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비터리크의 길안내를 받아서 어두운 밤거리를 달려갔다. 도착한 곳은 노멘타나 성문 앞이었다.
“누구냐!”
로마군 병사들이 칼을 들이대자, 비터리크는 포도주병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포도주라고? 누가 주는 건데?”
병사들이 입맛을 다시며 포도주병을 살펴보는 사이에 그의 뒤에 서있던 서고트족들이 다가와서 로마군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두 번째 성문이 열리자, 그곳에서도 대기하고 있던 서고트족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 번째 성문은 지키는 병사의 숫자가 많았다. 비터리크는 집에 불을 질러서 시선을 끌자고 했다.
로데리크는 비터리크가 불을 지르자고 한 건물을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누미디아에서 공수해 온 희귀한 나무와 동상으로 정원을 꾸민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아깝게 저걸 불태우자고? 다른 건물은 안 돼?”
비터리크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권력가의 집을 태워야 병사들이 달려와서 불을 끄지. 서민들 집을 불태우면 소방관들만 와.”
알라리크는 집에 불을 지르도록 했다.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자 불길이 솟구치며 훨훨 타올랐다.
“불이야!”
로마군 병사들은 갑자기 건물에 치솟은 불길을 잡기 위해서 항아리에 물을 채워서 들고 뛰어갔다.
“어서 불을 꺼!”
그런데 한참 물을 퍼붓고 있는데, 다른 건물에서 또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뭐야? 저쪽에도 불이 났는데?”
그들은 설마 로마 성벽 안에 야만족들이 돌아다니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로마군이 불을 끄느라 허둥거리는 사이에 12개의 성문이 하나씩 차례로 열렸다.
12개의 성문으로 10만 명의 야만족들이 꾸역꾸역 로마로 들어왔다. 날이 밝자 로마인들은 시내에 야만족들이 우글우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원로원, 광장, 시청,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교회,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도서관 등 주요 거점마다 서고트족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투는 얼마 벌어지지 않았다. 백만 명 가까이 살고 있었던 로마였지만, 무장을 한 병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성벽 주위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로마군은 이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주인님! 야만족이 왔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노예가 침실로 들어와서 주인을 깨웠다. 원로원 의원 람파디우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문을 부수고 야만족이 들어왔습니다. 주인님을 모셔오랍니다.”
“그럴 리가.”
어제 밤만 해도 거리는 안전했다. 전투가 벌어졌다면 비명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침실을 나간 의원은 그의 곁을 지나쳐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침실로 쑥 들어가는 야만족 병사를 보고 깜짝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건 꿈이야.’
생시인지 악몽인지 분간이 안 갔다. 침실에 들어간 야만족 병사는 값비싼 유리 화병을 집어들어서 꽃과 물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그의 비단 이불에 유리 화병을 둘둘 말아서 들고 나갔다. 복도에도 수십 명의 야만족 병사들이 고급 카페트를 밟고 다니며 조각품과 장식용 도자기를 들고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나와 수레에 실었다.
“뒷문에 가마를 대기시켜.”
공포에 질린 의원은 도망치려 했다.
“야만족들이 거리를 봉쇄했습니다. 밖을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로마에 계엄령이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다른 노예들에게 깨워서 응접실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응집실로 들어가자 가족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서고트족 백인대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원로원 의원 람파디우스.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께서 그대의 집 안에 있는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하십니다. 별도로 몸값 500 리브라를 지불하라고 명하셨습니다.”
“500 리브라?”
람파디우스는 그의 재산을 재빨리 머릿속으로 헤아려보았다. 그의 재산의 상당부분은 농장과 빌라, 노예 등이었다. 비밀금고에 보관해 놓은 현금은 고작해야 100리브라 정도였다.
“그런 큰돈은 없소.”
“없다면 몸값이 준비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뭐요?”
백인대장이 눈짓을 하자, 서고트족 병사들이 그의 양팔을 붙잡고 끌고 나갔다. 람파디우스는 질질 끌려가며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이거 놔라! 감히 야만족 따위가 원로원 의원의 몸에 손을 대다니.”
