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각
“동로마에서 퇴각해서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를 정벌해 달라?”
알라리크는 다시 한 번 찬찬히 편지를 읽었다.
왜 갑자기 목표를 코 앞에 두고 후퇴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야 동로마를 해결한 다음에 몇 달 후에 처리해도 될 일인데, 인내심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스틸리코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원로원이 반대했나? 동로마에서 로비를 했나? 히스파니아가 콘스탄티누스에게 넘어가서?’
어쨌든 뭔가가 스틸리코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라리크는 고민에 빠졌다.
다키아를 코앞에 두고 후퇴해야 한다니 내키지 않았다. 그냥 다키아를 접수하고 눌러앉아 살아도 몇 년 간은 로마가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명령에 불복하고 다키아를 취하는 것은 그를 일리리쿰 군사령관에 임명해준 스틸리코를 배신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갈리아로 출정하는 것은 어떨까. 갈리아로 가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많았다.
갈리아 땅을 얻는다 해도 일리리쿰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가 제대로 통제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한 그가 반란군 정벌에 성공한다고 해서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 땅을 서고트족에게 줄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도 출정해서 고생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될 수도 있었다.
로마군이라면 명령에 따라 반란군과 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서고트족 입장에서는 이득이 없이 피를 흘리고 희생만 치르는 전쟁이었다. 동로마로 출정한 것은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얻는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와 싸우는 것은 서고트족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뭐 하러 로마의 내전에 서고트족이 끼어들어서 대신 싸우냐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스틸리코에게 답장을 썼다. 동로마까지 와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도 족장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운데, 콘스탄티누스까지 정벌하러 갈리아에 가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했다. 족장들에게 용병료를 제시하면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서고트족이 받아야 할 용병료를 계산해보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어려운 상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고트족 족장들의 약탈 요구를 막으려면 납득할 만 한 돈을 받고 싸워야 했다.
편지를 봉해 넣고 알라리크는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앞을 보았다. 로마제국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대상이었다. 쉬운 일을 왜 이렇게 멀리 돌아가서 처리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 많은 집단과 너무 많은 개인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몰랐다.
힘으로 움직이려 할 때는 쉬워보이던 것이 대화로 풀어가려고 하니 늘어지기만 하고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힘으로 빨리 해결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서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는 것이다.
알라리크는 머리를 흔들며 번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다.
서고트족이 테살리아까지 진군하자, 동로마 황궁은 다시 한 번 서로마에 사신을 보냈다. 며칠 후면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까지 당도할 수 있는 위급한 사태였다. 체면이고 뭐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스틸리코의 부인 셀레나에게 찾아가서 인정에 호소했다.
“제발 아르카디우스 황제 폐하를 살려주십시오.”
셀레나는 다짜고짜 그녀의 치마에 매달려서 자비를 호소하는 동로마 사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서로마 호노리우스 황제뿐 아니라 부인과도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그런데 어찌 알라리크를 시켜서 공격을 하십니까?”
셀레나는 자세한 군사기밀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로마 사신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알라리크가 동로마를 공격하는 것은 그이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어찌 로마끼리 싸우는 내란을 일으키겠습니까. 그이도 알라리크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알라리크를 군사령관에 임명하신 건 스틸리코 장군님이십니다. 퇴각하지 않으면 군사령관에서 해임하겠다고 하면 군사를 물리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이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셀레나는 동로마사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피를 나눈 형제의 전쟁을 막아주십시오.”
동로마 사신은 거듭 부탁하고 돌아갔다. 자신들이 스틸리코에 대해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재산을 빼앗고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려 했던 것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갔다.
셀레나는 스틸리코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동로마에서는 당신이 자기들을 공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라리크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당신이라고 하네요. 그러면서 동로마 침공을 멈춰달라고 부탁하고 갔습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알라리크에게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접수해서 방어하라고 명령했지만, 동로마 황궁과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라고 한 적은 없소.”
“하지만, 그가 테살리아까지 진격했다는데, 그러면 콘스탄티노플이 위험에 빠지는 것 아닌가요? 아르카디우스 황제와 호노리우스 황제는 모두 제 동생인데, 어찌 저희 가족끼리 싸우게 분란을 만드십니까.”
물론 스틸리코는 처음부터 내전으로 로마군이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서고트족에게 지시한 계획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서 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무력을 과시해서 위협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려고 했다면 콘스탄티노플로 빠르게 이동했을 테지만, 에피루스에서 머물다 다시 테살리아로 천천히 진군하도록 한 것은 동로마황궁을 그저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겁에 질린 동로마 황궁이 서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관계를 회복하고,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내놓도록 협상해서 서고트족으로 하여금 도나우강 방어선을 완성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아직 목표는 절반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동로마 사신이 서로마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동로마와 서로마의 대화의 물꼬는 트였지만, 속주는 서로마에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애초의 목표는 완전히 달성하지 못했지만, 콘스탄티누스를 처리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이미 서고트족에게 갈리아로 가서 반란군을 무찌르도록 협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지금쯤 편지를 받은 서고트족이 퇴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동로마와 서로마가 싸우는 내전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신하이니 황제께서 명하시면 동로마를 공격하지 않을 거요.”
스틸리코는 부인을 안심시켰다. 셀레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요즘 에우케리우스와 당신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는 거 알죠?”
스틸리코도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폴렌티아 전투와 베로나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소문은 그나마 얌전한 편에 속했다. 그가 알라리크와 내통해서 로마제국을 야만족에게 팔아넘길 거라는 것도 근거 없는 모함이라고 일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동로마에서 빼앗아서 제국을 동서로마와 일리리쿰으로 삼등분한 후에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일리리쿰의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는 황당무계한 추측까지 나돌았다. 자신은 황제에게 충성하기로 신에게 서약한 몸이니 직접 나서지 않고, 알라리크를 시켜서 제국을 삼등분하고,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고 가족까지 끌어들여서 비방했다. 누구보다도 동서로마 통합에 노력하는 그에게는 당치도 않은 흑색선전이었다.
