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
라벤나로 돌아간 호노리우스 황제는 아직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폐하를 해칠 사람은 없습니다.”
올림피우스는 황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호노리우스는 번쩍 정신이 든 듯 그를 보았다.
“스틸리코가 나를 죽이러 올 거야. 어쩌면 좋나.”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들의 참혹한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것만 같았다.
“사루스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출병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사루스는 드디어 스틸리코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병사들을 이끌고 볼로냐로 향했다.
올림피우스는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황제는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입니다. 스틸리코도 신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바들바들 떨면서 올림피우스를 쳐다보았다.
“너만 믿는다. 나를 살려줘.”
“걱정 말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잘 되고 있습니다.”
올림피우스는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모나에서 자신의 제안에 대한 로마의 답변을 기다리면 알라리크는 초조하게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제안이 통과된 후로, 로마의 여론이 점점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로마인과의 협상에서는 고려할 게 많았다. 이익 외에도 종교, 명예, 명분, 자존심, 절차, 도덕, 가치관, 계급, 혈통 등등 따지는 게 많았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도 본질은 이익이겠지만, 감정적인 요소들과 결합하면 복잡해졌다.
파비아의 숙청소식이 들려왔다. 이렇게 된 이상 황제는 스틸리코를 없애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지키겠다고 사방에서 몰려온 군단의 부하들이 라벤나 황궁으로 가자고 하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황제가 스틸리코에게 어서 자기를 죽여보라고 칼을 휘두르고 있군요.”
아타울프는 흥미진진한 검투사 경기라도 보는 것처럼 로마의 내분에 즐거워했지만, 알라리크는 어쩐지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아타울프는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스틸리코가 황제를 내쫒겠지요? 자기 목숨이 위태롭고 로마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번에도 가만있지는 않겠지요?”
“글쎄.”
스틸리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카이사르도 원로원의 소환에 거부하며 루비콘강을 건넜다. 개인의 사익 뿐 아니라 로마의 국익을 생각해도, 스틸리코가 황제를 제거하는 것이 옳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아는 스틸리코는 황제에게 칼을 들이댈 리가 없었다.
스틸리코가 힘을 잃는다면 지금까지 몇 년 간 공을 들여온 로마와의 관계가 끝나버릴 것이다. 야만족을 배척하는 로마에서 서고트족과 소통하는 창구였던 그가 사라지면 로마와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봐야지.”
신중한 알라리크의 말에 아타울프가 말했다.
“스틸리코가 황제에게 굴복하고 실각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우리로서도 좋은 일 아닌가요?”
알라리크는 대답 없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스틸리코가 사라지면 서고트족을 위해서 좋은 일일까.
스틸리코가 자신을 살려둔 이유를 이제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협상을 하려면 흩어져있는 야만족을 개별적으로 상대하기보다, 그들을 묶어서 통제하는 알라리크 한 사람을 상대하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알라리크도 지금까지는 스틸리코하고만 협상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실각하면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갈라진 황궁과 원로원 의원과 로마군이 각자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한쪽이 찬성해도 다른 쪽이 반대하면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전보다 더 열심히 협상에 임한다 해도 누가 발목을 잡고 나올지 알수 없었다.
“가봐야겠어.”
지금이 그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을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틸리코가 없어지고 야만족 배척이 시작되면, 자신도 일리리쿰 사령관에서 해임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7천명의 동고트족이 학살당했던 것처럼, 일리리쿰에 사는 수만 명의 서고트족이 학살당하거나 쫓겨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는 서둘러 볼로냐로 향했다.
볼로냐 기지에 모인 스틸리코와 그의 장군들은 황제가 그를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가우덴티우스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라벤나로 가서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그의 부하들은 한결같이 스틸리코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스틸리코를 걱정하는 지지자들도 각지에서 볼로냐로 달려왔다.
“황제는 장군을 죽이려고 마음을 굳힌 겁니다. 황제에게 미련을 두지 마시고, 어서 진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는 로마제국에 미래가 없습니다. 한 명의 장수가 아쉬운 판에 자신의 장수들을 죽이는 호노리우스는 로마 황제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제발 라벤나로 가서 황제를 폐하십시오.”
스틸리코는 한 번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던 호노리우스 황제가 많은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돌발행동을 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황제의 뜻이 아니라 그 주위의 간교한 자들의 이간질 때문일 것이다.
“추측만으로 황제께 반기를 들 수 없소. 사건이 명확해지도록 황궁에 사신을 보내서 폐하의 의도를 물어보겠소.”
자신은 호노리우스에게 해가 되는 어떤 행동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의견 대립은 몇 번 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죽인 걸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황제는 사령관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황제를 폐하지는 않더라도 군대를 끌고 가서 진실규명을 요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결단을 촉구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몇몇 환관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얼떨결에 일을 저지른 거라면 라벤나로 군대를 끌고 가서 그들을 처벌하도록 황제를 무력으로 압박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태를 끌고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최근에 로마에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반감을 알고 있었다. 야만족의 핏줄, 이단과 손잡은 배교자, 로마의 명예와 전통을 짓밟은 배신자라는 경멸 속에서 그가 황제를 압박하거나 스스로 황제가 되더라도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기는 어려워보였다.
