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알레만니족 족장과의 만남은 그 다음날 이루어졌다. 알레만니족의 혈기왕성한 젊은 족장은 거친 말투로 항의했다.
“로마는 쥐꼬리만큼 곡식을 주면서 우리가 피땀 흘려 얻은 모피와 은을 가져가고 있소. 이런 불공정한 거래는 계속할 수 없소.”
스틸리코는 그들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진짜로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휘하에 있는 알레만니족 장교와 병사들을 대동하고 그들을 만나러 갔다.
알레만니족에는 쓸 만한 기병 전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농사를 짓기보다는 로마군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로마군에 들어가면 합법적으로 로마 영내에 들어가서 살 수 있다. 저들의 주된 관심사는 돈이나 땅이 아니라 로마군이 되는 것이었다.
족장이 떠들도록 내버려두고 그의 뒤에 서있는 알레만니족 병사들 가운데 누가 쓸 만한지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들도 스틸리코와 로마군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의 동족들을 부러운 듯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최첨단 장검을 착용하고 투구부터 군화까지 로마산으로 감싼 그들의 모습과 벌거숭이에 짐승 가죽을 걸친 자신들의 모습이 비교가 될 것이다.
족장이 실컷 혼자서 떠들도록 놔둔 스틸리코는 그가 말한 요구사항을 모두 무시하고 말했다.
“알레만니족은 로마군과 그동안 잘 지내왔소. 용감한 알레만니족 전사는 로마의 동맹이 되어 용병으로 함께 싸워왔소. 오랜 신뢰를 경솔하게 깨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한번 깨진 신뢰는 금이 간 항아리처럼 붙여도 자국이 남으니 말이오.”
스틸리코의 말에 알레만니족은 분노하는 게 아니라 머뭇거리는 눈빛이었다. 이 전쟁이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요구사항이 하나도 남김없이 관철될 때까지 로마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알레만니족 족장은 허세를 부리며 목청을 높였다.
“대화가 아니라 무력을 앞세운다면, 알레만니족의 어떤 요구조건도 들어줄 수 없소. 알레만니족이 로마를 적대하겠다면 로마도 그렇게 하겠소. 어디 알레만니족의 실력이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전장에서 봅시다. 알프스의 길이 녹을 때까지 시간은 많소.”
여유있는 스틸리코의 태도에 벙 찐 알레만니족 족장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알프스의 길이 녹지 않으면 안 돌아갈 거요?”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요. 한겨울에 알프스를 무슨 수로 넘는단 말이오.”
“하지만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로 진격하고 있소.”
“서고트족은 이탈리아의 수비군에게 처리하도록 지시해놓고 왔소.”
스틸리코는 뒤돌아 가다 말고 멈춰 서서 덧붙였다.
“설마 내가 곧 돌아갈 거라던 알라리크의 말을 믿은 거요? 그는 나를 당신들에게 떠넘겨놓고 편하게 이탈리아를 공략하려고 한 거요. 당신들은 그 자에게 한방 먹은 거요.”
알레만니족의 얼굴이 모두 썩은 표정이 되었다. 스틸리코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낭패였고, 알라리크가 자신들을 이용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봄까지 스틸리코의 공격을 막으며 버텨내야 하다니. 잠자는 사자에게 돌을 던져서 깨운 셈이다.
스틸리코는 진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알레만니 족 마을의 위치는 아직도 그곳인가?”
“그렇습니다.”
스틸리코는 그 길로 기병대를 이끌고 알레만니족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미 늦은 오후로 접어들어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이런 시간대에는 보초병도 방심하곤 했다. 회담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가자마자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할 것이다.
계곡 사이에 통나무집과 천막이 줄지어 있었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책과 해자로 둘러쳐 놓았지만, 말을 타고 뛰어넘으면 돌파할 수 있는 높이였다.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알레만니족은 마구간에 말을 집어넣고 저녁을 먹으러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식사 준비를 위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말부터 흩어 놔.”
스틸리코는 기병대장에게 지시했다.
“돌격!”
기병대는 일제히 마을로 달려갔다. 집과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서 마굿간에 도착했다. 칼로 말을 묶은 줄을 끊고 엉덩이를 채찍으로 철썩 때려서 쫒아버렸다. 말들은 히힝거리며 목책을 뛰어 넘어 숲속으로 사라졌다.
