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느
사루스는 알프스를 넘어서 갈리아 남부 비엔느 성 앞에 도착했다.
스틸리코의 예상대로 콘스탄티누스는 안전한 성에 틀어박혀 있고 부하들을 내보내서 싸우게 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서 사루스와 맞섰다. 사루스는 그들에게 큰소리쳤다.
“브리타니아의 촌뜨기 반역자들아! 분수를 알고 항복해라.”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그를 깔보며 대꾸했다.
“무식한 야만족아, 네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것 같은데, 호노리우스는 이미 민심을 잃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께서 호노리우스를 곧 거꾸러뜨릴 테니 목숨이 아까우면 우리 편에 서라. 우리에게 투항하면 황제께서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사루스는 한편으로는 그 제안이 솔깃했지만, 한줌밖에 안 되는 반란군이 스틸리코와 로마군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스틸리코의 지시대로 유스티니아누스를 유인하기 위해서 도발했다.
“콘스탄티누스 따위를 황제로 추대하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브리타니아 촌구석에 인물이 그렇게 없더냐? 하긴 네 어벙한 브리타니아 사투리만 들어봐도 니들 수준을 뻔히 알겠다.”
그의 발음을 흉내 내며 조롱하는 얄미운 사루스의 언행에 화가 잔뜩 난 유스티니아누스는 돌격명령을 내렸다. 사루스는 조금 싸우다가 병사를 뒤로 물리고 후퇴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을 뽑아들고 쫒아왔다.
“거기 서!”
갈리아에서 별다른 강적을 만나지 못한 그는 사루스를 얕잡아보고 덤볐다. 말을 달려 뺑소니를 치던 사루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이자 말머리를 돌렸다.
그제야 유스티니아누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양옆에서 기병이 일제히 그에게 덤벼들었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그를 노리고 기다리던 창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동시에 일격을 가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었다!”
사루스가 외치자, 반란군 잔당은 허겁지겁 비엔느 성으로 도망쳤다.
이제 스틸리코가 알려준 2단계 작전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는 사루스에게 콘스탄티누스를 성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는 나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들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주고 나서 그럴듯한 조건으로 협상을 하자고 해서 밖으로 불러내. 그리고 회담장에서 공격해서 없애버려.’
사루스는 평화협상을 하자고 비엔느 성으로 사신을 보냈다.
“이탈리아로 넘어오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갈리아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인정하겠소.”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서 패했으면서 더 큰 것을 요구했다.
“그것만으로는 평화조약을 맺을 수 없지. 히스파니아까지 나에게 넘기시오.”
사루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를 협상장에 불러내는 것이 목적이니 협상은 아무렇게나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서 조급하게 타결하려고 했다. 사루스는 협상장에 가면서 몰래 병사들에게 무기를 숨겨가도록 했다.
그들은 협상장에 마주 앉아서 협정서에 서명을 했다. 사루스는 일어나서 악수를 하자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상대가 손을 마주잡자, 왼손으로 가슴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서 그의 목을 찔렀다.
“억!”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공격하라!”
사루스의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서 휘둘렀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었다!”
사루스가 소리쳤지만, 의외로 적들은 당황하지 않고 물러서며 각자 무기를 꺼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한 장수가 앞으로 나오며 사루스를 노려보았다.
“내가 진짜 콘스탄티누스다.”
교활한 콘스탄티누스는 사루스가 거짓협상을 하려는 것을 알고, 자기 대신 부하인 네비가스테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서 대신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한 것이었다.
“호노리우스와 스틸리코의 대답도 듣지 않고 네가 무슨 권한으로 히스파니아를 넘기느냐? 어째 이상하다 했지.”
그는 사루스를 비웃고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쳤다.
“이런! 제길.”
사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야만족 출신이거나 라인강에서 복무하던 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브리타니아의 로마군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얼굴을 몰라서 협상 테이블에 가짜가 나온 줄도 모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시 비엔느 성으로 들어가서 틀어박혔다.
사루스는 비엔느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공성전을 해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7일간 포위를 하고 전투를 하던 그는 식량도 떨어지고 더 이상의 전투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콘스탄티누스는 없애지 못했지만, 2명의 적장을 죽였으니 이정도면 생색을 내기에는 충분한 전과였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알프스를 넘어다녀 본 경험이 없던 그는 무리해서 날이 저물도록 행군하다가 길을 잃었다. 산에서 헤매던 중에 다행히 양치기를 만나서 돈을 주고 길잡이로 삼아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사루스가 승전을 하고도 퇴각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더 의기양양해졌다. 전투에서 패했는데도 더욱 멀리까지 발을 뻗었다. 이탈리아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호노리우스와 스틸리코가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히스파니아 속주에도 호노리우스 대신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고 따르라고 사신을 보내서 명령했다.
히스파니아는 갈리아가 콘스탄티누스를 따르는 것을 보고는, 이내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인정했다. 갈리아가 저 지경이 되도록 내팽개쳐둔 호노리우스 황제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히스파니아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고향이었고, 여전히 그의 혈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 곳에 살던 호노리우스의 4명의 사촌이 히스파니아의 결정에 반발해서 호노리우스에 대한 신의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누스와 싸우기 위해 갈리아로 향했다. 갈리아와 히스파티아 사이의 통로인 피레네 산맥의 길목에 진을 치고 콘스탄티누스가 히스파니아로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야만족 병사를 5천명 정도 고용해서 그들을 공격했다. 5천명이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고, 피레네 산맥은 수비하기에도 좋은 지형이었지만, 호노리우스의 사촌들은 지금까지 전쟁이 없이 편안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싸움에 이골이 난 용병들에게 쉽게 제압당했다. 4명중에 2명은 붙잡혀서 처형되었고, 2명은 탈출해서 로마로 왔다.
