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위하여
“스틸리코 장군이 죽었대.”
병영으로 달려온 병사가 소리쳤다. 로데리크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에게 스틸리코는 결코 죽을 수 없는 불사신과 같은 존재였다.
“설마. 잘못 들은 거 아냐?”
“장교들이 반역죄로 잡혀갔어. 황궁에서 보낸 자들이 우리 부대에 체포영장을 들고 왔어.”
병사들도 믿을 수 없는 듯이 말없이 서성거리며 다른 소식을 기다렸다.
불길한 조짐은 몇 달 전부터 있었다. 스틸리코에 대한 여론이 갈수록 나빠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몇 번이나 로마를 위기에서 구한 장군을 의심만으로 죽일 거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며칠 전 파비아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스틸리코 파의 관료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도 황제는 폭동 관련자를 처벌하거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스틸리코가 이번에도 고난을 헤쳐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위기를 돌파했다. 그를 위해서 칼을 뽑고 황제에게 들이댈 병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른 병사가 울먹거리며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라벤나에서 온 사람이 사령관님의 처형이 집행되는 걸 직접 봤대.”
그제야 병사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울분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황궁 놈들, 미친 거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사방에서 흑흑거리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로데리크는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피가 멈춘 것 같았다. 무적이라고 생각했던 스틸리코가 죽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훈련이 고되긴 했지만, 스틸리코의 밑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동료들과 마음 맞춰서 로마군에 적응해서 살던 차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스틸리코와 10년 넘게 사선을 넘나들며 싸웠던 고참병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화를 냈다.
“스틸리코 장군이 반역자라니. 지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로마시민들이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동안, 스틸리코는 국경에서 뜨거운 여름이나, 살을 에는 추위의 겨울이나, 병사들과 함께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아온 병사들은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관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왜 말리지 않았대?”
“왜 안 말렸겠어. 며칠을 설득했는데도 사령관님이 듣지 않으셨대.”
소식을 가져온 병사도 우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병사들 가운데 로마인은 얼마 없고 거의 다 야만족이거나 이민족이거나 해방 노예들이었다. 로마인과 차별하지 않는 스틸리코의 공평하고 따듯한 대우에 은혜를 입었던 자들이었다.
“사령관님을 살려내.”
병사들은 엉엉 울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을 치고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다 같은 마음이었다.
로데리크는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을 훔쳤다. 스틸리코 때문에 울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이탈리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딛고 선 땅이 갑자기 무너지고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난 절대 호노리우스 황제를 위해서 싸우지 않을 거야.”
한 병사가 내뱉자 다른 병사도 소리쳤다.
“나도 절대 안 해. 죽어도 싫어.”
야만족 포로와 노예로 로마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가 명예로운 로마군이 된 것은 스틸리코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스틸리코는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은인이었다. 황제와 로마에 정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차라리 군대를 나갈래.”
“나도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
병사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벗어나려 했다. 그렇지만, 마땅히 대안이 없었다. 당장 군대를 나가서 무엇을 하고 살지 막막했다. 한참을 울면서 생각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로데리크는 눈물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했다.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야만족이 가장 무서워하는 스틸리코를 로마인들 스스로 죽였을까.
스틸리코만 아니었다면 그는 로마에 포로로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며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알라리크를 따라서 로마제국 전역을 활개치고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알라리크.
머리에 떠오른 이름에 그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다시 알라리크에게로 갈 수 있다면. 이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서고트족 동료를 잡고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고트어로 말했다.
“야, 우리 알라리크한테 가자.”
그는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서 로데리크를 보았다.
“뭐? 알라리크한테?”
“그래. 알라리크는 우리를 받아줄 거야.”
알라리크의 군대로 들어간다면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열릴 것이다.
“우리는 서고트족이니까 받아줄 거야.”
“그러네.”
슬퍼하던 동료의 얼굴이 한결 펴졌다. 그도 알라리크의 밑에서 싸웠던 때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가자.”
서고트족 병사들이 너도나도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나도 갈래. 우리가 뭐 하러 황제를 위해서 싸워? 알라리크한테 가자.”
그들이 갈 방법을 논의하자, 옆에 있던 동고트족 병사가 고트어를 알아듣고 와서 물었다.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돼?”
로데리크가 대답했다.
