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저 좀 도와주십시오.”
알라리크는 그를 찾아온 서고트족 농민 툴가를 만났다.
“제 땅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했다.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은 알라리크가 병력을 양성하는 것 못지않게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서고트족은 일리리쿰에 농지를 사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무슨 일인데?”
알라리크는 툴가가 내민 고소장을 들여다보았다. 고소장은 툴가가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으니 그가 소유한 땅을 돈을 빌려준 드라코스에게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돈을 얼마나 빌렸는데?”
알라리크는 툴가가 가져온 차용증서를 살펴보았다. 상당히 비싼 이자였고 액수도 꽤 되었다.
“왜 이렇게 돈을 많이 빌렸어?”
“로마의 세금이 좀 비싸야 말이죠. 인두세 재산세 토지세 너무 많아서 종류도 다 모르겠는데 세금징수원에 계속 찾아오니 안 낼 수가 없어서요.”
툴가는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땅을 내주고 농노가 될까도 생각중입니다. 그러면 소작료만 내면 되니까요.”
자유와 꿈을 찾아서 온 로마였지만, 이곳에서도 현실은 냉혹했다. 자유민의 신분을 유지하는 데만도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
차용증에 적힌 이자율이 비싸서 6개월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자는 또 왜 이렇게 비싸게 준다고 했어?”
“제가 글을 읽을 줄 몰라서요.”
라틴어도 서툰데 글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은 드라코스라는 대농장주이자 속주 의원이었다.
“그럼 어떻게든 이자라도 빨리 갚았어야지.”
“지난달에 돈을 빌려서 이번 달에 한 달 치 이자를 갚으려고 했더니 벌써 6개월이나 밀렸다는 겁니다.”
알라리크는 차용증을 다시 읽어보았다. 차용증에는 6개월전에 돈을 빌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6개월전에 빌렸다고 되어 있는데? 지난달에 빌린 게 확실해?”
“지난달에 빌렸습니다. 그런데 돈을 빌릴 때 증인을 섰던 사람이 6개월전에 빌렸다고 말하는 겁니다. 분명히 셋이서 지난달에 만나서 차용증을 쓰고 돈을 주고받았는데 말입니다. 미치고 환장하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드라코스가 로마법과 글에 어두운 서고트족의 땅을 빼앗기 위해서 1달 전에 돈을 빌려주면서 6개월 전에 돈을 빌려준 것으로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툴가에게 서명을 하게 한 것이다. 증인에게는 뇌물을 주어서 6개월 전에 돈을 빌려준 것으로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드라코스는 탐욕스러운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툴가 말고도 그에게 돈을 빌린 서고트족이 더 있을 것이다. 피해가 커지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1달 전에 돈을 빌렸다는 걸 저희 가족도 다 알고 동네사람들도 압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알아봐야 차용증에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의 증언만이 법적인 효력이 있었다. 오로지 법리로만 승부를 해야 했다. 글을 모르는 툴가가 법리를 따져가며 소송을 할 수는 없었다.
훌륭한 법이 있어도 변호사와 법관들은 그들에게 자금을 대주는 후원자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법을 고무줄처럼 마음대로 해석해서 적용했다. 뇌물을 주고 로비를 해서 거액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남의 재산을 갈취했다. 법을 악용해서 오히려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
‘이 좋은 제도를 나라를 망치는데 써먹다니.’
그는 로마제국에는 존경심이 들었지만, 로마인들에게 다시 한 번 실망했다. 로마제국보다 나은 서고트왕국을 세워서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돌아가 있어. 내가 재판에 같이 가줄 테니까.”
알라리크는 툴가를 안심시켜서 돌려보냈다. 아타울프에게 툴가와 같은 피해자가 더 있는지 돈을 빌린 서고트족에게 모두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관청으로 가서 툴가의 땅에 관한 토지대장과 관련 법안을 살펴보며 재판 준비를 했다.
재판을 하는 날이 되어 알라리크와 툴가는 재판정으로 출두했다. 재판관은 다행히 공정하다고 소문이 난 요비우스였다.
드라코스는 오지 않았고, 그의 변호인이 차용증을 재판관에게 제출하며 법의 엄정한 집행을 촉구했다. 증인은 툴가가 6개월전에 돈을 빌려갔다고 증언했다. 툴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증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지난달이었어!”
알라리크는 그를 진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가서 재판관에게 토지대장 사본을 제출했다.