호노리우스는 탈출한 사촌들을 만나서 다른 사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황제의 친척을 죽였단 말이냐!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해!”
더욱이 그들을 죽인 자는 야만족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신하였던 로마군 장수 콘스탄티누스였다. 호노리우스는 자신도 언제든 부하장수에게 배신당해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의심병은 가장 큰 힘을 가진 스틸리코에게로 향했다.
갈리아에 이어 히스파니아까지 콘스탄티누스의 손에 들어가자, 스틸리코는 사정이 급해졌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끊긴 서로마의 재정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아프리카나 다른 속주들도 점점 그에게 동조하게 될 것이었다. 자신들을 야만족들로부터 보호해주지 않고 세금만 뜯어 가는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이제는 만사 제쳐두고 총력을 기울여서 콘스탄티누스를 제거해야 했다.
자신이 직접 출정하면 콘스탄티누스를 제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만, 이탈리아를 떠나면 갈리아에 돌아다니는 야만족이 즉시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향할 것이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
사루스를 보내봤지만, 영악한 콘스탄티누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누구를 보내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마땅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약삭빠른 콘스탄티누스의 계책에 걸려들지 않을 정도로 지략이 뛰어나고, 그보다 우월한 병력을 동원할 수 있고, 갈리아 인들을 약탈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 로마화된 군대를 거느린 자.
‘알라리크을 보내야겠어.’
그가 콘스탄티누스를 무찌른다면 호노리우스와 로마에게 그의 충성심도 어필할 수 있고, 간 김에 서고트족으로 하여금 갈리아에 퍼져있는 야만족을 소탕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보면 갈리아는 자신을 위해서 야만족을 쫒아내 준 서고트족에게 호의적이 될 테고 그들이 갈리아에 머물러 살면서 지켜준다면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갈리아는 병력을 얻고, 서고트족은 정착할 땅을 얻을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다만 갈리아를 서고트족에게 맡기려면 알라리크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만약 갈리아로 간 서고트족이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의 편에 붙거나 그 곳의 야만족과 손을 잡고 이탈리아를 공격하면 낭패였다.
몇 년 전의 알라리크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이제는 알라리크가 변했다고 믿었다.
예전의 알라리크의 목표는 로마를 정벌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목표가 쉽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서로마와 전쟁을 치르면서 마을을 병력을 짓밟는다고 해서 자존심과 긍지가 높은 로마인의 정신과 마음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일리리쿰에서 생활해 보면서 발전된 로마의 문명을 쇠망시키는 것이 서고트족에게도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알라리크의 목표는 로마군의 손을 잡고 로마인과 황제, 원로원의 인정을 받으며 서고트족의 사회적 지위와 입지를 넓혀가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한 번 그 길을 가기로 마음을 먹으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가졌다. 그 길을 잘 가도록 끌어주고 안내해주는 것이 스틸리코의 역할이었다.
실제로 알라리크는 테살리아로 진군하면서 임의로 주변지역을 정벌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정해진 경로대로 가고 있었다. 출정한 군대의 유지비용이 상당할 텐데도 동로마를 약탈하거나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스틸리코가 콘스탄티누스를 상대하는 동안 끈기 있게 기다리며 지시한 내용대로 동로마황궁과 협상을 했다.
그는 테살리아에 있는 알라리크에게 서신을 보냈다. 동로마에서 이만 퇴각하고, 갈리아로 가서 콘스탄티누스를 처리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알라리크는 테살리아에 머물며 스틸리코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의 코앞까지 왔고, 모에시아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스틸리코는 콘스탄티누스를 상대하느라 바빠서인지 한참을 연락이 없었다.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원로원을 설득하고 군대를 편성하고 작전을 짜고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등의 속주가 반란군의 편에 서지 않게 를 편지를 보내서 설득하는 일을 모두 그가 혼자서 해야 하니 동로마 일은 뒷전일 것이다.
“스틸리코가 정신없을 때 그냥 콘스탄티노플을 먹어버리면 어떻습니까?”
족장들은 알라리크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까운 기회에 군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콘스탄티노플이 높고 튼튼한 성이기는 해도 알라리크가 거느리고 온 군단도 성벽을 공략하기 위한 공병을 대동한 정규군이기 때문에 못할 것은 없었다. 희생이 무척 크겠지만, 맘먹고 달려들면 시간은 걸려도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태라면 스틸리코는 서로마 상황을 수습하느라 몇 년간은 동로마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로마황궁을 장악하면 서고트족이 동로마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 없어. 로마인들은 야만족도 이단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거야.”
콘스탄티노플을 무력으로 점거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봐야 가이나스나 아르보가스트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종교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로마인들은 어떻게든 기회만 있으면 이단인 서고트족의 등에 칼을 꽂아 몰살시키려고 벼를 것이다. 그들을 정복해서 불편한 동거를 하기보다 합법적으로 분리된 땅을 얻어서 따로 사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저들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고트족끼리 사는 게 최선이야.”
로마인들과 어느 한 쪽이 죽어나갈 때까지 싸워보기도 하고, 그들과 동화되려고 노력해보기도 했지만,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협력하고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싸우기에는 로마인들은 너무 강했고, 전적으로 믿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었고, 배척하기에는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알라리크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과 연락이 끊어지면 다키아와 모에시아도 명색이 일리리쿰 사령관인 알라리크와 서로마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틸리코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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