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루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 2만명을 끌고 나가서 1만 명만 데리고 돌아왔소. 그런 자가 어떻게 서고트족의 대표가 될 수 있단 말이오?”
사루스는 프리기두스 전투로 서고트족이 절반밖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자, 알라리크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녔다. 알라리크가 적극적으로 서고트족을 보호하려 하지 않아서 무리한 작전에 투입되어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비난했다.
“로마군이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면 말렸어야지. 그게 대표의 역할 아니오?”
서고트족은 용병으로 이전에도 참전했기 때문에 로마군과의 작전에서 서고트족이 자율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참전했던 족장은 사루스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서고트족은 작전권이 없잖아. 어떻게 황제의 지시를 거역해? 그랬다간 명령불복종으로 즉결 처형될 수도 있어.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해?”
사루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알라리크의 편을 들었다.
“알라리크가 후퇴하도록 스틸리코를 설득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황제에게도 가서 소리쳐서 항의했는걸. 그 바람에 피떡이 되게 두들겨 맞았지.”
그 옆에 있던 사람도 차갑게 사루스에게 쏘아붙였다.
“맞아. 알라리크는 화살이 빗발치는 강으로 뛰어들어서 부상자들을 건져냈어. 알라리크가 목숨을 걸고 우리와 싸울 때 사루스 너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지?”
사루스의 비난은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알라리크의 주위를 돌며 염탐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서거 소식을 들은 알라리크는 루피누스와의 약속대로 출정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평소에 뜻을 같이하던 서고트족 사람들을 규합했다. 서고트족 족장을 한 사람씩 비밀리에 만나서 로마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설명하고 함께 할 것을 설득했다.
알라리크는 족장들을 만나고 다니며 로마에 대항한 전쟁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이대로 로마제국에 이용만 당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를 공격해서 우리의 힘을 인정받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알라리크의 주장은 대다수 서고트족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젊은이들은 알라리크를 따르고자 했지만, 로마군의 막강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우리가 로마군을 이길 수 있겠나?”
알라리크는 그들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스틸리코가 이끄는 서로마군은 라인강을 방어하고 있고, 티마시우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훈족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는 완전히 빈집입니다.”
최종 목적은 황제에게 서고트족의 땅과 국가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1단계 목표는 스틸리코를 동로마로 끌어내서 싸우는 것이었다. 동로마는 루피누스가 다스리고 있으니, 동로마에서 싸우면 스틸리코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치 적진 한 가운데서 싸우는 것처럼 군량, 무기, 자금 등을 보급 받지 못하고 모두 스스로 조달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라리크가 믿는 것은 또 있었다. 혹시나 스틸리코와의 전투에서 지더라도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동로마황제가 스틸리코에게 명령하면 총사령관인 스틸리코는 그 명령을 들어야 했다. 루피누스가 황제를 구슬려서 스틸리코에게 불리한 명령을 내려줄 수 있다고 약속했다.
알라리크는 루피누스가 한 말을 떠올리며 서고트족에게 너무 구체적이지 않게 에둘러 설명했다.
“꼭 로마군을 무찔러야만 이기는 건 아닙니다. 그들을 분열시키고 겁먹게 해서 우리의 힘을 과시하고 협상을 하면 이기는 겁니다.”
알라리크의 목표는 서고트족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서고트족은 그것보다는 약탈에 관심이 있었다. 로마인들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금이 쌓여있다는 헛소문도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알라리크는 정보가 아말리 가문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했지만, 이런 엄청난 계획이 비밀에 붙여질 수는 없었다. 아말리 가문은 다른 가문과도 혼인관계로 혈연으로 얽혀있었기 때문에 사루스는 친척을 동원해서 반란 계획을 미리 알아냈다.
사루스는 스틸리코를 찾아가서 자신이 알아낸 알라리크의 계획을 하나부터 열까지 일러바쳤다.
“알라리크가 동로마를 공격하자고 족장들을 들쑤시고 다닌답니다.”
스틸리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라리크가 언젠가는 사고를 칠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서고트족을 규합해서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다.
사루스는 스틸리코에게 어서 알라리크에게 손을 쓰도록 부추겼다.
“알라리크를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사루스의 말대로 반란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싹을 자르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반란의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사루스의 말만으로 서고트족 지도자를 체포할 수도 없었다. 증언만으로 고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고트족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표자를 체포했다가는 오히려 반란에 불을 지피게 될 수도 있었다. 스틸리코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서고트족이 뽑은 지도자를 로마제국이 간섭할 수는 없네. 서고트족 내부에서 해결하도록 해 봐. 자네가 애써준다면 로마도 자네를 도와주겠네.”
“그럼 장군께서 도와줄 거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사루스는 눈빛을 번득였다.
“프라비타가 황제와의 만찬장에서 에리울프를 죽였을 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죠. 스틸리코 장군께서도 그 정도는 도와주시겠지요?”
알라리크를 살해하겠다는 뜻이었다. 로마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스틸리코는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지만, 로마는 서고트족 내부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로마군에 도움이 되는 자를 특별사면을 할 수는 있지.”