“예전에 가이나스의 부하들이 찾아왔을 때도 알라리크가 받아줬어. 너도 받아줄 거야.”
동고트족이 합류하자 다른 야만족 병사가 다가왔다.
“야, 너희들끼리 무슨 말 해? 나도 알려줘.”
그에게 귓속말을 하자 그도 대번에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나도 갈래.”
다른 야만족 병사들도 그들에게 붙었다. 해방 노예 병사도 그에게 걸어왔다.
“왜? 뭔데?”
삽시간에 말이 퍼져나갔다.
“그러지 말고 다 같이 가자.”
병사들이 우르르 로데리크를 둘러쌌다.
로데리크는 몰래 탈영해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일이 커졌다. 그렇지만 그들의 절망스러운 심정을 알기에 놔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래. 스틸리코와 알라리크가 비밀동맹을 맺었었으니까 모두 받아줄 거야.”
어쩔 줄 모르고 비탄에 젖어있던 병사들은 벌떡 일어났다.
“알라리크에게 스틸리코의 복수를 해달라고 하자.”
“그래. 황제 따위 없애버리자고 해.”
스틸리코에게 은혜를 입은 포로와 노예병들은 흥분해서 순식간에 반대쪽 대열에 섰다.
어느새 소문이 퍼져서 옆의 부대도 잇달아 가겠다는 사람들이 나섰다. 스틸리코파의 장교들이 체포되어 군기가 느슨해진 상태라서 막는 자도 없었다. 로데리크는 알라리크에게 가겠다고 나선 병사들과 함께 부대를 이탈해서 무작정 그가 있다는 에모나로 출발했다.
서고트족은 여전히 에모나에 진을 치고 로마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리며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전령이 전했다.
“황제가 스틸리코를 사형에 처했답니다.”
순간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타울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스틸리코가 죽었단 말이냐?”
“지지자들이 그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교회에서 스스로 나와서 사형 집행인 앞에 섰답니다.”
알라리크는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가슴이 싸했다. 자신이 수없이 공격해도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스틸리코였다. 그런 그를 무능한 황제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을까.
“허, 이것 참. 황제가 드디어 미쳤나봅니다.”
아타울프는 머리를 긁적이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알라리크를 보았다. 미치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황제를 철통같이 보호해준 그를 자신의 손으로 처형할 리가 없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였다.
알라리크의 마음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십년 넘게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이 사라졌으니 기뻐해야 했지만, 왜 이렇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스틸리코도 호노리우스도 모두 두들겨 패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들은 서고트족에게는 관심도 없고 자기들밖에 모르는 로마인들이었다. 아니, 로마제국이 어떻게 될지도 관심이 없는지도 몰랐다.
스틸리코는 그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려주었는데, 자신은 결국 스틸리코를 파멸시킨 셈이었다. 그를 이기고 싶어서 그렇게 아둥바둥할 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는데, 그에게 협력하려고 마음먹자 로마인들이 그를 죽였다.
분노가 지나가자 다음에는 허무감에 휩싸였다. 스틸리코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가 넘어서야 할 목표였다. 그런데 목표가 사라지니 공황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난 뭘 한 거지.’
자신이 그토록 극복하고 이겨내려던 대상이 무의미하게 쉽게 사라졌다. 분노, 후회, 슬픔, 허탈, 어떤 감정으로도 그의 기분을 말할 수 없었다.
서고트족의 땅을 마련할 길을 이제야 제대로 찾았다 싶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로마황실은 더욱 야만족을 배척하며 강경하게 나올 것이다. 그로서도 협상으로 쉽게 땅을 얻어내기는 어려워진 셈이었다. 다시 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탈리아로 진군해야 할까.’
전에도 이탈리아에서 로마군과 싸워봤지만, 이탈리아를 지키는 정예병과 싸워 이기려면 지금의 숫자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럼 협상단을 파견해야 할까. 누구와 협상을 해야 하지?’
지금까지는 스틸리코와 협상하고 그의 뜻대로 움직였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직접 여러 사람을 접촉해서 협상해야 했다. 로마인중에 누가 믿고 협상할 만한 사람인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시작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며칠 째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며 꼼짝하지 않는 그에게 아타울프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뛰어 들어왔다.
