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의 반란
길도는 공식적으로 서로마 황제가 아닌 동로마 황제를 섬기겠다고 통보해왔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예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로마 황궁이 그의 술수에 놀아나서 이를 받아들인 것은 서로마로서 뼈아픈 일이었다.
스틸리코는 뻗어오는 열기를 누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동로마 황궁은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서고트족이 동로마를 2년간 약탈해도 내버려두고, 스틸리코가 그들을 공격하자 오히려 그가 거느린 동로마군을 빼앗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고, 재산을 빼앗고, 암살자를 보내고, 로마를 침공한 알라리크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길도가 서로마에 반기를 들자 아프리카를 동로마 속주로 받아들였다.
동서로마가 힘을 합쳐서 야만족을 물리쳐야 하는 이 때에 야만족과 손을 잡고 서로마를 공격하고 있었다.
3년 전 아르카디우스가 황제가 될 때만 해도 그는 이런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동로마가 서로마를 적대시하게 될 줄은 몰랐다. 루피누스만 없애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루피누스가 죽고 나서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그는 황제가 될 생각도, 황실에 관여할 생각도 없는데, 황제와 동로마 황실은 그의 힘을 빼앗고 제거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황제, 황후, 환관, 대신,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스틸리코를 두려워하고 언제든 그가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죽일 거라고 여겼다. 그가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로마에 항의하고 아프리카를 받아주지 말라고 하면 안 됩니까?”
가우덴티우스가 물었다. 스틸리코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동로마의 감정만 상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동로마는 놔두고 우리 일이나 신경 써.”
그렇다 해도 아프리카는 서로마의 재정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되찾아야 했다.
섣불리 아프리카를 정벌하기 위해서 갈 수는 없었다. 일리리쿰은 이탈리아의 바로 옆에 있어서, 스틸리코가 자리를 비우거나 이탈리아에 군사가 없으면 알라리크가 이탈리아로 공격해들어올 수 있었다. 라인강의 야만족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지금 재정 상황으로는 군대 파견은 어림도 없군.”
지금 있는 돈과 군대로는 이탈리아를 지키기에도 빠듯했다. 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한 병사를 파견할 여유는 없었다. 추가로 세금을 걷던지 아니면 가장 최소한의 자금과 군대로 가장 빠르게 아프리카를 되찾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길도의 세력이 더 굳건해지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길도의 세력이 커질 겁니다.”
부하들은 그가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선공을 하자고 주장했다.
“아직은 그러기에는 명분이 약해. 길도가 곧 행동에 나설 테니 기다려.”
스틸리코는 원로원이 바다 건너 아프리카 일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을 예상했다. 원로원의 동의 없이 군대를 보내 길도를 정벌하면, 스틸리코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길도를 개인적 감정으로 축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길도가 원로원을 충격에 빠뜨릴 정도의 큰 사고를 쳐야 수긍할 것이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단순히 명분뿐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심각한 피해가 야기되어야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하들은 스틸리코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몰랐지만 입을 다물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총사령관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적의 움직임을 몰아가는 솜씨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야만족의 침략 소식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브리타니아에서 배를 타고 온 전령이 소식을 전했다.
“브리타니아에 색슨족과 픽트족이 바다로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방어해야 할 땅은 넓은데, 병사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세금이 필요한데 세금이 예전만큼 걷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영농은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자유를 버리고 대지주의 농장에 농노로 들어갔다. 농노가 늘어난 만큼 대농장을 소유한 대지주와 귀족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하는데, 그들은 변호사를 통해서 어떻게든 세금을 내지 않고 탈세를 했다.
병사가 되겠다는 인력도 줄어들었다. 월급을 주고 모병을 해도 로마인 중에는 자원자가 없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도시지역이 병역회피가 더 심했다. 자원자는 국경 밖에 사는 야만족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리타니아에까지 파견할 병력이 없었다. 더욱이 멀고 척박한 브리타니아는 제국의 유지에 꼭 필요한 땅도 아니었다.