“툴가가 이 땅을 산 것이 3개월전인데, 어떻게 6개월전에 이 땅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 차용증은 위조되었거나 하자가 있는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국가가 관리하는 토지대장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차용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했다.
재판관은 알라리크의 이의를 인정했다.
“이 차용증은 하자가 있다고 판결한다.”
변호인과 증인은 낭패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그들이 야만족이라고 여기는 무식한 서고트족이 이렇게 법리적으로 대응에 나설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알라리크는 재판이 끝나고 나서 합의를 위해 드라코스의 변호인과 증인과 다시 만났다.
“툴가는 1개월전에 돈을 빌렸습니다. 차용증을 1개월 전으로 다시 쓰고 합의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드라코스의 변호인은 고개를 저었다.
“땅을 3개월 전에 샀으니 3개월 전으로 다시 쓰는 게 맞습니다.”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거짓말을 우겨대고 있다. 그렇다면 이쪽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알라리크는 팔짱을 끼었다.
“우리는 아예 차용증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고 돈을 빌린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알라리크의 주장이 재판에서 받아들여지면 원금을 날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제야 그들의 열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알라리크는 한 술 더 떠서 그들을 협박했다.
“거짓 증언을 한 죄를 물어서 우리 측에서 증인을 고소할 겁니다.”
그러자 증인의 얼굴이 하얘졌다. 거짓 증언을 한 죄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무거웠다. 이미 차용증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판결이 난 이상, 죄의 경중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웠다.
“그러지 말고 1개월전으로 차용증을 다시 쓰시죠.”
증인은 알라리크와 드라코스의 변호인을 붙잡고 사정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1개월 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1개월 전에 빌린 것으로 차용증을 다시 작성하기로 합의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툴가는 알라리크에게 몇 번씩이나 절을 하며 고마워했다. 알라리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격려해서 돌려보냈지만, 과연 그가 언제까지 무거운 세금을 버티며 자유인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세금이 자꾸 무거워지는데도 세수가 줄어드는 것은 자유민이 세금을 피해 농노가 되기 때문이었다. 자유민을 농노로 흡수해서 농장을 늘리는 드라코스와 같은 대농장주들이 자유민들이 냈던 만큼 세금을 내지 않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토지대장과 인구대장을 확인해서 드라코스가 가진 땅과 노예의 숫자, 농노의 숫자를 찾아냈다. 그것들이 그가 내고 있는 세금의 액수가 맞는지 비교했다. 로마의 기록은 매우 세밀하게 적혀져 있어서 시간만 끈기있게 투자하면 자료들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예상대로 드라코스는 자신이 소송을 통해서 빼앗은 땅을 재산목록에 등록하지 않아서 재산세와 토지세, 수입세 등을 탈세하고 있었다.
토지대장을 일일이 대조하며 읽어보는 알라리크에게 누군가 다가와서 아는 체 했다. 지난번 판결을 맡았던 재판관 요비우스였다.
“군사령관님이 로마법에 조예가 깊은 줄 몰랐습니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들고 오랜 기간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이렇게 좋은 법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지키지 않는 겁니까?”
요비우스는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법이 있으니 이정도 유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드라코스가 이렇게 많은 탈세를 하는데 왜 가만히 놔둡니까?”
“고발하는 자가 없으니까요.”
“왜요?”
“다들 드라코스를 두려워합니다. 그의 돈과 인맥으로 얼마든지 위증할 증인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재판관님은 그걸 알면서 놔둡니까?”
요비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했다.
“저는 판결을 할 뿐이지 고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중립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럼 제가 고발하면 판결은 공정하게 해주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저는 오로지 법리에 의해서만 판결합니다.”
알라리크는 드라코스의 세금징수원을 면직하도록 고발했다. 세금징수원이 드라코스의 재산을 누락했다는 직무유기 혐의였다.
분명히 뇌물이 오고갔겠지만 그 증거가 없으니 일단 직무유기로 고발한 것이다. 세금징수원은 직무유기를 하면 면직될 정도로 처벌수위가 높았다.
세금징수원은 면직당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재산의 자진신고가 관행이라며 드라코스에게 책임을 미뤘다.
“제가 누락한 게 아니라 신고자인 드라코스가 누락한 겁니다. 저는 징수만 하지 신고는 보통 각자 알아서 합니다.”
