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반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온 서고트족은 약탈하고 남진했다. 그들은 바닷가를 따라서 이동하며 그리스의 도시들을 하나씩 밟아갔다.
코린토스, 아르고스, 스파르타 등 고대 그리스의 유서깊은 도시를 둘러보고 금과 돈을 빼앗아서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모두 빼앗고 주민들은 노예나 몸값을 받기 위한 인질로 끌고갔다. 코린토스에서 끌고 간 주민을 아르고스에서 노예로 팔고, 아르고스에서 끌고 간 주민을 스파르타에서 되팔아서 돈을 챙겼다.
날씨는 음침한 북쪽 숲속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매일같이 따듯한 햇빛이 부드럽게 그들의 피부를 그을렸다. 그들은 마치 관광이라도 하듯이 들뜬 기분으로 그리스를 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로마군인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고, 성을 지키는 로마군인들은 지원군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얼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배가 고프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빼앗아서 나오면 그만이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반년이 넘게 서고트족들은 팔자 좋게 놀고먹으며 그리스를 여행했다.
서고트족은 생각 없이 즐거웠지만, 알라리크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리스를 돌아다닐수록 어서 땅을 가지고 서고트족의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끝없이 사방으로 뻗어있는 돌로 포장된 도로가 이어졌다. 어느 마을을 가든 몇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있었고, 뜨거운 사우나를 할 수 있는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깨끗한 물이 집집마다 상수도로 전달되었다. 집에서 번거롭게 장작으로 오븐의 온도를 올리지 않아도 되도록 밀가루와 약간의 돈만 주면 빵을 구워주는 빵집도 있었고, 옷을 하얗게 세탁해주는 세탁소도 있었다.
“로마 놈들, 언제 이런 것들을 마을마다 지어놨을까요.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네요.”
수만 권의 책이 보관된 도서관과 토지와 건물의 주인이 적힌 대장이 보관된 법원을 보며 아타울프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나왔다. 알라리크는 씁쓸하게 말했다.
“로마는 천 년 된 나라니까. 우리도 땅을 얻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이런 시설을 만들자.”
그러나, 그가 보기에 로마 시민들의 정신력은 야만족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런 문화적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준이 못 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약한 겁쟁이가 아니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다. 소리치며 눈만 부릅떠도 살려달라며 돈을 내놓았다. 이웃이 몸값을 낼 돈이 없어서 노예로 끌려가도 자신만 안전하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정점에는 없느니만 못한 황제가 있었다. 자신의 백성들이 약탈당하던 말던 자기 안전만 생각하고, 자신의 부하들이 외부의 적을 끌어들여서 서로 싸워도 무관심한 황제라니.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서고트족에 족장이 그런 무능한 자라면 단번에 끌어내려지던지 살해되어 족장이 바뀔 것이다. 그런데, 제국은 무능한 자에게서 탐욕스러운 자로, 탐욕스러운 자에서 다시 무능한 자로 계속해서 권력이 대물림되었다. 부유한 귀족들은 계속해서 부유하고, 로마의 농노와 야만족들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서고트족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한가롭게 물놀이를 즐겼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작년까지 매일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물을 나르며 농사를 지었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파도가 고운 모래에 부딪쳐서 알라리크의 발치에서 거품을 내고 있었다.
물놀이를 하면서 웃음 짓는 서고트족을 보면서 알라리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서고트족을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이 그리스에서 분탕질을 치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로마 황제의 명령이 없이는 동로마로 군대를 끌고 들어갈 수 없었고, 황제도 위급함을 느껴봐야 한다는 생각에 1년 가까이 모른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전혀 깨닫는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동로마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오랜 만에 가이나스로부터 온 편지였다. 알라리크가 발칸반도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 등 동로마의 온갖 지역을 약탈하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가이나스가 황제에게 출정하겠다고 요청했지만, 황제는 나라가 약탈당하건 말건 자신이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만 지키고 있으라고 출정명령을 내려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동로마의 자업자득입니다. 우리가 알라리크를 끝장낼 수 있었을 때 군대를 물리라더니, 알라리크에게 당하는 꼴이 참 보기 좋습니다.”
스틸리코의 부하 장수들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야만족에게 로마제국의 영토가 짓밟히는 것이 기분이 몹시 언짢은 목소리였다.
스틸리코는 가이나스에게 서고트족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가 있으니 동서로마군이 동시에 포위해서 잡자고 답장을 보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코린토스에서 길목만 막으면 서고트족은 도망칠 곳 없이 반도에 고립될 것이다.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서고트족이 아니라 에우트로피우스였다.
티마시우스와 여러 사령관을 핍박한 그가 스틸리코가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로 오면 어떤 방해공작을 하고 음해를 할지가 더 골치 아팠다. 스틸리코가 군사를 이끌고 동로마 영토로 들어가면 분명히 길길이 날뛰면서 그가 반역의 조짐이 보인다고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험담을 할 것이다.
스틸리코는 마침내 출정 명령을 내렸다.
“동로마로 간다.”
