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우스 황제
루피누스는 동로마제국을 손에 넣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딸을 아르카다우스 황제와 결혼시키서 동로마제국의 황후로 만들려 했다. 황제의 장인이 되면 스틸리코라 해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딸이 황후가 되면 젊은 아르카디우스 황제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르카디우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례식을 마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딸과 결혼하라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황궁으로 그녀를 불러들여서 황제에게 소개하고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제 딸입니다. 심심하실 때 말벗을 해드리라고 불렀습니다.”
황자 시절부터 그를 가르친 선생님들과 루피누스가 붙여놓은 감시자들이 그가 여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니 딸을 붙여놓기만 하면 아르카디우스가 그녀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루피누스의 눈에는 예쁜 딸이었지만, 황제는 그를 닮은 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같이 산책도 하시고 이야기도 나누시지요.”
루피누스는 은근히 둘이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만들었지만, 황제는 그의 딸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루피누스의 딸을 귀찮아했고, 만나도 별로 대화도 하지 않았다. 뻔히 속이 보이는 압력에 황제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피곤한데 이만 쉬고 싶소. 물러가시오.”
황제는 마지못해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훌쩍 자리를 뜨곤 했다.
루피누스는 초조했다. 그는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의 딸이 황후가 될 거라고 소문을 내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황제에게 그의 딸을 황후로 맞도록 권하게 했다.
업무차 황제를 만날 때마다 어서 황후를 맞아야 한다고 압박했다.
“제국에는 황후가 있어야 하고 황자가 있어야 나라가 안정됩니다.”
아르카디우스는 그의 딸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로마의 실권자인 루피누스의 말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아직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결혼식은 너무 이른 것 같소. 나중에 합시다.”
아르카디우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용기가 없었고, 그렇다고 루피누스와 척을 지고 싶지도 않았다. 끈기가 없는 그는 골치 아픈 논쟁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새 황제를 이용해서 권력을 노리는 사람은 루피누스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동로마 황궁의 환관 가운데 에우트로피우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지만,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아르카디우스가 어려서부터 그의 침실 관리와 교육을 맡고 있었다.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시중들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르카디우스가 황제가 되자, 그는 드디어 자신이 뜻을 펼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는 루피누스의 반대파 중에서 황후가 될 만한 처자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띈 여인이 있었다.
프랑크족 장군의 딸인 에우독시아였다. 커다란 푸른 눈에 고혹적인 입술을 가진 처녀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자 프로모투스가 거둬서 키워주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집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에우독시아는 미모가 빼어나고 사람을 사로잡는 말재주와 매력도 있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녀라면 황제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게다가 아버지가 전사했으니 외척 세력도 없고, 루피누스에게 죽은 프로모투스의 집안에서 자라서 루피누스와 손을 잡을 일도 없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녀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황후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에우독시아는 루피누스의 딸이 황후가 될 거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루피누스가 반대하는데 어떻게 저를 황후로 만드실 거예요?”
에우트로피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다 방법이 있지. 황후가 되면 내 은혜를 잊지 말고 내 편이 되어주겠니?”
에우독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인 자신이 황후가 된다면 그녀에게도 세력이 필요했다. 에우트로피우스와 같이 영향력이 있는 환관을 자신의 편으로 두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당연하죠. 은혜를 잊지 않을 께요.”
에우트로피우스는 화가에게 에우독시아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는 루피누스 몰래 에우독시아의 초상화를 황궁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젊은 황제에게 보여주었다.
“이 여인은 누구지?”
황제는 장밋빛 뺨의 관능적인 에우독시아의 그림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했다.
“에우독시아라고 합니다. 착하고 성품도 나무랄 데 없지요.”
에우트로피우스는 황제에게 그녀의 품성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황제는 그림만 보고 그녀에 대한 환상을 키워나갔다. 어쩌면 루피누스가 자신의 딸을 강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발심에 더 에우독시아에게 빠져들었는지도 몰랐다.
“에우독시아를 만나보고 싶어.”
그러나 황제가 그녀를 만나러 갔다가는 당장 루피누스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루피누스가 알면 그녀를 해칠지도 모릅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에우트로피우스는 두 사람 사이에 편지를 전달했다. 황제는 그녀의 편지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첫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들은 루피누스의 눈을 피해서 사랑을 속삭였다.
루피누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황제에게 계속 결혼식 날짜를 잡으라고 닦달했다. 황제는 에우트로피우스에게 한탄했다.
“루피누스의 딸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하고 싶어.”
