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주
“잘 지냈나?”
“오랜만이네. 스틸리코.”
꼬박꼬박 장군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던 알라리크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스틸리코는 가소로운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맞먹겠다 이거군. 더 이상 로마의 신하가 아니라는 말이지.’
뒤쪽에 물러나있는 서고트족 여인과 아이들을 보면서 스틸리코는 쯧쯧 혀를 찼다. 약탈을 해서 빼앗은 값비싼 옷에 보석 목걸이를 주렁주렁 걸었지만, 그래봐야 추레했다. 야영을 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꼬질꼬질했다. 작은 짐수레에 전 재산을 싣고 떠돌아다녀야 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도 얼마 안 되었다.
“무엇을 위해서 네 동족들을 벌판으로 끌고 다니면서 고생을 시키는 건가? 어째서 무모한 일을 벌이는 거냐? 너 뿐만 아니라, 네 동족들까지 위험으로 내몰다니. 전투에서 지면 저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갈 운명인 것을 모르나?”
“내가 끌고 다니는 게 아니다. 저들이 나를 따르는 거다.”
알라리크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로마는 계속 우리를 배신했다. 야만족의 침입을 막으면 땅을 주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도 손바닥 만 한 땅 하나 주지 않았지. 농사를 지으라고 하면서 농사를 짓기만 하면 무거운 세금으로 다 빼앗아갔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비싼 이자로 곡식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아이들까지 노예로 끌고 갔다. 군대에 복무하면 급료를 주겠다고 하고는 로마병사의 절반도 안 되는 급료를 주면서 화살받이로 소모해버렸지.”
스틸리코는 변명하지 않았다. 몰려드는 야만족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서고트족만의 일이 아니었다. 반달족도 프랑크족도 마찬가지였다. 무질서하고 미개한 다수의 야만족이 끊임없이 로마제국으로 밀려들어왔다. 로마 영내에서 그들의 세력이 커지지 않도록 관리하려면 그런 방법뿐이었다. 야만족을 내버려두면 결국 숫자가 늘어나서 로마 본토를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그런 것을 굳이 알라리크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해도 알라리크와 같이 미숙한 정신의 야만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로마의 가치를 야만족에게 설명하는 것은 성경의 가치를 양에게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라리크는 알라리크대로 속으로 스틸리코를 비웃고 있었다.
‘로마를 공격해달라고 우리에게 돈을 건넨 것이 바로 로마 재상 루피누스라는 거 알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스틸리코의 처지는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분열을 통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루피누스든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자와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명예와 약속을 지키는 것이 로마인이라고들 하지. 그런데, 지금 약속을 계속 어기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바로 로마의 황제다.”
알라리크는 결전의 의지를 선언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힘으로 얻어낼 것이다.”
알라리크의 생각은 1년전이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경해졌다.
“원하는 게 뭐냐?”
“지금 당장 서고트족이 로마로부터 독립적으로 살 땅이 필요하다. 영토를 얻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
역시나 알라리크가 원하는 것은 농지보조금이 아니었다. 돈으로 협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에게 땅을 떼어주는 일은 없다.”
스틸리코는 단칼에 거절했다. 로마는 수십 수백 개의 만족이 뒤섞여 사는 나라였다. 저마다 땅을 가지고 독립하겠다고 한다면, 로마에 남아날 땅이 없었다.
“그렇다면 싸워서 얻겠다.”
알라리크도 단호하게 선언했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투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스틸리코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스틸리코는 패한 적이 없었다. 알라리크는 오늘에야말로 그에게 패전을 안겨 주리라 결심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오늘 보여주겠다.”
알라리크는 로마군의 전술에 대해서 나름 준비를 했다. 로마군은 보병을 앞세우고 양 끝에 기병을 배치해서 보병으로 밀어붙이고 기병으로 포위하며 후방을 차단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프리티게른이 로마군과 싸웠을 때도, 로마군 보병이 전진해서 짐수레 뒤에 몸을 숨긴 서고트족을 공격하고 기병이 포위했다. 프리티게른은 로마군의 그런 작전을 알고, 로마군 기병이 짐수레를 포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고트족 기병을 출격시켜서 순식간에 로마군 전체를 포위했다.
