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위기
12월이 되었다. 라인강은 걸어갈 수 있게 단단히 얼어붙었다.
반달족, 알라니족, 수에비족 연합이 라인강 상류의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서 도하하기 위한 회합을 열었다. 그 곳은 로마군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지만, 병력이 많이 줄어서 방어선이 얇았다.
“지금 바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겨울까지 또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군데리크는 당장 쳐들어가자고 주장했다. 친 로마파 알라니족의 고아르가 반대했다.
“라인강 하류는 프랑크족이 지키고 있고, 도나우강은 서고트족이 지키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건너간단 말이오? 희생이 클 거요.”
여름에 라인강을 건너 프랑크족을 찔러 봤지만 고디기젤이 전사하며 실패했고, 가을에는 도나우강을 건너 판노니아를 찔러봤는데 역시 알라리크에게 패퇴했다.
“두 방어선 사이에 로마군이 지키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방어선이 얇으니 그곳을 노리는 겁니다.”
“로마군이 공격받으면 프랑크족이 세 시간 안에 구원군을 보낼 거요.”
“그러니 세 시간 안에 끝내야죠.”
반 로마파 알라니족 레스펜디알은 군데리크에게 동조했다.
“맞는 말이오.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금 돌파하는 게 맞소.”
고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친 로마파였지만, 이미 대세는 군데리크와 레스펜디알이 주장하는 대로 라인강을 건너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로마제국이 강했으니 그쪽에 붙었지만, 로마가 이길 힘이 없다면 그 역시 강한 편에 붙어야 했다.
부르군트족과 다른 야만족도 그들을 따라서 가겠다고 했다. 4개 부족이 짐을 모두 수레에 싣고 온 가족이 함께 강을 건너왔다. 15만명의 야만족이 수레를 끌고 한꺼번에 얼음 위를 썰매를 타듯이 미끄러져 왔다.
강이 얼어붙으면 강을 이용해서 방어하는 지형적 이점이 사라졌다.
반달족이 앞장서서 방어선을 뚫었다. 병력이 얼마 없는 로마군은 긴급히 프랑크족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프랑크족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달족이 방어선을 무너뜨린 상태였다. 프랑크족은 그들을 다시 방벽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지만, 알라니족이 합세하면서 프랑크족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에서 가까운 마인츠가 뚫리고 트리어가 함락되자, 갈리아의 랭스, 파리, 오를레앙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야만족은 부족별로 서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갈리아를 약탈했다.
갈리아에는 거의 수비 병력이 없었다. 방위를 로마군에게 맡기고 농사만 짓던 갈리아인들은 스스로 병력을 모집하지도 못했고 훈련시킬 줄도 몰랐다. 야만족이 갈리아를 가로질러서 동에서 서로 횡단하도록 아무도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이제는 야만족의 침입을 신이 내린 벌로 받아들이고 체념을 하는지도 몰랐다.
일부 야만족은 약탈을 하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아예 마을에 눌러앉아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벗어날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불타고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말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값을 요구하거나 노예로 팔 줄도 몰라서 무작정 죽이고 빼앗는 살육이 이어졌다.
마을은 불타고 야만족이 짐승처럼 돌아다니며 그들을 먹어치웠다. 주민들은 기도를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야만족이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왔습니다.”
가우덴티우스는 게르마니아로부터 온 긴급 연락을 스틸리코에게 전달했다.
“규모가 얼마나 되나?”
“15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15만명이면 지난번 동고트족의 규모에 비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부족별로 몇 만 명씩 각자 따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각개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 이동하는지 매일 보고해.”
이전에 서고트족이나 동고트족이 쳐들어왔을 때 이탈리아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했다. 그들은 스틸리코를 두려워해서인지 이탈리아로 오지 않고 갈리아를 가로질러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그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로 뭉쳐서 몰려다니지 않았으니 개별적으로 작전을 세워야 했다.