“기습이다!”
알레만니족은 금방 회담에서 돌아와서 이렇게 빨리 로마의 기병대가 공격해 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허둥지둥 무기를 잡고 말 위에 오르기 위해서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마구간은 텅 비어있었다.
눈에 띄는 알레만니족 남자들을 쫒아가서 칼로 베었다. 말이 없이는 기병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여자들은 아이 이름을 부르며 안고 도망쳤다. 습격을 하면 보통 천막을 불태우니 집안으로 숨으면 안 되고 숲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덤불에서 메추리 떼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알레만니족 병사들은 한 곳에 모여서 반격을 시도했다. 돌아다니는 말을 아무거나 잡아타고 말 위에 올라 족장의 주위로 모였다.
알레만니족이 방어태세를 갖추자 스틸리코는 퇴각을 명령했다. 기병들은 통나무집과 천막에 불을 놓고 퇴각했다. 알레만니족은 집을 집어삼키는 불을 끄느라고 그들을 뒤쫓아 오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작스런 공격과 패배에 알레만니족은 머리가 없어진 것처럼 정신이 멍 했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로마군이 바람처럼 마을을 통과해 지나가자, 순식간에 자신들의 집이 불타고 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로마군은 전원이 피해 없이 무사히 빠져나갔다. 반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길을 모두 잡을 수 있었다. 알레만니족은 매캐한 잿더미와 검게 그을린 통나무집 속에서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는지 뒤적거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스틸리코와 평화협정을 맺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수시로 반복될 거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스틸리코가 라에티아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아퀼레이아를 떠나서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에 있는 호노리우스 황제를 사로잡고 협박하면 천하의 스틸리코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서고트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땅을 얻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아디게강, 민키우스강, 오글리오강, 아두아강을 건너야 했다. 겨울에는 물이 별로 없지만, 봄이 다가오면 알프스의 눈이 녹아서 갑자기 물이 불어났다.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건너가야 했다.
아퀼레이아에서 밀라노는 말을 타고가면 사나흘이면 갈 거리였다. 그러나, 서고트족은 짐이 실린 수레와 아녀자들과 함께 걸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빨리 가도 보름은 잡아야 했다. 게다가 중간 중간 약탈도 하고 이래저래 늦어지면 2월에나 밀라노에 도착할 것이다.
“서둘러. 밀라노를 포위하고 황제만 잡으면 돼.”
황제를 잡자는 알라리크의 말에 서고트족은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프리티게른이 발렌스 황제를 잡아서 길이길이 이름을 남긴 것처럼, 그들도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로마제국의 황제를 잡았노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역사를 쓰는 것이다.
서고트족이 가장 먼저 마주친 강은 아디게 강이었다. 베로나 관통해서 흐르는 아디게강은 꽤 넓고 큰 강이었다. 겨울이라서 얼어 있었기 때문에 건너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강 반대편에 매복이 있는지 잘 살피며 건너야 했다.
“매복은 없습니다.”
말을 타고 정찰을 하고 돌아온 아타울프가 말했다. 서로마에서도 로마군의 저항은 없었다. 이탈리아를 지키는 로마군은 전부 황제가 있는 밀라노와 원로원이 있는 로마 주변만 지키고 있을 것이다. 동로마를 공격할 때도 그랬지만, 서로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워할 것은 오직 스틸리코 뿐이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에게 강을 건너도록 손짓을 했다. 수천 대의 수레가 얼어붙은 강 가운데로 들어섰다. 얼어있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얼음위에 올라가면 깨질 수도 있었다. 다리로 건너는 것이 안전했지만, 좁은 다리를 수만 명이 건너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다행히 한겨울이라서 두껍게 얼은 얼음은 그들의 무게를 버텨냈다.
“여기는 얼음이 얇은 것 같아.”
로데리크는 조심조심 얼음을 두들겨가며 건넜다.
멀리 베로나 성 위에 선 로마군이 서고트족이 강을 건너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베로나 성 안의 군사들이 나와서 강을 건너느라 무방비상태인 서고트족을 공격하면 적은 숫자로도 제법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텐데, 그런 시도를 하는 용감한 로마군은 없었다.