그때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경험이 없어서 잘 통한 면이 있었다. 사방을 면밀히 정찰하는 스틸리코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기병끼리 부딪치는 싸움에서 이기려면 일단 숫자의 우위를 점해야 했다. 알라리크는 가능한 한 많은 기병을 확보하기 위해서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모두 기병으로 배치했다. 부대 편성에서 앞서가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로마군에게 졌던 것은 무기도 조악했고 갑옷도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갑옷과 무기도 약탈해서 갖췄고, 체력으로는 서고트족이 로마군보다 우월하고 기병도 잔뜩 편성했으니 해볼 만 했다.
“가자!”
“이기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마에서 빼앗은 무구로 무장한 서고트족과 로마군이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처음에는 서고트족이 우세해 보였다.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고 힘에서 우위를 점한 서고트족이 거칠게 밀어붙였다.
“기병 앞으로!”
알라리크는 적을 포위하기 위해서 좌익과 우익의 기병을 출격시켰다. 초반에 기세를 잡을 생각이었다.
스틸리코는 지켜보고 있다가 적의 기병이 돌진해오자 이를 막도록 로마군 기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루스, 우측으로. 가이나스, 좌측을 맡아.”
“예!”
“알겠습니다.”
사루스는 눈빛을 번득이며 알라리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가이나스와 사루스라니.’
알라리크는 달려오는 양쪽의 기병대장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고트족으로 서고트족을 공격하게 하다니 로마인다운 전술이었다.
기병과 기병의 싸움에서도 서고트족의 기병 숫자가 많아서 초반에는 서고트족이 우위를 잡는 듯 했다. 로마군 기병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그런데 로마군 기병대는 조금씩 얇고 길게 열을 쭉 펼치더니 빙 돌아서 서고트족 기병을 둘러쌌다.
“옆을 내주지 마!”
알라리크는 소리지르면서 직접 칼을 빼들고 적의 기병대를 맞아 싸우러 나갔다. 로마군 기병이 서고트족 기병을 포위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그는 끝 쪽으로 말아들어오는 로마군 기병의 칼을 쳐내고 찔렀다. 기병은 칼끝을 피해 재빨리 말을 뒤로 물리더니 옆의 로마군 기병과 열을 맞춰서 3명이 한꺼번에 전진해왔다. 알라리크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둘러싸고 압박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적의 움직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군의 움직임을 보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진로를 방해했다.
반면에 서고트족 기병은 자기들끼리 움직임에 치여서 꼼짝을 못했다. 숫자를 늘리는 데 급급해서 숙련도가 떨어지는 자를 기병으로 배치했는데, 보병에게는 강하겠지만 적의 기병을 상대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말을 탈 줄 안다 해도 그 위에서 무기를 휘둘러 적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것은 또 다른 훈련이 필요했다. 서고트족의 칼은 번번이 허공만 휘저었다. 방어에도 취약해서 로마군이 세게 부딪쳐오기만 해도 중심을 잃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서고트족 기병대가 뒤로 밀려나고 로마군 기병이 서고트족 보병의 후방으로 들어갔다.
“밀리지 마!”
알라리크는 전투가 점점 기울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고트족 기병이 적의 기병대를 밀어내야 승산이 있는데, 반대로 더 숫자가 적은 로마군 기병이 서고트족 기병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등쪽에서 공격받을 것이 불안해진 서고트족 보병은 전방의 공격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 빈틈을 로마군은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쓸데없이 칼을 마구 휘둘러서 힘을 빼지 않았다. 정확하게 빈틈을 노려서 딱 한 번 휘둘러서 상대를 쓰러뜨렸다. 잠시만 다른 곳을 쳐다보면 목에 칼이 들어왔다.
“윽!”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미 땅에는 쓰러져 죽어 있는 서고트족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로마군 보병이 좌우로 갈라져서 장창병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었다. 장창병은 서고트족군의 한가운데를 돌파하면서 좌우로 갈라놓았다. 뒤따라온 로마군 보병이 갈라진 그들 각각을 양쪽으로 포위했다.
“둘러싸였어!”
서고트족은 등뒤에 로마군이 보이자 겁을 먹었다. 공포에 질린 몇 명이 대열을 이탈해서 도망치자, 전열이 갑자기 우르르 무너졌다. 이 상태로는 싸워 봤자였다.
알라리크는 얼마 안 남은 기병대에게 로마군의 추격을 막으라고 지시하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라!”
서고트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기를 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아타울프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지만, 로마군은 노련했다. 그 작은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의 차이를 벌려나갔다.
서고트족들은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아났다. 기병대가 그들을 쫒아왔다. 이제 살아남는 것은 각자의 운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허파가 터지도록 숲까지 달려서 도망치는 방법뿐이었다.
