에게 괴롭힘 당하는 동로마 주민을 도와주러 먼 서로마에서 달려왔는데, 동로마군은 싸우는 걸 구경만 하고, 동로마 주민들은 식량을 빼앗아간다고 투덜거리고, 동로마 황궁은 동로마 영토에서 물러가라 하고, 억울했다.
“조금만 참아. 전쟁은 곧 끝나.”
스틸리코는 씩씩거리는 부하장교들을 다독였다.
“서고트족은 플로이에서 얼마 못 버틸 거야.”
“식량을 잔뜩 약탈해놨을 텐데요?”
서고트족은 그동안 약탈한 식량이 많았다. 숲에서 다른 먹거리를 조달해가며 1년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스틸리코는 그 기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실행하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지도를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기다려 봐. 며칠 지나면 손들고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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