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서고트족은 뿌연 물안개가 바람에 걷혀가는 프리기두스 강 앞에 섰다. 갈대가 우거진 강 건너편에는 아르보가스트의 군대가 진을 친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갑옷을 입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서고트족을 돌격대로 강을 건너고, 로마군이 뒤따른다. 그동안, 기병대가 상류에서 강을 건너서 배후를 친다.”
작전을 전달받은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강가에 길게 늘여 세웠다. 강을 건너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나마 피해를 적게 하려면 많은 숫자로 빠르게 건너야 했다. 적은 숫자로 건너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건너는 족족 뭍으로 올라서기 전에 압살당할 것이다.
로마군이 언제 강을 건너올지 모르면서 자신들만 사지로 내몰리는 것이 아닌지 불안했다. 로마군은 야만족 돌격대를 먼저 전투로 밀어 넣고 미끼로 쓰다가 전투가 끝날 때쯤 참전해서 마무리만 하곤 했다. 이번에도 강 건너에서 서고트족이 힘겹게 싸우는 동안 로마인들이 팔짱만 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그들의 뒤에서 칼을 들고 서서 지켜보는 로마군을 둘러보았다. 적과 싸우려는 것인지 서고트족을 감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격!”
전진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지자 강가에 도열한 서고트족은 방패를 두드리며 결전의 함성을 질렀다. 강 건너편의 적들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강 건너편의 갈대숲속에서 이에 맞선 서로마군대와 프랑크족의 함성이 들려왔다. 놀란 새들이 강에서 먹이를 찾다 말고 날아올랐다.
“바짝 따라붙어. 뭉쳐서 빨리 강을 건너야 해.”
알라리크는 부대원들에게 말했다.
미처 고민할 시간도 없이 돌격 명령이 내려졌다. 서고트족은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차가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얕은 곳을 골라서 건너는데도 물은 허리를 지나 목까지 차올랐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자 쌔액 소리를 내며 화살이 날아왔다.
“방패를 들어!”
알라리크가 소리쳤다. 방어구가 변변치 않은 서고트족이 의지할 거라고는 조잡하게 널빤지를 붙여서 만든 방패뿐이었다.
“윽!”
서고트족 병사들은 맥없이 물속에서 비척거리며 떨어지는 방패로 머리를 가려 겨우 화살을 피했다.
“물살이 너무 세!”
아타울프가 소리쳤다.
휘몰아치는 물살에 떠밀려서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방패를 들어올리기도 힘이 부쳤다. 중심을 잃은 자들이 허우적거리며 주저앉았다.
“살려줘!”
화살을 맞고 강 아래로 떠내려가는 서고트족 병사가 물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으며 소리쳤다.
“컥!”
화살에 맞은 병사는 피를 흘리며 둥둥 떠내려갔다. 부상자는 부축하거나 구해낼 틈도 없이 가라앉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알라리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앞장서서 나아갔다.
“조심해!”
그는 동료들을 격려하며 한 발 한 발 미끄러지지 않게 물속에서 발의 감각으로 흔들리지 않는 바위를 골라 딛으며 앞으로 나갔다.
가장 깊은 곳은 지나온 듯 했다. 간신히 강 건너편에 이르렀지만, 오랜 시간 버둥거리며 녹초가 된 서고트족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아르보가스트 군은 강둑에서 긴 창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뭍에 올라오는 대로 찔러서 밀어넣었다.
물속에서 싸우는 것은 뭍에서 싸우는 것보다 열 배는 힘들었다. 발이 진흙에 푹푹 빠져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물속에서 누군가가 다리를 잡아 끄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친 서고트족은 전진하지 못하고 진창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군 기병대가 왜 나타나지 않지?”