“곧 지원병력을 보낼 테니 최대한 막고 있으라고 해.”
브리타니아에 언제 지원이 가능할지는 그도 몰랐다. 하지만, 지원병력을 보낼 계획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희망마저 빼앗는 짓이었다.
아프리카의 길도, 브리타니아의 야만족, 라인강의 야만족, 일리리쿰의 알라리크까지 스틸리코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스틸리코의 예상대로 길도는 얼마 후에 다음 수순을 밟았다. 서로마제국으로 수출하는 밀을 싣고 가는 배들에게 출항금지령을 내린 것이었다. 한마디로 서로마제국의 수도에 식량공급을 끊은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안정과 안보차원에서 묵과할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이건 반역이지.”
비로소 행동에 나설 때가 되었다. 아프리카로부터 밀 수입이 중단되면 서로마의 곡물가격이 치솟을 것이다. 원로원 뿐 아니라 로마인 누구나 아프리카의 사정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일단은 식량공급부터 해결해.”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수십만 명이 사는 로마에 밀 공급이 중단되면 당장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로마시민의 상당수는 아프리카로부터 오는 무료 밀가루 배급에 의지해서 살고 있었다. 배급이 중단되면 로마에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길도보다 로마시민들이 먼저 황제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길거리로 나올 것이다.
서로마에서 아프리카 다음으로 밀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곳은 갈리아였다.
“갈리아로부터 밀을 수입해오도록.”
가우덴티우스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그 많은 곡물을 수송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립니다.”
갈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는 험한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험준한 산맥을 넘어서 곡물을 실은 수레를 수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좁은 산길에 수레가 통과하기도 어렵고, 산길로 곡물을 수송한다는 소문이 나면 중간에 가로채려는 야만족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것이었다. 당장 먹을 밀이 필요한데 한달 후에나 도착하면 소용 없었다.
스틸리코는 지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손으로 갈리아로부터 지중해 중부로 흘러나오는 론 강을 짚었다.
“갈리아에서 곡물을 실은 배를 론 강으로 해서 바다로 흘려보내.”
“바다로요?”
가우덴티우스는 이탈리아로 갈 곡물을 뜬금없이 지중해 바다로 흘려보내라니 스틸리코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서 그의 얼굴과 지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스틸리코는 다시 손가락으로 이탈리아의 서해안을 가리켰다.
“지중해에서 이탈리아로 와서 테레베 강 하구로 가서 거슬러 올라오면 로마로 올 수 있어.”
“아하!”
육로를 거치지 않고 론 강을 따라 내려와서 지중해로, 지중해에서 다시 테레베강을 따라 올라가면 갈리아에서 로마로 바로 배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알프스를 넘어 육로로 보내는 것보다 시간이나 비용이나 도적떼의 위협이 훨씬 적었다.
“알겠습니다.”
가우덴티우스는 곧바로 그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서 나갔다.
스틸리코는 집정관에게 길도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해달라고 요청했다. 공공의 적을 규정하면 적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를 모집하고 별도의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길도는 로마의 군사령관이었다. 그를 상대로 한 전쟁이 동등한 사령관끼리 치르는 내전이 되지 않으려면, 스틸리코가 일으킨 군사가 황제와 원로원의 지지를 받는 군대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스틸리코가 개인적인 야심에 의해서 길도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공공의 적을 규정하면 세금이 증세되기에 원로원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로원에서의 논의가 긍정적인 분위기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길도가 곡물수출을 막아서 제국의 수도를 직접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길도가 동로마를 섬기겠다고 했을 때에는 상관하지 않던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먹을 곡물 수출을 막아서 밥줄이 끊길 위험에 처하자 그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틸리코는 원로원 연설에서 그동안 길도가 저지른 악행들과 수탈당하고 살해당한 속주민들의 사정을 낱낱이 밝혔다. 원로원 의원들은 길도의 엽기적인 행동을 듣고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자기가 다스리는 속주라지만 로마제국에서 재판도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다니 저런 나쁜 놈이 다 있나.”
