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
스틸리코는 야만족의 침공이 조용해진 틈에 동로마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다.
그는 주교를 납치하고 암살하려 한 동로마에게 항의하는 뜻에서 일시적으로 무역을 중단시켰다. 동로마와 물품을 교역하는 배의 출항을 금지시킨 것이다. 언제까지나 무역을 금지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위중한 사안이라고 동로마에 경고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일리리쿰 근위대 기병대장과 일리리쿰의 행정관들을 임명해서 파견했다. 일리리쿰에 대한 인사권을 동로마가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게 한 것은 일리리쿰 일대의 완전한 통제권을 가져오려고 한 것이다.
일리리쿰 군단은 동로마와 서로마에 걸쳐져 있었다. 서로마의 라에티아, 노리쿰, 판노니아와 동로마의 다키아, 모에시아가 일리리쿰 군이 관할하는 영역으로 되어 있었다.
동로마는 일리리쿰을 서로마에 넘겨준다고 했지만, 다키아와 모에시아는 여전히 동로마에 속주세를 보내고 있었다. 다키아와 모에시아의 속주 군단은 동로마군에 편성되어 있었고 동로마황궁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일리리쿰의 기병대장과 행정관을 임명한 것은 애매한 일리리쿰의 통제권을 정리하고, 다키아와 모에시아도 서로마가 관할하겠다는 뜻이었다.
스틸리코는 도나우강 국경을 제대로 지키려면 다키아와 모에시아까지 일리리쿰의 관할로 묶어서 일괄적으로 관할해야 한다고 여겼다.
다키아는 산맥으로 둘러싸여 예로부터 야만족의 근거지로 사용되곤 했다. 스키타이족, 켈트족, 고트족, 반달족, 훈족 등의 야만족이 그 곳에서 모여서 힘을 길러 로마로 쳐들어왔다.
최근에는 동로마가 다키아를 방치하면서, 그곳에서 판노니아와 라에티아로 쳐들어오는 야만족이 기승을 부렸다. 그러니 다키아의 방어 거점을 재건하는 것이 야만족 침입을 막는데 필수적이었다.
라에티아로부터 노리쿰 판노니아 모에시아 다키아에 이르는 지역을 일리리쿰 관할로 묶어서 서고트족이 지키게 되면 로마제국과 야만족 사이에 완충지역의 장벽이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국의 긴 도나우강 국경선 지역을 모두 서고트족에게 맡겨서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라인강이 있는 게르마니아는 프랑크족이 지키게끔 하고, 도나우강이 있는 일리리쿰은 서고트족이 지키도록 하면, 제국은 그들을 방벽으로 해서 안전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은 야만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 사령관으로서 군단을 양성하고 그곳에 쳐들어온 야만족을 격퇴하고 있으니, 서고트족에게 좀 더 넓은 영토를 수호하도록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스틸리코는 이 기회에 서고트족 문제와 동로마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했다.
알라리크가 동로마를 압박하면, 위기를 느끼는 아르카디우스는 서로마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고, 그러면 서로마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동로마의 태도가 누그러질 거라고 예상했다.
“반달족을 격퇴한 네 공로에 대한 지분을 달라고 동로마 황실에 요구해.”
“지분?”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무슨 의도로 그런 제안을 하는지 파악하려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일리리쿰의 동로마 영역인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관할하도록 달라고 해. 그렇게 일리리쿰 아래 다섯 개의 속주를 통제하고 지키면서 서고트족이 터를 잡고 살면 어때?”
스틸리코와 협상을 할 때마다 서고트족에게 땅을 떼어줄 수는 없다며, 그것만은 완강하게 반대해왔다. 용병료를 주거나, 그들이 방어하는 지역의 농경지 일부의 사용권을 주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서고트족의 몫으로 로마영토에서 일부를 떼어 줄 수는 없다고 반복적으로 말해왔다. 그렇게 되면 다른 소수 민족들도 모두 분리 독립 하겠다고 요구할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일리리쿰 속주를 관할하고 지키면서 터를 잡고 살라는 스틸리코의 말의 뜻은 실질적으로 도나우강 유역의 관리가 안 되고 있는 땅을 서고트족에게 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키아는 거듭되는 야만족의 침입에 반쯤 버려지다시피 한 땅이었다. 그런 땅이라면 서고트족이 로마인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마음대로 눌러 살 수 있을 것이다.
“서고트족이 도나우강을 지키는 로마의 아미쿠스가 되는 거지.”
아미쿠스는 친구라는 뜻이었다. 동맹을 뜻하는 포에데라티보다 한 층 더 깊은 관계의 동맹이었다. 포에데라티가 돈을 주고 용병을 제공하는 사업적 관계라면, 아미쿠스는 한 쪽이 공격받으면 반드시 다른 쪽이 돕는다는 신뢰를 깔고 가는 관계였다.
서고트족에게 공식적으로 영토를 내 줄 수는 없지만, 알라리크가 일리리쿰의 군사령관으로서 그 지역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하면서 서고트족이 자신의 땅으로 정착해서 살도록 허용한다는 뜻이었다.
서고트족이 로마의 법과 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려들지 않는다면 내버려두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서 정착해서 몇 년 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공직에도 진출하고 농장을 일구고 로마의 속주민으로 동화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독립국가를 세우지는 못해도 이전보다는 분명히 향상된 조건이었다. 넓은 다섯 개의 일리리쿰 속주의 비옥한 땅 어느 곳이든지 정착해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다키아처럼 로마인이 별로 살지 않는 땅에서는 서고트족이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왕궁과 도서관 등 건물을 짓고 마을을 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라리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를 길도와 마스케젤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스틸리코가 동로마황궁을 압박해서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받아내서 가지라니 믿기 어려웠다.
