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아테네에 도착한 서고트족은 도시를 포위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개방적이라 성벽도 높지 않았다.
알라리크는 아테네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거쳐온 도시들만 해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조각상과 그림이 많았는데 아테네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것이 서고트족에 의해서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항복하고 금을 내놓으면 약탈하지 않고 성 밖에서 평화롭게 머물다 가겠다고 아테네에 사절을 보냈다.
아테네 시민들은 열 배가 넘는 페르시아군과 싸울 때와 같은 몇 백 년 전의 기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의 전 재산에 맞먹는 막대한 양의 금을 내주어야 했지만 그래도 도시가 짓밟히고 주민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에게 금을 나눠주며 주의를 주었다.
“금도 받았고 식량도 받았으니까 손님으로서 예의바르게 행동해.”
야만족은 약속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서고트족은 수십 년 간 로마 영지에 살면서 그래도 법과 약속에 대해서 개념이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뒤지는 수고를 하지 않고 엄청난 금을 받았으니 규칙을 지켰다. 서고트족은 아테네 주민과 마을을 건드리지 않고 벌판에서 야영을 했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 족장들은 아테네 시장의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알라리크는 소수의 병사들과 족장들과 함께 아테네 시로 들어갔다.
“우와!”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많은 도시를 보아왔지만, 아테네는 품격이 달랐다. 조각상의 자세는 너무나 우아하고 자연스러워서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다. 그런 조각상이 몇 개만 있는 게 아니라 도시 전체가 그런 예술품으로 뒤덮여 있었다.
알라리크는 충격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아테네는 천 년 전부터 이런 도시를 짓고 살았는데, 서고트족은 지금까지 뭘 하고 있는 걸까. 땅도 없이 떠도는 서고트족의 지금 처지를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프고 기가 죽었다.
“목욕으로 피로를 푸시지요.”
아테네 시장은 그들을 공중목욕탕으로 안내했다.
어마어마한 넓이의 목욕탕의 규모에 그들은 입을 딱 벌렀다. 천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의 거대한 욕장에 삼지창을 든 포세이돈 신의 조각상 모양의 분수대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벽에는 그리스 신들이 세밀한 모자이크화로 묘사되어 있었다. 번개를 던지는 제우스, 포도주에 취한 디오니소스, 하프를 든 아폴론, 활을 들과 사슴을 거느린 아르테미스, 창과 방패를 든 아테네까지 그림들만 둘러보아도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욕탕에 몸을 담그자 온 몸이 이완되며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로마인들이 이 맛에 목욕을 하는 거구나.”
아타울프가 뜨거운 수중기로 벌개진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더워서 못 참겠어.”
알라리크는 옆에 있는 차가운 냉탕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갑자기 수축된 혈관으로 인해서 숨이 차오르며 심장이 뛰고 혈액이 빨리 돌았다. 정신이 번쩍 났다.
“와, 죽이네.”
그들은 개운하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로마 영지로 들어와서 로마 음식을 약탈해서 먹었지만, 제대로 된 만찬을 대접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커다란 접시에 덩그러니 무화과 반쪽과 말린 과일, 요거트 소스가 올려져 있었다.
“이게 다는 아니겠지요?”
족장들이 알라리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이건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는 전채야. 계속 나올 거야.”
이어서 샐러드가 나왔다. 향긋한 오색 야채에 부드러운 올리브기름을 뿌린 것이었다.
“풀만 줄 건가?”
잔뜩 기대하고 온 서고트족이 실망스러워하며 얇게 썬 콜라비를 뒤적거렸다.
“기다려 봐.”
알라리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스프가 들어왔다.
오리육수로 맛을 낸 스프가 너무 맛있었다. 부드러운 빵, 바삭한 빵, 로즈마리향이 나는 빵, 버터를 넣어서 층이 있는 빵, 온갖 종류의 빵이 담긴 바구니도 함께 나왔다.
“저 사람들은 왜 안 먹는 거야?”
아테네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손을 대지 않았다.
“입맛이 없나보지.”
이번에는 해산물이 들어왔다. 신선한 굴, 생선찜, 달팽이튀김, 철갑상어 스테이크가 차례로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재료와 요리들이었다. 내륙에 사는 그들은 처음 접해 본 음식이었다. 서고트족은 낯선 음식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아테네인들은 그제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어서 가금류요리가 들어왔다. 닭찜, 메추리 꼬치구이, 향료를 입힌 꿩고기가 나왔다. 그것은 서고트족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맛있는데?”
마지막은 육류였다. 빵가루에 묻힌 양고기와 사슴고기, 소고기 스테이크까지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더 이상은 못 먹겠다 싶은데도 아직도 더 코스가 남아있다고 했다.
“괜히 빵을 많이 먹었어.”
서고트족은 배가 불러서 고기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빵과 스프를 많이 먹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다.
마지막으로 통으로 구운 돼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내장을 빼냈을 텐데도 배가 뚱뚱했다.
“임신한 돼지인가?”
그들은 의아해하며 요리사가 어떻게 잘라주는지를 궁금해 하며 고개를 뺐다. 요리사가 배를 가르자, 그 안에는 온갖 과일과 함께 햄과 소시지가 가득 차 있었다. 돼지의 뱃속에서 뜨거운 김이 쏟아져 나오며 향신료와 과일 향기가 방안을 메웠다.
서고트족 족장들이 감탄하자 시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요리는 트로이의 돼지라는 요리입니다. 트로이의 목마 속에 병사들이 숨어있었던 것처럼 돼지의 뱃속에 음식이 숨어 있는 것이죠.”