“우릴 계속 쳐다보는데 인사라도 할까?”
비터리크는 농담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수레에 든 전리품을 자랑하듯이 집어서 보여주었다.
그들이 두 번 째로 마주친 민키우스 강은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이었다. 이동하는 사이에 날이 좀 풀려서 얼음이 얇아졌지만, 얼음이 깨진다고 해서 물살에 휩쓸려갈 정도의 넓고 깊은 강은 아니었다.
“안전하게 다리로 건너는 편이 낫겠지?”
로데리크의 말에 비터리크가 툴툴거렸다.
“언제 기다리고 서있어. 빨리 얼음 위로 건너가서 쉬자.”
“불안한데.”
“다들 건너잖아.”
비터리크가 손으로 얼음 위를 건너가는 수레와 사람의 행렬을 가리켰다.
로데리크는 얼음이 수레의 무게를 견딜지 염려스러웠다. 로데리크가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수레를 끌고 비터리크가 수레를 밀면서 얼음 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얼음이 많이 녹았어.”
물기를 머금은 얼음은 더욱 미끄러웠다. 은쟁반처럼 매끄러운 얼음은 그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지며 한쪽 바퀴가 푹 가라앉았다.
“조심해!”
자신들이 딛고 선 발밑의 얼음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들이 딛고 있는 곳은 안전했다.
“들어, 들어.”
무거운 수레바퀴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힘껏 들어 올려서 얼음 위에 얹었다.
곡식, 갑옷, 무기, 금화 등 무게가 나가는 것들이 잔뜩 들어있어서 팔이 빠질 정도로 무거웠다. 전 재산이니까 들고 다니지, 가끔 바퀴가 진창에 처박히면 내팽개치고 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냥 일리리쿰에 남아서 집에서 따듯한 난로가에서 뜨끈한 죽이나 끓여먹고 있을 껄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나이가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직 기운이 있는 지금이 모험을 할 때였다.
며칠이 지나서 오글리오 강에 도착했다. 개울처럼 얕은 강이었다. 이제는 날이 제법 풀려서 얼음이 군데군데 녹아 있었다. 얼음 위로 올라서면 깨져버릴 것이다. 그냥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걸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로데리크는 강물에 손을 넣어 보았다. 차가운 물에 얼어버릴 것 같았다.
“이번에는 줄서서 기다렸다 다리 위로 건너자.”
“강 폭이 요만큼밖에 안되는데 몇 시간을 줄서서 기다리자고?”
비터리크는 물이 차더라도 빨리 건너면 춥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얼른 건너서 불 피우고 몸을 녹이는 게 낫지.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서있느니.”
“그건 그렇다.”
강물에 들어서자 차가운 물이 그들의 발목과 허리를 감쌌다. 몸이 얼얼하고 감각이 없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후다닥 강을 건너왔다.
“이런 다 젖었네.”
물에 적시지 않으려고 따로 등에 짊어진 곡식이었는데, 그래도 물에 닿았는지 젖어버렸다.
“빨리 불 피워.”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불을 피웠다. 너무 추워서 머리가 띵했다. 모피를 두르고 몸을 녹였다. 온기가 좀 돌아오는 듯 했다. 물에 젖은 갑옷과 소지품이 녹슬거나 썩지 않도록 불가에 말렸다.
“이제 강 하나만 더 건너면 된다고 했지?”
얼어붙은 입을 이리저리 풀며 말했다. 날씨가 아예 추울 때 딱딱하게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지, 날이 따듯할 때 물속으로 건너던지 둘 중 하나면 좋을 텐데, 막 얼음이 녹을 때 차가운 물 속을 건너려니 죽을 맛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날씨에도 물속에서 놀았잖아.”
비터리크가 말했다. 그들이 서고트족 거주지역에 살 때에는 한 겨울에 먹을 게 없으면 얼음을 깨고 도나우 강 물속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곤 했다. 그때도 추웠지만 피부만 추웠지 이렇게 뼛속까지 오한이 들게 춥지는 않았다.
“그땐 어떻게 그랬지?”
어릴 적이라 추운 걸 몰라서 그랬는지, 그때는 먹을 것이 절실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지금은 로마인처럼 편하고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 견딜 수 없게 추웠다.
- 작가의말
skysword09님
후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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