황궁도 원로원도 변덕스러운 시민들도 스틸리코가 승전을 하면 잠시 환호했다가, 세금을 걷으면 불평을 쏟아냈다.
이렇게 여론이 나쁜 방향으로 돌아가는데 동로마에서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취하는 것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다급한 갈리아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걱정하지 마오. 알라리크는 동로마에서 철수할 거요. 그가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헛소문도 수그러들 거요.”
어차피 콘스탄티누스 정벌을 위해서 서고트족을 소환하려고 했던 스틸리코는 부인까지 나서서 부탁하자, 철수할 것을 명하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공식 문서를 동로마도 알 수 있게 공개적으로 보냈다.
동시에 비밀리에 개인적인 서신도 함께 보냈다. 보상 없이 동로마로 출정했다가 돌아와 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와 함께, 알라리크가 제시한 콘스탄티누스 정벌의 대가로 줄 용병료에 대한 답변이었다. 불만에 찬 서고트 족장들을 움직이려면 손에 돈을 쥐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라리크가 일리리쿰 군사령관이니 당연히 상관의 지시에 따라 출정해야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스틸리코가 명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알라리크가 거느린 일리리쿰의 병력과 야만족 군대도 막강했지만, 스틸리코의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았다.
갈리아의 야만족, 히스파니아까지 손을 뻗친 콘스탄티누스, 반란군에게 붙는 속주들, 동로마와 서로마 황궁의 그의 정적들이 퍼뜨리는 악의적인 비방, 군역과 세금 인상에 반대하고 버티는 원로원까지 한 몸으로 버텨내야 했다. 숫자가 줄어든 로마군단은 이탈리아를 방어하기에도 버거웠다. 알라리크가 아니라면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로마제국은 금이 가서 수시로 여기저기 물이 새는 항아리와 같았다.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이러다 항아리가 물의 내부압력을 견디다 못해 일시에 터져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동로마로부터의 철수를 명하는 황제의 명령서와 용병료 요구를 승낙하는 스틸리코의 편지를 받은 알라리크는 한숨을 쉬었다. 다키아 땅을 눈앞에 두고 철수하려니 솔직히 아쉬웠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언제 또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도 스틸리코에 대해서 퍼지는 비난과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로마속주를 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럽기는 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쓰러져가는 제국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스틸리코를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등 뒤에서 의심과 비난을 하고 있었다. 황제와 원로원이 스틸리코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가 너무 우월하고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가 좀 덜 뛰어나고 전투에서 패하기도 하고 탐욕스럽거나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염치없는 자들을 위해서 애쓰는 그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이 로마와 스틸리코의 걱정을 해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알라리크는 펜을 들어서 적절한 용병료를 협상하기 위한 답장을 썼다. 내 코가 석자인 서고트족 입장에서 아직도 살만한 로마 걱정을 해줄 처지는 아니었다. 스틸리코가 땅을 준다는 약속을 실행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라면, 돈이라도 받아내야 했다.
“일리리쿰으로 돌아간다.”
알라리크의 회군 명령에 서고트족은 의아해 했다.
“동로마군과 싸우지 않는 겁니까? 그럼 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다른 전투가 곧 시작될 거야.”
싱게리크는 알라리크를 도발하며 몰아세웠다.
“서고트족을 동로마에서 서로마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생각인지 명확하게 말을 해 주십시오.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접수한다고 하더니만, 갑자기 철수해서 갈리아로 간다니,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겁니까?”
사루스가 그의 뒤를 캐서 스틸리코와 내통한 증거를 수집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진군한 것도, 철수한 것도,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령서에 따른 것이다.”
그가 출정한 것은 스틸리코와의 비밀협약이어서 밝힐 수가 없었다. 다른 족장들도 궁금해했다.
“그럼 갈리아로 가서 누구와 싸우는 겁니까?”
싱게리크는 그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서고트족이 얻는 이득이 뭡니까? 뭘 믿고 로마를 따르는 겁니까? 스틸리코가 뭔가 보상을 해줄 거라는 근거가 있는 겁니까?”
족장들도 궁금해하며 그들의 행선지를 물었다. 동로마까지 갔다가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그들은 알라리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달라며 보챘다.
“우리가 급할 게 없다. 급한 건 로마지. 가만히 있으면 로마가 협상을 하자고 우리에게 올 거야.”
알라리크는 족장들을 다독이며 일리리쿰으로 돌아갔다.
싱게리크는 그가 변절해서 로마의 편에 섰다고 뒤에서 험담을 하고 다녔다.
“알라리크는 로마와 내통해서 서고트족을 팔아넘기는 거야. 스틸리코가 그를 일부러 살려줬다는데 그게 로마의 앞잡이라는 뜻이 아니고 뭐야?”
스틸리코가 야만족의 편에 섰다고 의심하는 로마시민과 달리 서고트족은 흔들리지 않았다.
“알라리크는 이미 서고트족의 왕이고 일리리쿰의 사령관이야. 더 이상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로마에게 우리를 팔아넘기겠어? 그럴 이유가 없지. 우리는 알라리크하고 한 운명이야.”
“알라리크는 우리에게 땅을 마련해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 로마에 협력하는 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그들은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편하게 살기보다 서고트족의 이익을 위해서 앞장서서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는 알라리크를 신뢰했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을 출발해서 갈리아로 가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는 길목인 에모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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