“가톨릭을 탄압하고 로마제국을 부정하는 반역자 무리인 도나투스파를 지원하다니.”
“어떻게 집에 초대해서 얼굴을 보고 마주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독살을 하지? 끔찍하군.”
길도에게 무관심하던 로마가 온통 그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들썩였다. 스틸리코가 자신에 맞서는 길도를 쳐내고 아프리카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어린 황제 호노리우스도 스틸리코가 써준 대로 길도를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문을 들고 나와서 읽었다. 처음에는 굳이 로마의 적으로 선포해야 하는가 회의적이었던 의원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돌아섰다.
“존경하는 원로원 의원님들께 반역자 길도를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스틸리코가 연설을 마치자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길도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고 아프리카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승인했다.
스틸리코의 부하들은 원로원을 다루는 그의 노련한 솜씨에 감탄했다. 자료를 모았다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터뜨린 것이다.
알라리크도 아프리카가 로마에 곡물 공급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 스틸리코가 길도를 공격하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간다면 이탈리아는 텅 비는 것이다. 그가 로마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아직 훈련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스틸리코만 없으면 어떻게든 로마군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스틸리코는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로 갔다가 날씨로 인해서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서 섣불리 가지 못할 것이다.
아프리카도 되찾아야하지만, 로마 입장에서 더 두려운 것은 서고트족을 비롯한 야만족의 침입이었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
스틸리코가 길도를 어떻게 처리할지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니 흥미진진했다. 과연 바다 건너 수만 명의 군대와 로마군단을 거느린 길도를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는 스틸리코가 어떻게 상대할까.
“스틸리코가 아프리카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스틸리코라고 해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타울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다를 건너가서 로마군단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데요. 그것도 적들의 본거지에서요. 스틸리코도 로마군단도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는데 뭘 가지고 어떻게 싸운다는 건지.”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전략을 다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짚이는 것은 있었다. 길도가 도나투스 파를 지원해서 도나투스파와 가톨릭의 반목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스틸리코가 그 점을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 갈등을 폭발시키느냐였다. 길도가 지휘하는 로마군단의 상당수는 가톨릭교도였다. 그들이 길도를 따르지 않고 황제를 따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원론적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했다. 그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단이 필요했다.
“연극이 필요해. 뭔가 사람들을 마음을 울릴 만한 감동적인 퍼포먼스를 하겠지.”
알라리크가 말하자, 아타울프가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눈썹을 모았다. 알라리크는 어깨를 으쓱 했다.
“우리가 플로이를 탈출할 때 스틸리코는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지. 이번에는 그가 연극을 연출할 테니 우리는 편하게 관람하자고.”
알라리크의 예상대로 스틸리코는 길도의 군대 구성원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길도의 세력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길도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은 대략 3만 정도였다.
길도를 떠받치고 있는 세력은 복잡했다. 가장 열성적인 세력은 가톨릭 기독교를 배척하고자 하는 도나투스파 기독교도와 아프리카의 토착 민족인 무어인 세력이었다. 무어인이라고 해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굳이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어인 가톨릭 기독교도도 있고 길도에 적의를 가진 자도 있어서 딱 나눠서 구분하기 애매했다. 스틸리코는 이런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길도의 세력의 균열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마스케젤을 불러와.”
길도의 동생인 마스케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스틸리코가 직접 나서면 로마가 아프리카를 공격하는 것이 되어서 아프리카인이 하나로 뭉칠 것이다. 마스케젤이 나서면 아프리카 내부의 도나투스파와 가톨릭이 충돌하는 종교전쟁의 성격이 되니 아프리카를 분열시킬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마스케젤은 길도를 공격하기에 가장 최적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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