알라리크는 초조하게 돌아보았다. 아군 기병이 강을 건너서 적을 기습해야 주의가 분산될 것이다. 후퇴하더라도 그 틈에 해야지 무작정 등을 보이면 적의 화살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강을 건너온 이상, 후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아군 기병대가 강을 건너서 나타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고, 옆에서 몇 번 칼을 휘두르더니 대응하는 기병대가 쫒아오자, 이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로마군 보병은 물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무도 차가운 물에 발조차 담그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서고트족이 불리한 상황에서 강을 건너서 피해를 입으며 싸우고 있는데, 로마군은 아무도 함께 싸우지 않았다.
알라리크는 다시 물살을 헤치고 강을 건너갔다. 강변에 서있던 로마군 병사가 그에게 칼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어서 강을 건너가!”
알라리크는 그를 막아서는 병사의 칼을 자신의 칼로 밀쳐 올렸다가 홱 뿌리치고 지나갔다.
“어엇!”
로마 병사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물속에 풍덩 주저앉았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에게 가서 말했다.
“로마군을 전진시키던지 서고트족에게 후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대로는 전멸입니다.”
로마인 장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제폐하의 명령이다. 계속 전진해!”
알라리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스틸리코에게 소리쳤다.
“이대로는 전진은커녕 후퇴하다가 다 죽습니다. 퇴각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의 피해가 더 클 것이다. 강을 건널 때는 그나마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전진하지만, 후퇴할 때는 등을 보이거나 뒷걸음질로 가야 하기 때문에 공격에 취약했다.
로마인 장수가 차갑게 말했다.
“이제 겨우 전투 초반이다. 어차피 지금 후퇴해도 적들의 공격에 당할 테니 어떻게든 적을 밀어붙여.”
알라리크는 이를 갈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로마군은 물에 발도 들여놓지 않으면서 어떻게 적을 밀어붙이란 말입니까? 이길 생각은 있는 겁니까? 지금 로마군이 진격을 시작해도 강을 건널 때쯤엔 서고트족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내일은 로마군이 직접 화살을 맞으면서 강을 건너야겠죠.”
알라리크의 말에 가이나스가 굳은 표정으로 스틸리코를 쳐다보았다. 알라리크는 화난 표정으로 그에게로 다가가며 화살을 맞고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서고트족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후퇴명령을 내리던지 로마군을 전진시키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주위에 있던 로마병사들이 그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로마군 장교가 그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갔다.
“감히 어느 분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그들 사이를 자르듯이 스틸리코가 짧게 말했다.
“퇴각한다.”
그는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당수의 서고트족들이 강을 건넜지만, 아직도 더 많은 숫자가 물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강을 건넌 서고트족들도 강둑을 올라가지 못하고 물가에서 아르보가스트 군의 창에 찔려서 속절없이 물살에 떠내려갔다.
로마군 장수가 그를 만류했다.
“황제폐하께서 내린 명령입니다. 뭐라고 하실 겁니까?”
스틸리코는 그들을 보며 명령했다.
“퇴각명령을 내렸다. 퇴각하라.”
이미 서고트족이 큰 피해를 입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더 이상 잔인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퇴각나팔이 울렸다. 서고트족 병사들은 무기를 거두고 도로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퇴각은 더욱 어려웠다. 그들이 등을 보이자 아르보가스트군이 강으로 쫒아 들어와서 그들의 등을 찔렀다.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이끼가 끼어 미끄러운 물속바위에 발을 헛디뎌서 가라앉았다. 오랫동안 미끄러운 바닥에 힘을 주고 서 있어서 다리에 쥐가 나고 후들후들 떨렸다.
녹초가 된 몸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속을 후퇴하는 것은 전진할 때보다 몇 배로 힘들었다. 화살은 갑옷과 투구를 살 돈도 없어서 맨몸인 서고트족 위로 계속해서 쏟아졌다.
“억!”
“욱!”
화살이 내리꽂힐 때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물위에 떠 있던 머리들이 하나 둘 밑으로 가라앉았다.