물론 다키아는 아프리카와는 달리 생산성이 떨어지고 방어비용은 많이 드는 속주였다. 지키려면 힘들지만 내버려두면 야만족이 들끓는 성가신 땅이었다. 걷히는 세금과 방어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따지면 플러스보다 마이너스에 해당하는 땅이었다.
스틸리코가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 데에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로마군의 재정상태가 큰 영향을 미쳤다. 도나우강 속주들의 방위를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에게 맡기면 저렴한 속주세로 많은 병사를 모집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서고트족이 야만족의 편에 서지 않고 안정된 길을 선택하도록 달래야 했다.
알라리크도 로마군의 이런 사정은 잘 알고 있었다. 제국 곳곳을 침범하는 야만족을 물리치려면 서고트족이 필요하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통 큰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야만족의 위협에서 로마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알라리크는 마침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를 동로마황궁과 싸우게 만들려는 스틸리코의 속임수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고대하던 땅을 얻을 수 있다니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탐이 나는 제안이었다. 스틸리코가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더라도 이것으로 그에게 진 빚을 한 번 갚는 셈 치면 되었다.
알라리크는 동로마 황실에 자신의 요구사항을 적은 편지를 썼다.
[아르카디우스 황제폐하께
신, 알라리크는 군사령관이자 로마의 아미쿠스로서 수년 간 일리리쿰 일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판노니아에 쳐들어온 반달족을 격퇴시켰습니다.
그들은 다키아를 근거지로 하여 일리리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다키아는 동로마 관할이라서 그들을 추격하여 궤멸시키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일리리쿰 군사령관인 저에게 관할하도록 영유권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요청을 들어주기 어려우시다면 제가 직접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그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제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 알라리크]
다키아와 모에시아의 통제권을 내주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가겠다는 협박이었다.
동로마 황실은 알라리크의 편지를 받고 발칵 뒤집혔다.
“알라리크가 또 쳐들어온다고?”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안절부절했다. 동로마의 군대를 통솔하던 쟁쟁한 장군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티마시우스, 프라비타, 가이나스 등 실전을 통해 다져진 명장들이 없으니 믿을 사람이 없었다.
황제는 아우렐리아누스 등의 원로원 의원을 불러서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이전의 경험으로 적들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것은 까다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절대 함락되지 않을 겁니다. 이곳만 지키고 있으면 됩니다. 밖에서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우리는 안전할 겁니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놔두십시오.”
동로마 황궁은 예전에 서고트족이나 동고트족이 침략했을 때 내버려두었던 것처럼 알라리크의 공격을 무시하고 버티기로 했다.
알라리크는 동로마 황궁이 제안을 거절했다는 서신을 스틸리코에게 전달했다.
그는 이 기회에 아예 아르카디우스를 황제 제위에서 끌어내리고 스틸리코가 동로마 황제가 되어버렸으면 싶었다. 야만족을 배척하고 약속을 뒤집는 믿을 수 없는 황제들보다는, 야만족에게 유화 정책을 쓰고 약속을 어기지 않는 스틸리코가 협상상대로는 바람직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병약한 황제와 어린 황태자의 제위를 찬탈할 리가 없었다.
스틸리코는 에피루스로 진군하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물론 그가 지시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서로마 총사령관이 야만족에게 동로마를 공격해서 땅을 받아내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로마인들이 뒤집어질 것이 뻔했다.
알라리크는 어디까지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여 져야 했다. 지금까지 황제를 겁박하고 제멋대로 행동해 온 알라리크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법 했다.
알라리크는 로마군을 이끌고 동로마의 에피루스를 향해 출정했다. 서고트족 족장들은 약탈도 하지 못하는데 출정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시큰둥해했다.
“용병료도 안 받고 무슨 이득이 있다고 멀리까지 싸우러 가는 겁니까?”
아타울프도 로마제국에게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
“스틸리코가 우리와 동로마의 싸움을 붙이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알라리크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적과 적을 싸우게 만들어서 서로 소모시키는 로마의 오랜 전략에 또 한 번 말려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다키아 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번 전투는 내가 지휘하니까 의미 없이 희생하며 싸우지는 않을 거야.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도나우강 유역의 땅을 모두 서고트족이 확보해서 안심하고 살 수 있어.”
알라리크는 부하들을 다독거리면서 출정했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군단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외교적 교섭만으로 동로마 속주를 취하면서 동로마 황궁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알라리크가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서로마로 가져올 것이다.
서고트족과 동로마 황궁이 싸우는 동안에 스틸리코가 처리하려고 주목하는 것은 브리타니아의 반란군이었다. 지금까지는 마커스를 황제로 추대한 것 말고는 딱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았다. 브리타니아의 장교들 중에는 여전히 스틸리코에게 충성을 바치며 소식을 비밀리에 알려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라티아누스도 그들 중에 하나였다.
최근에 그가 우려할 만한 소식을 전해왔다. 브라타니아의 장교중 한 명인 콘스탄티누스가 부하들을 선동해서 바다를 건너 갈리아를 공격해야 한다며 바람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갈리아 북부에는 군단이 없었고, 갈리아 남부에도 병사가 거의 없었다. 브리타니아군은 소수였지만 갈리아로 넘어오면 갈리아는 그들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반란군이 자신의 지역을 넘어와서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수준이 된다면 반란군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제국과 황제를 위협하는 적과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다음 순서는 반란군을 처리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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