돌려 말했지만, 사루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로마는 이렇게 야만족 내부 분열을 통해서 불평분자를 제거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척 했다. 사루스는 또 한 가지를 요청했다.
“저도 로마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알라리크를 죽이고 나면 알라리크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복수를 하려고 들 것이다. 서고트족 마을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 수 없었다. 로마군에 들어가는 것이 안전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스틸리코의 승락에 사루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다.
가이나스는 한숨을 쉬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기어이 알라리크가 문제를 일으키는군요.”
서고트족이 문제를 일으키면 로마군이 가이나스를 보는 시선도 곱지는 않을 테니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로마를 적으로 돌리면 서고트족만 손해인데 말입니다. 자기 인기 관리하려고 쓸데없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겁니다.”
화가 나서 투덜거리는 가이나스의 말에 스틸리코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알라리크를 떠올렸다. 프리기두스 강가에서 동료들의 시체 앞에서 울부짖고, 황제에게 분노의 말을 퍼붓고, 자신에게 반란을 선동하던 그를 보면, 지금의 행동이 단순히 인기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다. 사루스가 알라리크에 대한 복수심으로 차 있듯이 알라리크의 마음은 로마제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차 있는 것이다.
스틸리코는 턱을 문질렀다.
“꼭 인기를 얻으려고 로마를 공격하는 건 아니야. 알라리크는 로마를 진짜로 증오해.”
그런 자가 가장 위험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신념을 앞세우는 자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판단이 옳았다. 알라리크를 로마군에 편입시켰다면 결국 아르미니우스처럼 로마를 전복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사루스가 알라리크를 제거할 수 있을까. 성공하든 실패하든, 발티 가문과 아말리 가문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안달이었다. 서고트족 내부의 대립이 격해져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은 제국이 바라는 바였다.
집으로 돌아간 사루스는 동생 싱게리크를 불렀다.
“알라리크와 발티 가문이 계속 설치고 다니게 놔둘 수는 없다.”
“어쩔 셈이야?”
싱게리크도 아말리 가문의 일원으로서 족장들이 알라리크의 지도력을 믿으며 발티 가문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말리 가문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마.”
싱게리크는 형이 평소와 다르게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것을 느꼈다. 사루스는 눈빛을 번득였다.
“내가 알라리크를 죽일 거야.”
싱게리크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그들은 로마 영토에 살고 있었다. 살인은 로마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중죄였다.
게다가 알라리크를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서고트 족장들이 그를 죽인 사루스를 따를 리가 없었다.
“그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프라비타를 생각해 봐.”
몇 년 전 친 로마파인 프라비타가 반 로마파인 에리울프를 죽였다. 프라비타는 황제의 선처로 로마법에 의해서는 처벌받지 않았지만, 서고트족에게는 완전히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다.
“서고트 족장들이 알라리크를 죽인 형을 따를까?”
싱게리크의 말에도 사루스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아말리 가문의 남자가 아니야.”
그는 싱게리크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나를 따르지는 않겠지만, 너는 다르지.”
사루스는 이미 계획을 세워 놓았다.
“나는 알라리크를 죽이고 마을을 떠나서 로마군에 들어갈 거다. 네가 아말리 가문의 수장으로서 서고트족의 대표자가 되어라.”
자신은 로마군의 고위직에 올라가고 동생은 서고트족 지도자로 만들어서 긴밀히 협력하며, 아말리 가문이 로마의 군부 세력 중심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었다.
“나는 너의 서고트족 세력을 업고 로마군에서 승진하고, 너는 내 로마군 연줄을 이용해서 서고트족을 통제하면, 우리 아말리 가문이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을 거다.”
사루스의 계획을 들은 싱게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리크가 죽으면 발티 가문으로 향하던 서고트족의 민심이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 것이다. 그 틈에 아말리 가문이 나서서 싱게리크가 서고트족 대표가 되면 사루스에게도 싱게리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사루스는 아말리 가문의 수장 지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에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알라리크를 죽이는 것이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목표였다.
그는 새롭게 아말리 가문이 대표가 된 동생 싱게리크를 서고트족 대표로 선출하라고 물밑작업을 했다.
아말리 가문은 역사가 오래되고 영향력도 넓었기 때문에 알라리크의 행보에 불안한 눈길을 던지던 족장들은 싱게리크에게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사루스는 알라리크만 없애면 싱게리크가 서고트족 대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족장회의가 있기 전날, 사루스는 칼을 닦으며 복수의 달콤함을 맛볼 시간을 기다렸다.
그 칼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긴 장검 스파타였다. 가이나스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구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로마군은 글라디우스보다는 길이가 긴 스파타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일반적으로 로마군이 쓰다가 파는 낡은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다. 평소에 알라리크가 차고 다니는 칼도 글라디우스였다.
“알라리크, 넌 오늘이 이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사루스는 글라디우스보다 한 뼘이 긴 번쩍이는 스파타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칼을 이리저리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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