알라리크는 강으로 달려 들어가서 화살을 맞은 채 떠내려가는 서고트족 병사들을 구해서 끌고 나왔다. 강물은 피로 물들어서 이미 포도주색으로 변해 있었다.
“정신차려!”
화살이 천을 잡아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방패에 와서 박혔다.
몇 명의 병사를 건져낸 알라리크는 상처를 입고 떠내려가는 유리크의 형을 발견하고 헤엄쳐갔다.
“힘 내!”
그는 유리크 형의 팔을 자신의 목에 걸쳤다. 축 늘어진 그는 바윗덩어리처럼 알라리크의 몸을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난 틀렸어, 알라리크.”
그는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가. 너라도 살아.”
그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유리크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악몽처럼 2년간 그를 괴롭혔던 일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안 돼.”
알라리크는 그의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몸을 잡아당겼다. 온몸의 힘줄이 솟도록 잡아당겼지만 유리크 형의 몸은 점점 가라앉았다. 유리크처럼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알라리크의 눈에서 핏물로 변해버린 강물과 눈물이 섞여서 흘러내렸다.
“악!”
그는 온 힘을 다해서 시체가 되어버린 유리크의 형을 끌어내서 뭍으로 나왔다. 강변에 무릎을 꿇고 모래를 쥐고 숨을 헉헉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강변에는 형제와 친족을 잃은 서고트족의 통곡과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아타울프도 화살로 갑옷이 구멍투성이가 된 채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알라리크는 이를 악물었다. 강변은 온통 서고트족의 끌어내진 사상자와 그들의 붉은 피로 뒤덮였다. 물속은 더 처참했다. 부상자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둥둥 떠내려갔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빙글빙글 돌았다. 이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 됐다. 처음부터 로마군의 계략이었다. 황제의 목적은 아르보가스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서고트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용병료 협상에 눈이 멀어서 적의 더 큰 그림을 읽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었다.
자책감이 그의 심장을 쥐어뜯었다. 온 몸이 늑대에게 뜯어 먹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울분에 소리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자신은 서고트족의 대표였다. 무너지거나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사상자 수를 파악해.”
서고트족의 사망자와 강물에 떠내려간 자는 무려 1만명이었다. 2만 명 중의 절반이 몇 시간의 전투에서 죽었다. 아무리 대패한 전투라고 해도 사망자가 절반이나 되는 경우는 없었다. 승패가 기울면 한 쪽이 항복을 하고 포로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피해가 컸던 것은 화살에 맞거나 창에 찔린 부상자들이 그대로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모두 익사했기 때문이었다. 뭍에서 싸웠더라면 이렇게까지 사망자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사에 있던 황제는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전장에 나와서 둘러보았다. 참패라고 해도 좋은 결과였지만, 보고를 받은 황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서고트족 1만명이 전사했다고? 야만족 치고는 잘 싸웠군,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지. 내일은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야. 안 그런가?”
장수들과 가벼운 잡담을 주고받은 황제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병사들을 헤치고 알라리크가 다가왔다.
알라리크는 핏발이 선 눈으로 황제에게 소리쳤다.
“2만명 중에 절반이 죽었어! 로마군은 대체 어디에 있었소?”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황제에게 저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지?”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옆에 서 있던 장수가 답했다.
“서고트족 대표 알라리크입니다.”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스틸리코가 나섰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에게 다가가서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알라리크는 빙글빙글 돌아서 바닥에 쓰러졌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알라리크의 입에서는 피가 나오고 있었다. 스틸리코는 일어서는 그를 다시 걷어차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윽!”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가 다시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진흙 속에서 버르적거렸다.
“가시죠, 폐하.”
황제는 다른 장군들에게 둘러싸여서 뒤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스틸리코는 그제야 흙바닥에 쓰러진 알라리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정신 차려. 여기는 회담장이 아니고 전장이야. 황제께서 네 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돼.”
스틸리코는 알라리크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억울함과 분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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