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전투
“루피누스는 황제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야. 황제를 위해 헌신해봐야 그들은 너를 귀찮아하고 두려워하고 나중에는 없어지기를 바랄걸. 그러니 튀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게 현명한 일이야.”
알라리크의 사람의 심리에 대한 직감은 예리하니, 황제가 그를 싫어한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 말에 딱히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에 따라서 마음이 변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었다. 스틸리코가 생각하는 충성은 부모와의 관계, 신과의 관계처럼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다.
로마의 군인은 제국과 황제에 충성할 뿐, 황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로마의 군인이라면 황제의 인정이나 시민의 칭송을 바라며 눈을 돌리지 말아야 했다. 로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그런 것까지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죽어간 수많은 로마 선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 덕분에 지금의 그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들처럼 로마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보상 대신 고난이 주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두 황제는 잔혹한 폭군이 아니라 어리고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청소년일 뿐이었다. 크면 자연스럽게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줄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 황제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점이 오면 그때는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로마를 지키는 유능한 장군들이 많아져서 그가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로마가 안전해지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바였다.
알라리크는 로마군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우리를 포위하려는 생각이겠지? 동로마군에게 출정해서 우리의 뒤를 치라고 요청했겠지.”
그는 스틸리코를 동정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동로마군은 절대 오지 않아. 황제는 너를 도울 생각이 없어.”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말을 잘랐다. 그의 마음을 동요시켜서 로마를 분열시키려는 획책에 걸려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지원군이 없어도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너야말로 동족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걸 모르나.”
“서고트족은 어차피 평생 로마인에게 착취당하다가 결국은 전쟁터에서 로마인들의 화살받이로 죽을 운명이야. 로마인을 약탈하고 죽는다면 그것이 더 의미있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나 의미 있는 죽음을 원한다면 좋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 주지.”
스틸리코는 단호하게 말하고 뒤돌아서서 갔다. 그들은 각자 진영으로 돌아가서 결전을 준비했다.
로마군은 대열을 갖췄다. 사각형으로 백인 부대가 열을 맞춘 보병대가 중앙에, 양끝은 기병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숫자는 로마군이 약간 많았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서고트족은 그동안 부대별로 훈련을 해왔다. 실전에서도 훈련대로만 하면 로마군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로마인에게 약탈한 투구와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고 모양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런대로 몸을 보호해 줄 만 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정신력과 사기가 승부를 가를 것이다. 그것은 로마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뒤쪽 산 밑에서는 약탈품을 가득 실은 수레가 있었다. 여인과 아이들은 여차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숨을 죽이며 전장을 지켜보았다. 로마군에게 붙잡히면 가족과 헤어져서 노예로 팔려갈 것이다. 1년 넘게 걱정 없이 로마제국 영토를 누빈 그들은 아직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 병사들에게 말했다.
“절대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후퇴해서는 안 돼. 전열을 이탈하면 그 순간 다 무너지는 거야. 끝까지 버티는 쪽이 이기는 거야.”
서고트족은 긴장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스틸리코와 테살로니키 근처에게 전투를 치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로마군은 마치 한 명 한 명이 지옥에서 걸어 나온 전사와 같았다.
겁을 먹고 대열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전세가 기울고 로마군에게 쫓기게 되었던 것을 그들도 기억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자.”
“우리도 훈련 많이 했잖아.”
그들은 서로에게 다짐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알라리크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다. 서고트족은 함성을 지르며 칼을 들고 달려 나갔다. 확실히 훈련도 하고 두 번 째 맞닥뜨리니 처음보다는 덜 공포스러웠다. 로마군은 방패를 치켜들고 막으면서 전진했다.
“카캉!‘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욕설과 고함소리가 오갔다. 서고트족의 칼이 방패 사이를 찌르고 들어갔지만, 로마군의 칼이 다시 그의 팔을 내리쳤다.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뿜어져 나오고, 흥분한 서고트족이 다시 발로 로마군의 방패를 찼다. 출렁하며 잠시 전열이 무너지는 가 싶었는데, 로마군은 다시 재빨리 제자리를 찾았다.
스틸리코가 이끄는 로마군 정예병은 부대가 하나의 몸인 양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한 쪽을 무너뜨렸다 싶으면 다른 병사가 와서 그 자리를 메웠고, 전혀 당황함이 없었다.
로데리크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로마군과 일격을 주고 받았다. 갑옷을 입은 덕분에 몇 번의 공격을 받았지만 무사할 수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서서 방패로 밀치며 힘겨루기를 하려니 긴장한 팔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마주선 상대방도 지쳐보였다. 그와 비슷한 나이에 이마에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한 시간 동안 마주보고 싸우니 그의 열에 선 로마군의 얼굴을 다 익힐 정도였다.
그의 옆에 선 비터리크도 기운이 빠졌는지 입술이 파리해졌다. 로마군이 가격하면 힘에 밀려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힘 내! 저쪽도 지쳤어!”
로데리크는 동생을 격려했다.
“저놈들 곧 도망칠 거야.”
그러자, 정말 기적처럼 그들이 일순간 물러섰다.
“뭐야?”
어리둥절한 서고트족 앞에 다른 로마군이 앞으로 나섰다.
“트리아리다!”