람파디우스는 말을 계속 잇지 못했다. 그의 한쪽 팔을 붙잡고 있던 서고트족 병사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기 때문이었다. 목이 부러질 것 같은 억센 힘이었다. 병사는 피가 몰려서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못쉬고 컥컥거리는 그에게 으름장 놓았다.
“조용히 해라. 또 한 번만 허락 없이 입 놀리면 이빨을 다 뽑아줄 테니.”
람파디우스는 목이 막혀 말을 할 수 없어서 눈을 껌벅껌벅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야만족은 집에 들어가서 방마다 샅샅이 뒤지며 값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약탈해서 실어나갔다. 금, 은, 보석 뿐 아니라, 유리잔, 식기, 염색한 옷, 향신료, 포도주, 가죽제품, 생활용품까지 손에 집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갔다.
알라리크는 길게 머물러봐야 자신들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반감만 거세지고, 자신들은 오만하고 나태해질 것이다. 적당히 챙길 것 챙기고 빨리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좋았다.
“5일 후에 떠날 거야. 이틀은 출발준비를 해야 하니, 3일 안에 다 들고 나와.”
그는 부대별로 조직적으로 구역을 정해주었다.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군수물자를 옮기는 것처럼 수레에 약탈품을 쓸어 담았다.
이미 1년 이상 로마와 라벤나 인근을 오가며 지냈기에 로마의 돈 많은 부자들 명단도 파악한 상태였다. 부자들과 원로원의원 등 유력인사들을 끌고 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굴욕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던 원로원 의원들은 너도나도 막대한 황금을 가져다 바치고 목숨을 구명했다.
람파디우스는 좁은 감방에 죄수처럼 갇혀있었다. 아침에 끌려 와서 저녁시간이 다가오도록 물과 마른 빵 한 조각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손도 대지 않았을 음식이었지만 뭐든 먹고 기운을 내야 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끙끙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시오. 침실 침대 아래 바닥을 들어내면 비밀 금고가 있소. 거기에 금이 있으니 가져가시오.”
문이 열렸다. 서고트족 장교가 들어와서 그의 앞에 앉았다.
“금 500리브라를 내 놓으면 풀어주겠소. 집에 연락해서 가져오라고 하던지, 아니면 비밀금고 위치를 알려주면 우리가 가서 가져오겠소.”
람파디우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무슨 그런 큰돈이 있단 말이오?”
“있는 것 다 알고 있소. 원로원 의원으로 귀하신 몸이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몸값을 많이 내야지.”
람파디우스는 우는 소리를 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정말 돈이 없소. 있는 거라고는 멀리 떨어진 조그만 농장뿐이오.”
속주에 별장과 농장은 있지만, 당장 수중에 현금을 가진 것은 없었다.
“그럼 농장을 담보로 돈을 빌려서 내면 되잖소.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자가 붙으니 그것도 감안해서 계산하시오.”
그는 편지를 쓰라고 펜을 내밀었다.
“몸값을 성실하게 치르겠다는 의미로 일단 집에 있는 현금이라도 일부 가져오라고 하시오. 그러면 때리지는 않고 농장을 팔아서 돈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주겠소.”
람파디우스는 옆방에서 들려왔던 비명 소리가 떠올랐다. 소름이 쫙 끼쳤지만, 그의 전 재산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500리브라나 되는 큰돈을 내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집에 현금이 없다니까요.”
서고트족은 채찍을 집어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짝 소리가 났다.
“선택권을 주겠소. 채찍으로 맞겠소, 주먹으로 맞겠소? 나는 채찍이 편한데.”
벌개진 그의 주먹에 피가 묻어 있었다.
람파디우스는 현기증이 느껴졌다. 노예를 매질한 적은 많았어도 자신이 야만족에게 맞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자신의 목을 졸랐던 억센 손의 감촉이 떠올랐다.
“잠깐, 잠깐.”
그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서고트족을 향해 떨리는 양손을 들었다.
어차피 돈을 모두 지급하지 않으면 풀려날 수 없었다. 얻어맞고 굶주리며 야만족에게 포로로 계속 끌려 다니느냐, 조용히 며칠 있다가 풀려나느냐 였다. 돈을 빼앗길 거라면 몸이라도 성하게 풀려나는 게 나았다.
“알겠소. 가져오라고 하겠소.”
