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리코
스틸리코는 일찍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눈에 띄기 시작했지만, 결정적으로 신임을 얻게 된 것은 샤푸르3세와의 협상 덕분이었다.
샤푸르3세는 오랫동안 로마제국과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인 페르시아제국의 샤푸르2세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서 페르시아의 황제가 되었다. 선황제였던 샤푸르2세는 로마제국의 황제를 전사시킬 정도로 무시무시한 적이었고 웬만해서는 영토를 내주지 않는 로마로부터 5개 주를 빼앗았다. 그만큼 페르시아는 로마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당시에 로마는 아르메니아 영토를 사이에 두고 페르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친 로마파와 친 페르시아파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정권을 잡고 있었다.
샤루프3세가 즉위하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영토 분쟁을 협상하기 위해서 사신을 파견하려고 마음먹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황제가 된 샤푸르3세가 어떤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인지 어떤 생각을 가진 자인지 정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신은 협상을 하면서 즉각적으로 주도적으로 판단해서 결정을 할 수 있어야했다.
황제가 누구를 사신으로 보내야 할지 적임자를 찾지 못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스틸리코가 기병대장인 아버지가 보낸 서신을 황제에게 전달하러 들어왔다. 그는 황제가 서신의 답장을 적어주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황제가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지도를 펼쳐놓고 있는 것을 보자, 그의 고민을 즉시 알아차렸다.
“샤푸르3세에 대해서라면 당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황제는 답장을 적느라 건성을 물었다.
“어째서?”
“그는 지금 여러 위협에 둘러싸여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근거는?”
“그는 이제 막 성인이 되었고, 그것도 숙부와 권력다툼 끝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로서는 국외 문제를 신경 쓰기보다, 국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일 겁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별 생각없이 가볍게 물어보았을 뿐인데, 스틸리코에게서 명쾌한 대답이 나오자, 고개를 들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된다만, 그가 어떤 자인지 아직 모르지 않나. 아버지 못지않게 호전적인 인물일 수도 있지.”
“그가 로마제국과 싸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훈 족 때문입니다. 국경에 훈족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들을 먼저 상대해야 할 겁니다.”
훈 족은 로마제국도 침략했지만, 페르시아의 북방은 훈 족에게 더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훈 족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숫지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틸리코는 지도를 가리켰다.
“북쪽의 훈족, 서쪽의 로마, 국내의 귀족들까지 샤푸르3세의 상황은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초반에는 내부의 세력을 다지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황제는 생각할수록 그의 통찰력이 정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샤푸르3세의 입장이라도 스틸리코가 말한 대로 생각할 듯 했다.
“그렇군. 그러면 아르메니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아르메니아 국내에 친 로마파와 친 페르시아파가 싸우고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점령하든 다른 쪽이 들고 일어나서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렇다면 30년간 아르메니아를 로마와 페르시아가 동서로 나눠서 다스리도록 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분할해서 다스린다?”
황제는 젊은 스틸리코에게서 노련한 협상가들도 생각해내지 못한 해답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쓰고 있던 답장은 제쳐놓고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아르메니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땅이었다. 다만, 아르메니아로 인해서 자꾸만 페르시아와 분쟁이 생기니 그것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르메니아를 페르시아가 점령한다고 해도, 친 로마파가 문제를 일으키면 또다시 전쟁이 터질 것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아예 30년간 평화협정을 맺어서 분할통치를 하고 그 이후에 상황을 봐서 다시 협의를 하도록, 열을 식히고 양쪽 다 이 문제로부터 떨어져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했다. 아니, 이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었다.
“과연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그럴 겁니다. 페르시아는 지금 아르메니아에까지 손을 쓸 경황이 없는데, 절반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좋아할 겁니다. 아르메니아는 친 로마파와 친 페르시아파가 둘다 각자의 정권을 세울 수 있으니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더라도 일단은 받아들일 겁니다.”
로마와 페르시아가 협의하면 병력이 얼마 없는 아르메니아의 친 로마파와 친 페르시아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스틸리코를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는 스틸리코에게 얼마간의 병력도 딸려 보냈다. 사신이라고는 해도 군사적인 압박이 필요하다는 스틸리코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스틸리코는 아르메니아 접경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진영을 펼쳤다. 그는 샤푸르3세와 아르메니아의 친로마파, 친페르시아파에게 모두 서신을 보내서 차근차근 그들의 의중을 떠보았다.
샤푸르 3세에게는 정중하게 아르메니아 영유권 분쟁에서 물러날 뜻이 없음을 강조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며 압박했다. 훈 족을 언급해서 다가올 위험을 암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샤푸르3세는 싸우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미적지근한 답장을 보냈다. 로마와 전쟁을 할 경황이 없어보였다.
아르메니아의 친 페르시아파에게도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수 있다는 듯이 군사적 위협을 가하면서, 문제을 일으키지 않으면 아르메니아를 분할해서 일부라도 통치하게 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슬쩍 보여주었다. 페르시아파는 로마군이 코앞에 와있는데도 샤푸르3세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스틸리코에게 끝까지 싸우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협상을 할 용의도 있다고 꼬리말을 단 서신을 보내왔다.