하스타티가 물러나고 트리아리가 앞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스타티는 로마군의 가장 신참병이었다. 가장 체력이 좋은 그들이 맨 먼저 나서서 한 시간 넘게 적의 체력을 소모시켜 놓으면 그다음에 경험이 많은 트리아리 부대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여유 있는 트리아리의 모습을 보고 로데리크가 욕설을 내뱉었다. 트리아리는 지금까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왔기 때문에 기운이 넘쳤다.
“쾅!”
그들이 방패로 일시에 밀치자, 힘에서 로마군에 밀리지 않던 서고트족의 대열이 출렁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트리아리의 칼이 파고들어서 그들의 몸을 재빠르게 찌르고 물러섰다. 노련한 그들은 갑옷을 입은 상대의 어디를 공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으윽!”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서고트족이 한 명씩 늘어났다. 서고트족은 차츰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밀리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그 구멍을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비집고 들어가서 공격하며 서고트족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가했다.
“기병대 돌격!”
스틸리코는 전황이 우세하게 흘러간다고 느끼자 그제야 아껴두었던 로마군 기병대를 출동시켰다. 승기를 잡았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이려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조짐을 발견했다. 아직 전투의 중반에 막 들어섰을 뿐이지만, 서고트족은 전열이 여기저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에 로마군 전열은 여전히 빈틈없이 가지런했다. 기병대까지 나서서 후방을 교란하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 기병대를 출격시켰다.
“아타울프, 오른쪽 기병을 막아!”
아타울프는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군 기병대를 막았다. 기병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루스였다.
“사루스! 알라리크가 살려줬는데 서고트족에게 칼을 들이대나!”
아타울프는 그에게 칼을 겨누며 다가갔다.
사루스는 잘 만났다는 듯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늘 발티 가문은 두 명의 장례식을 치러야 할 거다. 너와 알라리크의 장례식.”
그는 아타울프에게 칼을 내리쳤다. 아타울프는 그의 칼을 받아서 홱 뿌리쳤다. 사루스는 다시 한 번 칼을 내리쳤다. 아타울프는 몸을 숙여 피하며 그를 찔렀다. 갑옷에 칼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루스의 갑옷이 찢어졌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물러서서 아타울프를 노려보더니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알라리크는 아타울프가 우측에서 사루스의 기병대를 상대하는 사이에 좌측의 기병대를 막았다. 그는 달려오는 기병의 칼끝을 재빨리 피하며 아래에서 위로 칼을 올려쳐서 상대의 손목을 베었다.
“윽!”
기병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목을 움켜쥐고 말을 달려 도망갔다. 다른 기병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알라리크가 여기 있다!”
기병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대장인 그만 없애면 서고트족이 항복할 거라고 예상해서 집중공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알라리크는 로마군이 알아듣지 못하게 고트어로 소리쳤다.
“내가 미끼가 될 테니 나를 공격하는 자를 공격해!”
알라리크는 일부러 칼을 휘두르며 로마군 기병 옆을 지나갔다. 로마군 기병이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들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고트족 기병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었다. 자신의 부하가 자신을 공격하는 자를 반드시 처리해 줄 거라고 믿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었다. 서고트족 부하도 분명히 다른 기병에게 공격받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공격받더라도 알라리크를 우선 지켜내려고 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자신이 아닌 동료를 믿으면서 해야 하는 전술이었다.
알라리크과 아타울프의 선전으로 로마군 기병대는 서고트족을 포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주춤거렸다.
그러나, 보병대 본대는 로마군 트리아리에 밀려서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지쳐서 달리는 말처럼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로데리크는 다리가 꼬여서 휘청였다. 몇 시간이 지나자 처음의 집중력이 점점 사라졌다. 눈앞에서 칼이 번득이는데도 방패를 든 팔이 무거워서 버틸 수 없었다.
“못 버티겠어.”
옆에 선 비터리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
로데리크는 대답할 기운도 없었지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비명을 지르며 그의 옆에 서 있던 서고트족이 또 한 명 쓰러졌다.
“프린키페스 앞으로!”
스틸리코는 드디어 맨 뒤에 있던 로마군 최정예부대 프린키페스를 투입했다. 서고트족은 체력이 떨어져서 쓰러지기 직전인데, 이제 막 전투에 투입된 노련한 프린키페스를 상대해야 했다.
트리아리의 자리를 대신한 프린키페스는 그야말로 백전노장들이었다. 전쟁터에서만 십년 넘게 구른 그들은 표정만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주름진 이마, 칼집이 난 얼굴, 부리부리한 눈빛에 물어뜯을 듯이 벌어진 입가를 보면 소름이 끼쳤다.
로데리크는 욕할 기운도 없었다. 비터리크는 겁에 질려서 달달 떨었다.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저 버티는 방법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머리에서 나지 않았다.
쉭 소리와 함께 로데리크의 눈앞에서 뭔가가 번쩍 했다. 그의 뺨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프린키페스의 칼이 그의 뺨을 스친 것이다. 저 칼에 지금까지 수천 명의 피가 묻었을 것이고, 이제 그의 피까지 더해졌다. 이러다 어느 순간 그 칼이 그의 목을 꿰뚫고 말 것이다. 로데리크는 그 순간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정신 차려!”
그는 동생에게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소리쳤다. 순간 도망칠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봐야 달려가다 뒤에서 내리치는 로마군 기병대의 칼에 당할 것이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기 위해서 고개를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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