“저기, 잠깐 나와 보십시오.”
“무슨 일이야?”
“스틸리코의 병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알라리크를 만나고 싶답니다.”
알라리크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앞에는 스틸리코 휘하의 야만족 병사들과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전쟁을 했던 로마군 병사들이 서 있었다. 무려 3만명이나 되는 병력이 로마군을 떠나서 그를 찾아왔다. 그들의 눈에는 황제에 대한 증오의 핏발이 서 있었다.
그들은 알라리크를 보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스틸리코 장군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알라리크는 대답없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거느린 스틸리코는 왜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을까. 그의 죽음이 그의 부하들과 로마인들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주게 될지 상상했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병사들은 알라리크가 과연 뭐라고 말을 할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받아줄까. 스틸리코의 복수를 해줄까.
알라리크는 먼 길을 걸어 자신을 찾아온 병사들에게 다가가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스틸리코는 내 친구였소. 로마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 스틸리코에게 감사하오. 그의 명복을 비오. 그가 천국에 갔을 거라고 믿소.”
병사들은 알라리크가 그들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느끼자 참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위로받을 곳이 없던 그들의 설움이 알라리크의 말에 복받쳤다.
“스틸리코는 로마제국을 지켜낸 위대한 장군이었소. 그는 수많은 이민족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역자들과 싸웠소. 전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용맹한 장수였지만, 전쟁이 끝나면 이민족과 로마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온화한 사람이었소.”
알라리크의 말에 병사들은 엄하지만 자비로운 아버지 같았던 스틸리코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알라리크의 눈시울도 점점 붉어졌다.
“서고트족인 나는 그와 수없이 싸웠소. 서로 알게 되고 나서 십년 간,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칼을 겨눴소. 나는 그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서 다른 세력과 연합해서 로마제국을 공격했소. 폴렌티아와 베로나에서 그는 나를 거의 죽일 뻔 했지만, 그러는 대신 내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소. 그는 분노와 증오보다는 용서와 사랑을 택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소.”
알라리크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흘러내린 눈물을 닦자, 병사들의 흐느낌소리는 통곡이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과거를 잊고 친구가 되었소. 로마제국과 서고트족이 함께 살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소. 나는 일리리쿰에서 로마를 지킬 군대를 양성했고, 그는 로마제국에 봉사하는 서고트족을 위해서 보상을 지급하려고 했소.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반대파의 위협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소. 스틸리코에게 감사하오. 그를 잊지 않을 것이오.”
서고트족 왕의 입장에서는 호적수인 스틸리코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마음껏 애통해할 수 있었다. 비로소 그를 짓누르던 자괴감이 차츰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황제는 스틸리코의 충성에 감사하기는커녕 그를 의심하고 살해했소. 원로원은 그의 헌신에 배신으로 화답했소. 나는 졸지에 좋은 조력자이자 친구를 잃었소. 황제와 원로원이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오.”
알라리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야만족 병사들은 저마다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이야기했다.
“로마인들이 우리집에 불을 질렀소.”
“평생 로마를 지키왔는데 야만족은 꺼지라면서 가족들을 때려서 쫒아냈소.”
“스틸리코와 무슨 관련이 있냐면서 나를 고문했소.”
올림피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살던 야만족을 박해해서 아예 몰아내려고 했다. 야만족 병사들의 가족들까지도 학살한 것이다. 알라리크는 가족을 잃은 병사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했다.
스틸리코를 죽인 것은 정적을 제거하려는 권력욕이나 두려움에 미쳐서 그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지금껏 로마제국의 편에서 그들을 대신해서 칼을 들고 싸워온 병사를 단지 야만족이라는 이유로 쫒아내는 것은 비열한 짓이었다.
오죽하면 병사들이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칼을 맞대고 싸우던 그를 찾아왔을까.
병사들은 저마다 분노하며 소리쳤다.
“내 가족의 복수를 하겠소!”
“호노리우스에게 죽음을!”
“로마를 불태우자!”
알라리크는 착찹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본능과 직관이 이끄는 길로 달려갈 것이다.
알라리크는 주먹을 쥐고 남쪽을 가리켰다.
“로마로 갈 것이오.”
서고트족과 스틸리코의 병사들이 하나가 되어 소리쳤다.
“로마로!”
“로마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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