요비우스는 신고자가 누락했다는 진술을 받아들여서 세금징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것은 알라리크가 바라던 바였다. 세금징수원의 증언을 근거로 이번에는 드라코스를 고발했다. 재산 신고를 누락해서 탈세한 혐의였다. 로마제국에서 탈세는 엄청난 중죄였다.
드라코스는 인맥이 넓어서 일리리쿰 도처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 막 일리리쿰에 온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재판관 요비우스에게 손을 써서 무마하려고 했지만 요비우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지난번에 세금징수원을 무죄로 판결했는데, 내가 한 판결을 내가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고발자와 이야기해서 합의를 보시지요.”
하는 수 없이 드라코스는 변호인을 보내서 알라리크와 합의를 하려고 했다.
“드라코스 의원님은 로마 원로원에도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에도 아시는 분이 많습니다. 고발을 취하해 주신다면 로마의 유력 가문의 딸과 혼인을 해서 원로원에 들어가도록 힘써주실 수 있습니다.”
알라리크는 코웃음 쳤다.
“원로원이라? 로마인들이 야만족인 나를 원로원에 넣어 주겠소? 나야말로 그런 무능한 자들 무리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변호인은 얼굴이 뻘개져서 물러갔다.
마침내 드라코스가 직접 알라리크를 찾아왔다.
“대체 저한테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서 괴롭히시는 겁니까?”
그는 알라리크에게 금화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제가 군사령관님을 소홀하게 대접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알라리크는 금화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왜 이런 금화에 욕심을 내겠소? 나는 군사령관이오.”
그는 금화가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
“군사령관은 언제든 군대에 물자가 부족하면 필요한 물자를 징발할 권한이 있소. 그대의 농장도 마찬가지요.”
그 말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드라코스의 농장에 군대를 보내서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드라코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이 그동안 동로마를 약탈하고 다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알라리크가 지시만 내리면 그의 농장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싹 털릴 것이다.
“설마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지금은 다행히 군 재정이 넉넉해서 그럴 필요는 없소. 하지만 세금이 부족해지면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러니 군 재정상황이 나빠지지 않도록 세금을 꼬박꼬박 내시오.”
알라리크의 위협에 드라코스는 얼이 빠져서 돌아갔다.
알라리크가 합의해줄 생각이 없으니 재판에서 해결을 봐야 했다. 드라코스는 법조계에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심문을 요리조리 빠져나갔지만, 알라리크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 땅의 소유자가 된지 두 달밖에 안 지났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예전 재판기록을 찾아보니 빚을 갚지 못한 농부에게 승소해서 담보로 걸었던 땅을 취하신 게 5년 전으로 나와있습니다.”
이전 판결문을 조사해서 추가 비리를 폭로하는 식으로 점점 판을 키웠다. 마침내 드라코스는 손을 들었다. 알라리크가 파고들수록 추징액이 커지니 이쯤 해서 자진신고하는 편이 나을 듯 했다.
지역의 실세 의원인 드라코스가 어마어마한 세금추징액을 때려 맞자 탈세 비리가 사라졌다. 농장주들은 누락된 토지와 재산을 신고했고, 세금징수원은 직무유기로 면직당하지 않으려고 실사를 다니면서 신고된 것이 맞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알라리크를 야만족이라고 우습게보던 로마인 귀족들도 태도가 달라졌다. 알라리크는 법률적 지식과 군대를 양손에 쥐고 그것을 번갈아 활용하여 으름장을 놓으며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자들을 몰아갔다. 그를 회유하려던 자들은 오히려 철퇴를 맞았고, 재판관과 변호사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재판을 투명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했다.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리크는 법리대로 명확하게 판결해준 요비우스 재판관에게 감사했다.
로마인이 드라코스나 루피누스 같은 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요비우스처럼 평범해보여도 상식적이고 자기 위치에서 묵묵히 원칙대로 일하는 사람이 있으니 로마가 천년을 버텨왔을 것이다.
“아무도 엄두를 못 냈던 일을 알라리크 사령관님이 와서 몇 달 만에 해 내셨습니다.”
요비우스는 알라리크에게 공을 돌렸다.
“재판할 때 보면 뇌물을 주고받거나 위증을 하는 사람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사령관님이 철저하게 수사하고 법을 집행해주셔서 그렇습니다.”
알라리크는 다시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로마제국은 틀려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직접 참여해서 운영해보니 윗사람들이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대로 굴러갈 수도 있었다. 굳이 서고트왕국을 세우기보다 이대로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로마에 대한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