야만족과 싸우기 위해 군단을 재편하고 있는데, 브리타니아에서 소식이 도착했다.
“브리타니아의 병사들이 마커스를 죽이고 그라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고 합니다.”
불만에 찬 브리타니아 병사들은 통제가 되지 않고 폭도나 다름없이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마커스를 죽이고 그라티아누스를 황제로 내세웠다.
그라티아누스와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기에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병사들에게 바다를 건너 갈리아를 정벌하러 가자고 바람을 넣고 있고, 그라티아누스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황제가 되는 것을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가 콘스탄티누스와 병사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말이 갈리아를 정벌하러 가는 것이지, 약탈하러 가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야만족이 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때, 브리타니아 반란군까지 넘어오면 갈리아 주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로 하기 어려운 고통이 될 것이다.
그렇다해도 로마군끼리의 내전은 가능한 한 피하는 편이 좋았다. 굳이 로마군끼리 싸우며 귀중한 병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갈리아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동로마의 에피루스에 도착했다. 막상 서고트족이 동로마 영역에 들어오자 파랗게 질린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다.
“알라리크를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겠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황제에게 간했다.
“그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으로 진군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서로마에 사신을 보내서 도발을 멈춰달라고 하십시오.”
“알라리크가 서로마 황제의 말을 들을까?”
아우렐리아누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라리크를 일리리쿰 사령관에 임명한 것이 스틸리코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알라리크는 그의 지령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황제는 몇 번이나 싸운 그들이 손을 잡았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거야 알라리크가 자꾸 문제를 일으키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관직을 준 게 아닌가?”
“스틸리코도 야만족 출신입니다. 충분히 알라리크와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고트족과 내통한 가이나스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핏기없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 그렇군. 둘이 연합해서 나를 죽이려는 거야. 이를 어쩌면 좋지?”
“서로마의 원로원과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구원을 청하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마의 사신들을 박해해서 문제를 만든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서로마에 아는 연줄을 총동원해서 스틸리코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동로마의 사신은 서로마의 반 스틸리코파 의원으로 알려진 람파디우스를 찾아갔다.
“알라리크가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의 일리리쿰 속주를 달라고 겁박하고 있습니다. 알라리크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스틸리코가 분명합니다. 이를 멈춰 주십시오.”
람파디우스는 아쉬울 때만 달려오는 동로마 사람들에게 썩 감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스틸리코에 관한 소문에는 관심이 있었다.
“스틸리코 사령관이 다키아같은 변두리 속주를 얻어서 뭘 하겠습니까?”
서로마 입장에서는 동로마의 영토를 서로마의 관할로 가져온다는 것이 기분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서로마의 사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동로마이니만큼, 서로마 원로원은 알라리크의 동로마 진군에 은근히 고소해하고 있던 차였다.
“동로마의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얻으면 라에티아 판노니아 노리쿰까지 해서 일리리쿰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관할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일리리쿰을 로마에서 독립시켜서 제국을 삼등분하려는 겁니다.”
“왜요? 알라리크는 제국을 삼등분해서 갖고 싶겠지만, 그로 인해서 스틸리코 장군이 얻는 이득은 없잖습니까? 왜 알라리크를 조종하는 게 스틸리코라고 생각합니까?”
람파디우스가 생각하기에 야만족의 침입이 잦은 국경지방인 일리리쿰을 따로 떼어내서 취해서 가져봐야 스틸리코가 얻을 이득이 없었다. 사신은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일리리쿰을 독립시켜서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일리리쿰 황제로 만들려는 겁니다.”
람파디우스는 흐음 소리를 내며 턱을 쓸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었다. 스틸리코가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 한다면 쓸모없는 땅이라도 영토가 필요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에우케리우스를 일리리쿰 군사령관으로 임명해서 제국을 삼등분한다. 가능성 있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원로원 의원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동로마 사신은 호노리우스 황제의 환관 올림피우스에게도 찾아갔다. 올림피우스는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은 저도 하고 있습니다. 전투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었는데 일부러 놓아주었다고 하더군요.”