친 로마파와는 자주 대화를 하고 신뢰를 쌓으면서 그들을 통제해나갔다. 그들에게 로마제국이 하라는 대로 따르면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겠다고 밑밥을 깔았다.
그의 예상대로 샤푸르3세는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로마제국의 분할통치 제안이 크게 굴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차례 서신이 더 오간 끝에 샤푸르 3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틸리코는 끈기있게 물고기를 한 곳으로 몰아가듯이 친 페르시아파와 친 로마파의 동의를 단계적으로 이끌어냈다. 친 페르시아파에게는 군대를 전진시켰다 물렸다 하면서 겁을 주었다. 아르메니아 영토를 다 갖지 못해서 억울해하는 친 로마파에는 경제교류를 약속하며 불만을 가라앉혔다. 힘을 키운 후에 상대편을 통합하면 된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분할통치 조약이 성립되고, 아르메니아 지역의 분쟁은 막을 내렸다.
피를 흘리지 않고 아르메니아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온 스틸리코에게 황제는 즉시 새로운 직위를 내렸다.
“스틸리코를 내 호위대장으로 임명한다.”
사람들은 파격적인 승진인사에 깜짝 놀랐다. 야만족 출신인 그를 믿고 호위대장으로 삼은 것도 놀라웠지만, 호위대장은 황제의 최측근에서 있는 사람이었다. 장군들보다도 더 황제의 곁에서 밀착해서 황제에게 군사적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가장 신임을 받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일개 기병인 23살의 스틸리코를 임명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호위대장 임명장을 건네던 황제는 불쑥 그에게 말했다.
“스틸리코. 자넨 내 허락 없이는 결혼해서는 안 돼.”
호위대장이 독신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내 딸 셀레나가 크면 자네와 결혼시킬 테니, 다른 사람과 혼인해서는 절대 안 되네.”
셀레나와 혼인을 한다는 것은 황족의 가문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황제의 아들이 일찍 죽거나 하는 경우에 그 다음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뜻이었다. 스틸리코는 야만족 출신인 자신에게 그런 지위를 부여해 줄 리는 없고, 황제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셀레나가 누군가와 혼인할 때까지 그도 결혼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셀레나가 16살이 되자, 황제는 정말로 셀레나와 그를 불러서 말했다.
“이젠 너희들이 결혼할 때가 되었다.”
그들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 로마인들의 축복 속에서 부부가 되었다.
스틸리코는 황제의 사위가 된 이후에도 교만하지 않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겸허하고 청렴했다. 전투 후에 전리품을 나눌 때에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공정했다. 자신의 몫을 챙기기보다 부하들의 몫을 먼저 살펴주었다.
급작스럽게 부상한 스틸리코에게 아첨하거나 뇌물을 바치려는 사람에게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했다.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로마인들은 점점 더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가 반달족 출신이라는 것을 거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이나스는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서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차이는 길로 들어섰다.
도나우 강을 따라 난 길을 걸어가면 서고트족이 사는 야트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몇 개 있었다. 서고트족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무장을 해제하고 농사를 짓고 로마군의 병력소집에 응할 것을 조건으로 도나우강 유역의 로마영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많이 변했군.”
고향마을에 도착한 가이나스는 몰라보게 변한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십 년 전 처음 정착할 때에는 맨 땅에 천막 몇 개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도로도 있고,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빵을 굽는 냄새도 진동했다. 들판에는 풀 대신 곡식이 자라고 있었다.
말을 타고 로마 기병대의 옷을 입은 그가 마을로 걸어 들어가자, 눈이 커진 아이들이 쫄래쫄래 그의 뒤를 따라왔다.
“가이나스! 오랜만이군. 여기까지 웬일인가.”
어른들도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로마 물이 좋긴 좋네.”
그들은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칼이 미끄러질 것 같이 매끄러운 곡선의 갑옷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이나스가 로마군에서 출세해서 꽤 높은 지위에 올라간 것은 모두에게 소문이 퍼져있었다. 그는 고향에 거의 오지 않았고, 서고트족을 만날 일이 있을 때에도 그쪽으로 오라고 불렀기 때문에, 서고트족 마을에서 그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가 서고트족과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로마군에 나는 것을 꺼려서 그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일이 있어서 사루스를 만나러 왔지.”
“그래? 일?”
가이나스가 일이라고 한다면 용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몇 년 간 일해도 벌지 못할 돈을 두세 달 만에 손에 쥐어줄 것이다. 그것은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남자들은 가이나스의 옆을 따라서 걸으며 질문을 퍼부었다.
“돈은 많이 주겠지?”
“언제 출정하나?”
“몇 명이나 갈 수 있어?”
가이나스는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협상을 해 봐야지.”
서고트족 개인이 로마군단병으로 정식 취업을 하면 로마군과 동일한 훈련을 거쳐서 동일한 급여를 받지만, 평소에 농사를 짓던 서고트족 남자가 일시적으로 전투에 동원되는 보조군 용병이 되면 그보다는 훨씬 값싼 급여를 받았다. 그에 따른 용병료 협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협상권을 쥔 그에게 굽신거렸다.
“잘 좀 부탁하네.”
가이나스는 어깨를 으쓱 했다.
“나중에 보세.”
가이나스는 아말리 가문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고트족의 대표 가문인 아말리 가문과 용병대금에 관해서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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