그는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어 집에 있는 가족에게 금고에 있는 금을 모두 가져오라는 편지를 썼다. 아울러 그의 농장을 담보로 잡히거나 팔아서 가능하면 빨리 나머지 몸값을 가져오라고 썼다.
“역시 원로원 의원이라 현명하시오. 옆방의 부동산 업자는 두 대 맞고 나서야 금고가 있는 곳을 실토하던데.”
서고트족은 씨익 웃으며 편지를 들고 나갔다.
로마시민들은 끌려간 가족의 몸값을 치르기 위한 돈을 서로 빌리러 다니느라 아수라장이었다.
몸값도 치르지 못한 인질을 그냥 풀어줄 수는 없으니, 서고트족과 함께 끌고 가거나 죽여야 했다.
알라리크는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고, 짐이 되게 많은 인질을 끌고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요비우스를 불러서 은밀하게 제안했다.
“국가에서 몸값을 낼 능력이 없는 인질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어떻소?”
요비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야 좋지요. 그런데 지금 로마 시내 어디에도 그만한 돈이 없을 겁니다.”
“다른 도시에서 돈을 빌릴 신용은 있지 않소?”
“다른 도시에서 빌려올 수는 있습니다.”
“돈을 빌려오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몸값을 낮춰주겠소.”
“알겠습니다. 일단 규정은 만들어보겠습니다.”
요비우스는 의원들을 소집해서 신속하게 시민법전에 규정을 만들었다.
“시민들이 돈을 빌릴 곳이 없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의 법규정이라도 마련해서 시민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국가에서 인질의 몸값을 빌려주고, 풀려나면 5년간 노역을 하거나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갚도록 하는 법이었다. 인질들은 목숨을 구하고, 국가는 빌려준 돈을 노역으로 받으면 되니 손해가 아니었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법은 신속히 통과되었다.
긴급하게 어음을 발행해서 이웃도시로부터 차관을 도입했다. 돈이 도착하자 법 규정에 따라 원하는 인질들에게 몸값을 빌려주었다. 알라리크는 부자들만 남겨놓고 서민들은 적당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몸값을 낮춰주어 석방했다. 불필요한 살육이 벌어지지 않으면서 몸값을 받아낼 수 있었다.
로마 인맥을 충분히 활용해서 효율적으로 서고트족의 이익은 늘리고 로마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줄이며 약탈을 했다.
그렇다 해도 모든 곳에 그의 통제가 미치지는 않았다. 교회는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로마신을 섬기는 신전은 파괴되고, 건물들은 불에 탔다. 황제들과 장군들의 석상은 무너져서 돌무더기가 되었고, 부피를 줄이기 위해 아름다운 동상을 녹여서 무게로 나눠 수레에 실었다. 섬세한 유리잔과 도자기를 거칠게 수레에 겹쳐놓는 바람에 깨어져버렸다. 화려한 로마는 5일 만에 헐벗고 황폐한 도시가 되었다.
알라리크는 무서워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비는 로마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런 식의 복수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로마인과 공존하고 싶었고, 로마의 가치있는 유산을 보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접시 교회에서 가져온 것 아니야?”
이제는 청년이 된 발리아는 약탈하는 야만족을 살피고 다니며 규율을 잡고 있었다. 약탈에 눈이 먼 10만명의 병사들을 통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 이교도 야만족이 들고 있는 접시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건 성 베드로가 새겨진 교회 의전용 접시잖아. 도로 갖다 놔. 교회의 물건을 건드리면 저주받아. 전염병에 걸려서 죽을 수 있어.”
겁먹은 야만족은 접시를 도로 교회에 갖다놓기 위해서 달려갔다.
발리아는 소년을 끌고 가는 동고트족에게 말했다.
“이 애는 몸값을 받기에는 너무 어려. 노예로 팔리지도 않을 거야. 잘 돌봐주지 않으면 며칠 못가서 열이 나고 죽을지도 몰라. 밥만 축낼 수 있으니 집에 가게 놔 줘.”
묶은 손을 풀어주자 소년은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첫 약탈에서 동전을 받고 기뻐하던 발리아는 로마인들이 그의 생각처럼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저 그들과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단지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서 어리석은 지도자의 지배를 받기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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