알라리크는 그의 뒤를 쫓아 달려오는 말발굽소리를 들었다. 그가 돌아보자, 로마 기병의 갑옷을 입은 사루스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알라리크! 어디를 도망가느냐!”
사루스가 이를 갈며 그를 도발했다. 알라리크는 도망치다 말고 말머리를 홱 돌렸다. 사루스의 칼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새 로마군이 되었나?”
알라리크는 칼을 휘둘러 지나쳐간 그의 등에 휘둘렀다. 붉은 망토가 칼에 싹둑 잘려 반쪽이 되었다.
사루스는 방향을 돌려 알라리크에게 칼을 내리쳤다. 알라리크는 그의 칼을 받아치고 옆구리를 찔렀다. 투박한 소리와 함께 갑옷이 찌그러졌다. 칼은 거의 갑옷 안으로 파고 들었지만, 그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동시에 알라리크의 칼이 이가 나가버렸다. 로마군 기병대장인 사루스가 사용하는 칼과 갑옷은 로마 최고의 대장장이가 수십 번 담금질해서 만든 최고급 수준의 갑옷일 테니 알라리크의 칼이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가 나간 칼로는 깊은 찌르기나 베기는 무리였다.
“새 옷을 망쳐서 안됐군.”
알라리크는 사루스의 약을 올리며 머리를 공격했다. 사루스는 황급히 칼을 들어서 막았다. 팽팽히 머리 위에 들어올려진 칼이 맞부딪치며 뒤로 밀리지 않으려는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사루스는 힘에 부쳐서 뒤로 조금씩 밀려나갔다.
“악!”
사루스는 소리지르며 있는 힘을 다 해서 알라리크를 밀어냈다. 그런데 알라리크는 갑자기 힘을 빼더니 뒤로 물러섰다. 사루스는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사루스는 무거운 갑옷 때문에 끙끙거리며 진흙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알라리크가 말에서 내려서 그에게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가이나스가 사루스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왔다.
“멈춰!”
가이나스는 칼을 들고 알라리크에 덤벼들었다. 그의 뒤에는 서너 기의 기병들이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얼른 말에 올라타서 달아났다.
“거기 서! 비겁한 녀석!”
사루스는 소리를 지르며 알라리크를 쫒아갔다. 숲으로 막 따라 들어가려는 찰나에, 로마군의 퇴각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가이나스가 숲으로 들어가려는 사루스를 말렸다.
“본대로 귀환해. 명령에 따라.”
사루스는 입안의 진흙을 퉤 뱉으며 돌아섰다.
무사히 숲으로 뛰어들어온 로데리크는 나무를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몸서리를 쳤다. 태어나서 이렇게 죽어라 달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방에서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스틸리코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한 로마군은 저들이 먼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다. 그런데 스틸리코가 이끄는 로마군은 그들을 고양이새끼 대하듯이 하찮게 쳐다보면서 다가왔다.
“그러게. 전혀 겁을 먹지 않던데.”
비터리크도 숨을 못 쉬어서 얼굴이 하얘져서 띄엄띄엄 말했다.
“몇 명이나 돌아왔지?”
숲으로 들어온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피해상황을 살펴보았다.
“7천명입니다.”
1만명이었던 서고트족 병사들은 7천명밖에 남지 않았다. 3천명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에 비해 로마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몇 달 동안 로마와 싸워서 처음으로 호되게 당한 전투였다. 지금까지 그들이 싸워왔던 로마군은 로마군이 아니라 다른 군대인 것 같았다. 서고트족은 혼쭐이 나서 모두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로마 정규군단은 역시 대단해.’
알라리크는 입술을 깨물며 쓰라린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 갑옷을 제대로 갖추고 기병숫자를 늘린 부대편성으로 맞붙으면, 숫자와 체력에서 우위를 점하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똑같은 전술이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작전이랄 것도 딱히 없이 평야에서 벌어진 평범한 회전이었고, 양측에 기병을 활용하는 작전도, 무기도, 병사 숫자도 엇비슷했다. 오히려 무기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서고트족이 약간씩 우세했다. 그런데, 사소한 차이가 점점 벌어지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일시에 무너져서 패배했다. 힘으로라면 로마군에 밀릴 것이 없는데도 이렇게 밀린 것을 보면 조직력과 훈련의 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로마군은 숲으로는 쫒아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길목을 모두 막고 포위하고 있어서 숲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산속에서 굶어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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