그리스 연합이 승리했던 영광스러운 트로이 전쟁을 기념하는 요리인 셈이었다.
디저트로는 꿀이 들어간 달콤한 케이크와 치즈가 나왔다.
요리가 나올 때마다 종류가 다른 포도주가 곁들여졌다.
이런 요리 한 끼 가격이면 서고트족 열 명이 한 달은 먹을 수 있는 빵 가격과 맞먹을 것이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알라리크의 인사에 아테네 시장이 수줍게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약소합니다. 로마에서는 요즘 이집트산 악어요리가 유행이라는데 그건 미처 준비를 못했습니다.”
제국의 평범한 도시인 아테네가 이 정도면 동로마와 서로마 황궁의 사치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만찬에는 아테네의 고명한 학자들도 초정되어 와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고향에 와서 그 후손들과 철학을 토론할 수 있다니 영광이군요.”
알라리크가 그리스어로 말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야만족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입에서 서고트어, 라틴어 뿐만 아니라 유창한 그리스어까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공동체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소크라테스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론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철학을 몸소 보여준 위대한 철학자의 고향에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아테네인들은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야만족의 입에서 자신들의 먼 조상의 이야기가 나오자 옷깃을 바로하고 경청했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파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무지의 어둠에서 그림자를 따라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의 사고를 한 차원 높인 공로가 있습니다.”
알라리크의 입에서 품위 있는 철학용어가 계속 튀어나오자 아테네 학자들은 감탄하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리스 철학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그들은 몇 백 년 전 자신들의 역사와 철학을 꿰고 있는 알라리크의 박식함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지혜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지요.”
그것은 그리스를 대표하는 희곡 작가 소포클레스는 명언이었다. 야만족인 알라리크가 소포클레스를 알고 연극에도 조예가 깊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테네 학자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소포클레스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소포클레스의 완벽한 균형미와 절제된 슬픔의 표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아주 이상적이죠.”
아테네 학자는 알라리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파멸하는 운명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비장미가 일품이죠.”
알라리크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소포클레스보다 유리피데스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더 인간적이랄까요.”
고결한 소포클레스의 인물들보다, 최후까지 어떻게든 욕망을 이루려고 추한 모습으로라도 발버둥치는 유리피데스의 인물이 더 알라리크에게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유리피데스가 쓴 희곡 주인공 메데이아는 악녀였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 하자, 복수심에 그 여인과 그녀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결국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도 죽였다. 남편에게 가장 상처를 줄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사랑하는 그들의 아이를 죽이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알라리크는 앞뒤 안 가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덤벼드는 메데이아의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 누가 메데이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누가 로마를 짓밟는 서고트족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막다른 곳에 몰린 약자인 그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누구라도 감정에 휩쓸려 미친 짓을 해 본 경험이 있죠. 안 그렇습니까?”
알라리크의 말에 사람들은 웃으면서 너도나도 시인했다.
“맞습니다. 저도 너무 화가 나서 비싼 화병을 제 손으로 집어던져 깨뜨린 적이 있습니다. 완전 바보 같은 짓이었죠.”
“주먹으로 벽을 때리고 손을 다쳐서 한참 고생했습니다. 그땐 왜 그랬는지.”
그들의 토론은 연극과 예술을 거쳐 밤늦도록 이어졌고, 종교에까지 옮겨갔다.
“기독교를 믿으신다고 하니 여쭙는데, 어째서 기독교는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는 겁니까? 여러 신을 믿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리스 전통신을 믿는 수도승이 물었다. 알라리크가 대답했다.
“서고트족도 원래는 다신교인 게르만 신화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에 살면서 로마제국의 국교인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아, 그래요?”
“서고트족 지도자들은 종교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니만큼 로마제국에서 잘 융화해서 살려면 로마의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라리크는 종교적 논쟁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의 면에서 접근했다.
“지금 로마제국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하나의 강력한 원칙과 통제력이 없이 개별적으로 흩어져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혼란을 없애고 하나로 묶는 역할을 유일신인 기독교가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기독교를 장려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수도승은 그의 말에 동의하며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특정 종교나 사상을 강요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로 이야기하는 알라리크에게 자신도 모르게 호감을 느꼈다. 서고트족이 자신들을 약탈하러 왔다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고트족의 야영지로 돌아왔다. 알라리크에게는 꿈같이 행복하면서도 씁쓸한 하루였다. 그가 오랜 기간 책을 읽으며 동경해왔던 정신적인 고향 아테네에서 그 곳 사람들과 토론하고 즐기는 행복과 함께, 서고트족은 그런 문화를 누리지도 발전시키지도 못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멀리 국경너머 야만족에게까지 그들의 문화가 퍼져서 존경받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야만족에게 굴욕적인 금품조공과 접대를 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신세가 우울했던 하루였을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면 로마인도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왜 제국은 야만족에게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걸까.’
알라리크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곱씹으며 로마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느꼈다.
‘서고트족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똑똑하고 예의바른 사람도 있는데 왜 약탈을 하고 몹쓸 짓을 하고 다닐까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겠지.’
다음날 서고트족은 아테네를 떠났다. 아테네 시민들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몇몇 아테네 시민들은 신화속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아테나 여신이 자신들을 보호해서 알라리크가 겁을 먹고 아테네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부끄러움과 아테네 시민이라는 자존심이 양립할 수 없었다. 교양 있는 야만족에게 금을 바치고 접대를 하고 논리적 토론에서마저 밀리고 말았다는 당황스러움을 그렇게라도 합리화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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