“그것 보십시오. 로마를 공격한 적을 놓아주고, 그로 하여금 로마를 공격하게 하다니, 이게 반역자가 하는 짓이 아니고 뭡니까?”
“역시 스틸리코가 뒤로 딴 마음을 먹고 있었군요. 이거 참 큰일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동로마 사신은 호노리우스에게 매달렸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공격을 멈춰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의 말씀은 들을 것 아닙니까.”
호노리우스는 뚱한 표정으로 외면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소? 내 목숨도 위태로운 판에.”
황제도 스틸리코를 움직일 수 없다고 하자, 동로마 사신은 이렇게 된 이상 직접 스틸리코를 만나서 부딪쳐 볼 결심을 했다. 그는 스틸리코에게 찾아가서 사정했다.
“제발 동로마 공격을 멈춰주십시오.”
사실상 동로마 황궁이 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틸리코가 바란 대로 동로마 사신이 그에게 도움을 청하며 대화를 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스틸리코는 정중하게 동로마 사신을 맞았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동로마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알라리크가 에피루스로 병력을 끌고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게 서로마가 동로마를 공격하는 의도가 아니면 뭡니까?”
“나는 그에게 군사령관으로서 일리리쿰을 지키라고 했지, 동로마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으로 동로마의 다키아와 모에시아 속주를 일리리쿰 관할로 취하라고 명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에피루스로 간 것은 동로마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주를 편입시키고 순찰하러 가기 위해서일 겁니다.”
동로마 사신은 두려워하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알라리크가 모에시아로 가는 길에 방향을 바꿔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지 어찌 압니까?”
“그가 속주를 통제하는 것을 동로마가 인정한다면, 그도 불필요한 싸움을 할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는 편지에 항상 황제의 신하이며 로마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을 세워서 호노리우스 황제께 잘 보이려고 과시하는 겁니다.”
동로마 사신은 그에게 사정했다.
“다키아와 모에시아 속주를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 서고트족이 살게 되면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은 코앞에 서고트족의 침입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동로마 황궁의 입장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속주를 넘겨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이득이 없는 땅이지만, 하루이틀 거리에 있는 모에시아에 서고트족 부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그들을 믿는다면 든든하겠지만, 믿지 못한다면 두려운 일이었다. 동로마의 야만족 혐오와 이단 배격을 생각하면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서고트족에게 속주를 넘겨주기 싫어하는 마음도 이해는 갔다.
그렇다고 해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도나우강 국경을 확실히 점유하고 안정시켜 놓아야, 브리타니아의 반란군과 갈리아에 침투한 야만족을 퇴치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서로마 사신을 박해한 것을 사과하고 그런 일이 또다시 없도록 재발 방지를 약속해주시면 어떻습니까? 동로마와 서로마가 화친하고,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알라리크가 관할하도록 승인해주면 그도 물러갈 겁니다. 알라리크는 로마가 분열하는 틈을 노리고 들어온 겁니다. 동로마와 서로마가 화목하게 지내고 하나와 다름없는 단단한 동맹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면, 알라라크가 감히 동로마를 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할 겁니다.”
동로마 사신은 교묘하게 자신은 발을 빼며 압박하는 스틸리코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녕 알라리크를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게 스틸리코 장군이 아니란 말입니까?”
스틸리코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그 자가 누구의 말을 듣는 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동서로마가 불화하니 그 기회에 편승해서 호노리우스 폐하께 과잉충성을 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려는 겁니다. 동서로마가 화합하면 그가 끼어들 틈이 없을 겁니다.”
과거에 동로마 황궁은 알라리크를 이용해서 스틸리코를 압박했다. 이제 그 신세가 뒤바뀌어 스틸리코가 알라리크를 이용해서 동로마 황궁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동로마 사신은 하릴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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