에우트로피우스는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이해한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황제께서 선택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제가 듣기에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그렇지? 난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와 결혼할 거야. 루피누스에게 딸과 결혼 안하겠다고 말할 거야.”
에우트로피우스는 황제를 말렸다.
“루피누스에게 미리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
에우트로피우스는 미소 지으며 황제의 귀에 속삭였다.
“그냥 결혼식을 거행하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황제는 에우트로피우스의 말대로 루피누스에게 결혼식 날짜를 잡으라고 명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루 빨리 황후를 맞으시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루피누스는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마음도 모르고 만족해하며 결혼식을 최대한 호화롭게 준비했다. 딸에게도 황궁에 갈 채비를 하고 몸단장을 하고 기다리도록 했다.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루피누스는 황제의 행렬이 딸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황궁을 출발한 행렬은 시간이 가도 도착하지 않았다. 분명히 황궁의 문을 나서서 시종들과 환관들이 신부에게 씌울 왕관과 보석이 박힌 옷을 들고 출발했다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가? 어디쯤 왔어?”
기다리다 못한 그가 하인을 보내서 알아보았다. 그런데, 하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황제가 이미 황후를 맞아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답니다.”
루피누스는 부들부들 떨며 홱 돌아섰다.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누구를 황후로 맞아?”
감히 누가 목숨을 걸고 황제의 권력을 능가하는 그의 뒷통수를 쳤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에우독시아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누군가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루피누스는 눈에 불이 나서 황궁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는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틀림없었다.
황제의 결혼식 행렬을 이끌던 에우트로피우스는 루피누스의 집으로 가지 않고 프로모투스의 집으로 가서 에우독시아를 황궁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가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황제와 주교가 기다리고 있다가 서둘러 결혼식을 거행했다.
루피누스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결혼식이 끝나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꽃다발과 향초를 치우는 시종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냐?”
“황후마마와 함께 침실로 가셨습니다.”
루피누스는 황제의 침실로 갔다. 황제의 침실 앞에는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지키고 서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고 싶소.”
루피누스는 분에 못이겨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를 막아섰다.
“황제께서는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루피누스는 그를 멱살을 잡고 죽여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내 뒤통수를 치고 무사할 줄 아느냐?”
“저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황제께서 에우독시아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황제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루피누스에 의해서 감시되고 있었다. 황제가 여자를 만나는 것은 누군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루피누스는 그의 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이미 결혼식은 끝났다. 자신의 딸을 만날 때마다 어색해하고 지루해하던 황제의 표정을 생각하면 황제의 생각도 물어보나 마나였다.
생각지도 못한 자에게 한 방 먹은 루피누스는 이를 악물고 물러갔다.
“두고 보자. 감히 환관 따위가 내 앞길을 막아? 가만두지 않겠다.”
루피누스는 황제와 에우트로피우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가 그렇게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그동안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어서 물어뜯기 시작할 것이다.
그가 반역자로 몰아서 학살한 시민 7천명의 가족뿐 아니라, 그가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 반역죄와 뇌물죄 등 온갖 누명과 죄목을 씌워서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한 사람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한 마음으로 그를 죽이기 위해서 나설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황제가 그에게 권력을 나눠줄 뜻이 없다면, 그도 최후의 방법이 있었다.
“그까짓 황제, 내가 못할 줄 아느냐.”
루피누스는 광기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르카디우스를 몰아내고 자신이 동로마 황제가 되면 그만이었다. 그가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적어도 동로마에서는 그는 갓 황제가 된 아르카디우스보다 권력이 강했다. 관료, 법조계, 원로원, 황궁 곳곳에 그의 하수인을 심어 놓았다.
문제는 군부였다. 아르카디우스를 죽이면 스틸리코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황제를 죽이기 전에 알라리크와 스틸리코가 싸우게 해서 스틸리코의 기세를 꺾어놓아야 했다.
아르카디우스는 루피누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혼의 단꿈에 흠뻑 빠져 있었다. 매혹적인 에우독시아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뭘 갖고 싶어?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황제가 묻자 황후가 답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우리 사랑을 이뤄줬으니 보답하고 싶어요.”
“당연히 큰 상을 내려야지.”
황후가 황제의 사랑을 받으면서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의 권력도 점점 커졌다. 황제의 옆에서 밀착하며 보좌하는 환관인 만큼 아무리 루피누스라 해도 그를 견제하기는 어려웠다.
루피누스는 에우트로피우스를 제거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알라리크에게 어서 동로마제국을 공격하라고 사람을 보내서 채근했다.
알라리크도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당장 출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전에 그 역시 내부의 적과의 싸움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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