무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면, 원로원과 가톨릭 기독교도들과 로마인들은 스틸리코가 자신을 키워준 선황제의 아들을 협박하고 권력에 욕심낼 줄 알았다며 더욱 더 그를 공격할 것이다.
황제와 대치하는 동안, 호노리우스를 구한다는 구실로 동로마제국과 콘스탄티누스는 양쪽에서 서로마를 압박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리며 내전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야만족들은 제국의 국경 곳곳에서 침략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 전쟁을 하고 있는지 목적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로마를 구하기 위해서 군대를 일으켜도, 그 행동이 로마의 몰락을 가속시키게 될 것이다.
“폐하께서 무사하시고 반란이 일어난 게 아니니,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스틸리코의 말에 장군들과 관료들은 답답해했다.
“황제가 곧 사령관님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할 겁니다.”
“어차피 내전은 피할 수 없으니,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
부하들의 애원과 한탄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명령이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스틸리코의 단호한 입장에 장군들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몇몇 측근 장교들과 지지자들만 그의 곁을 지켰다.
스틸리코의 막사를 지키던 훈 족 병사는 사루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오자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스틸리코 장군을 만나러 왔네.”
“다들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는 예외일 걸세.”
사루스는 칼을 뽑아들어 그를 찔렀다. 그와 동시에 사루스의 병사들이 스틸리코의 근위병들을 공격했다.
스틸리코는 막사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비명이 들려오자, 기습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칼을 들고 일어섰다. 막사로 들어선 자는 그를 따르던 사루스였다.
사루스는 괴성을 지르며 스틸리코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스틸리코는 날카로운 칼끝을 피하며 칼을 밀어냈다.
“상관에게 무슨 짓이냐!”
스틸리코의 꾸짖음에 사루스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로마를 침공한 알라리크와 내통하고도 네가 로마의 사령관이냐? 너는 내 상관이 아니다!”
사루스는 다시 스틸리코에게 달려들었다. 스틸리코는 그의 칼을 밀쳐서 넘어뜨리고 탁자를 밀쳐서 그를 탁자 밑에 깔아버렸다.
“죽여!”
사루스는 탁자 밑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며 자신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사루스의 병사들이 스틸리코를 둘러싸고 칼을 휘둘렀다. 스틸리코가 그들의 칼을 쳐낼 때, 가우덴티우스가 훈족 호위병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꼼짝 마!”
훈 족의 화살이 그들을 포위하고 겨누었다. 사루스의 병사들은 얼음이 되어 멈추었다.
“스틸리코 장군의 은혜를 배신하느냐!”
가우덴티우스의 말에 사루스는 무거운 탁자 밑에서 끙끙거리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왜 로마군에 들어왔는데! 알라리크를 죽이기 위해서 모든 걸 버리고 로마군에 들어왔다. 그런데 알라리크와 손을 잡다니. 스틸리코야말로 나를 배신했다.”
사루스는 탁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는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손가락질 했다.
“너희들도 알라리크도 모두 죽이고 말겠다.”
스틸리코는 그들을 보내주라고 지시했다.
“로마군끼리 싸울 필요 없다. 가라.”
사루스는 분한 듯이 그를 노려보다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스틸리코는 난장판이 된 자신의 막사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이 와서 넘어진 탁자와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치우고 정리했다. 스틸리코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국이 외부의 여러 적들과 전란을 치르는 이때, 이대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끄는 것은 내부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자신의 안위가 걱정된다 해서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태도가 아니었다.
“라벤나로 가서 황제를 만나겠다.”
황제를 만나서 조속히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지금처럼 로마가 황제와 그로 이분되어 있어서는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었다.
“황제는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 라벤나로 가면 죽습니다.”
가우덴티우스와 부하들은 황제를 만나서 대화하고 오해를 풀겠다는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황제를 만날 때는 무기를 지닐 수 없었다. 군대도 무기도 없이 황궁으로 간다는 것은 그를 죽이던 살리던 황제의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스틸리코는 마음을 정했다. 군대도 거느리지 않고 무기도 지니지 않고 가서, 황제를 해칠 뜻이 없고 황제에게 목숨을 맡긴다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제국에 대한 충성이라는 그의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로서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황제와 로마시민의 지지 없이는 아무리 로마를 위한 것이라 해도 그의 행동이 무의미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에 연락해서 성문을 닫도록 해. 야만족의 공격이 곧 있을지 모른다고 전해.”
자신이 죽으면 이탈리아로 올 기회를 노리던 갈리아의 야만족이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로 달려올 것이다. 에모나에 있는 서고트족도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지시사항을 군단과 도시에 전달했다.
스틸리코는 라벤나로 출발하기 위해서 말을 대기시켰다. 그때 알라리크가 도착했다.
“라벤나로 간다고?”
알라리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라면 황제를 공격하기보다는 교섭을 해서 화해를 시도할 줄은 알았지만, 혼자 적의 소굴인 황궁으로 들어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죽으면 로마에는 더 이상 야만족을 상대할 장수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반달족, 알라니족, 동고트족, 모든 야만족이 갈리아와 이탈리아와 전 로마제국을 휩쓸 것이다. 그가 평생 사랑한 로마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알라리크도 로마제국과 협력하고 황제의 신하로 남아있기보다는 서고트족의 이익을 위해서 로마를 압박할 것이다. 스틸리코는 이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가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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