북아프리카의 길도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서고트족 먼저 매듭을 지어놔야 했다. 언제까지 서고트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끌려 다닐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알라리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지켜 볼 생각은 없었다.
1만명에서 7천명으로 줄어들었던 알라리크의 병사는 이듬해 봄에 이미 그 이상으로 회복해 있었다. 게다가 1년 가까이 저항이 없이 그리스를 휘젓고 다니는 그의 승전에 고무되어서, 꾸준히 그의 무리에 합류한 야만족들의 숫자가 1만4천명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불어나 있었다. 더 커지기 전에 지금쯤 다시 한번 꺾어놔야 했고, 동로마제국이 약탈당하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스틸리코는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 코린토스에 상륙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내륙과 병목처럼 좁은 길목으로 연결되어서 코린토스만 점령하면 도망칠 길이 없었다.
서고트족은 반도 남단의 스파르타를 약탈한 후에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로마군은 코린토스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아르카디아에서 마주칠 것이다.
스틸리코는 동쪽에서는 자신이 코린토스를 막으면서 전진하고, 가이나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반대방향에서 배로 상륙해서 포위해가면 서고트족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이나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가이나스는 황제에게 스틸리코의 작전을 설명하고 동로마군의 출전을 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지금이 서고트족을 박살낼 기회입니다. 이번에 그들을 포위해서 잡으면 수년 간 야만족 걱정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로 야만족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수도가 비워지면 반달족, 훈족, 다른 이민족이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나. 절대 허락할 수 없네.”
황제는 끝내 출정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가이나스가 분노를 곱씹으며 절망에 빠져서 나가버리자, 황후가 황제에게 다가와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잘하셨어요. 동로마군이 출정하면 콘스탄티노플은 빈집이 되어버립니다. 야만족은 언제든 진압하면 그만이지만, 황제께서는 무탈하셔야 합니다.”
환관 에우트로피우스도 말했다.
“스틸리코 장군은 2만의 병사를 가지고도 고작 1만4천의 야만족을 무찌르지 못해서 지원병력을 요청하다니, 과연 제대로 싸울 의사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황후가 옆에서 더욱 부채질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스틸리코도 야만족 출신이라서 알라리크와 싸울 마음이 없는 지도 모르죠.”
황제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스틸리코도 반달족 출신이었지.”
에우트로피우스는 큰 일라도 날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갑자기 군대를 돌려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황제가 두려운 표정으로 고민에 잠기자, 황후와 에우트로피우스는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군대가 코린토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로마군을 꺾어서 서고트족의 기를 살려줄 생각이었다.
지난번에 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놓았다.
로마군과 무기도 같았고, 보병과 기병의 비율도 비슷하거나 더 우위에 있었고, 전술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패한 것은 실전 경험으로 쌓인 순간적인 대처능력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았다.
알라리크는 그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병사를 둘로 편을 갈라서 연습을 시켰다. 병사들이 점점 전투에 능숙해지는 것이 그의 눈에도 보였다. 로마군과 싸워도 힘과 기능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다.
서고트족은 아르카디아에 도착했다. 아르카디아로부터 서북쪽은 넓은 산과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전투가 펼쳐지는 동안 서고트족 병사의 가족이 숨어 있을 수 있었다. 후퇴하며 유인해서 전투를 펼치기에도 적절한 지형이었다.
저 멀리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로마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꿈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스틸리코였다.
스틸리코는 온갖 약탈품으로 그득그득 채워진 서고트족의 수레와 그동안 잘 먹어서 살이 찐 그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잘 지냈나. 얼굴이 좋아졌군.”
알라리크도 앞으로 나와서 인사를 했다.
“그리스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네. 어디를 가도 시설이 좋아.”
열정에 들떠있던 2년 전 보다 침착하고 냉정해진 말투였다.
‘그리스를 돌아보면서 많은 걸 느꼈나보군.’
넓은 로마제국의 마을마다 깔린 도로와 편의시설과 기반시설을 보면서 야만족과 로마제국의 수준차이를 여실히 느꼈을 것이다. 어느 야만족이든 로마 영내에 들어오면 문화충격을 느꼈다. 한번 지나가면서 보는 것도 놀랍지만, 오래 살아보면 또 다를 것이다. 샘물처럼 퍼내고 퍼내도 끝없이 새로운 것이 나오는 걸 보면서 알수록 감탄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리스만 살기 좋은 게 아니야. 로마제국은 어디든 시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체계가 잡혀 있지.”
스틸리코는 지금쯤은 알라리크가 땅만 있다고 이런 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건 깨달았으리라고 여겼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둑질이나 하고 돌아다닐 건가? 뭘 모르는 야만족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로마에 대해서 알 것 다 아는 네가 왜 이런 의미 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건데?”
“시설만 좋으면 뭐 해.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썩었는데.”
서고트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알라리크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 진 것처럼 보였다.
“무질서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야만족의 머리로 이런 제국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나?”
“그러는 로마는 법을 잘 지켰나? 겉으로야 지키는 척 하지만, 뒤로는 다 딴 짓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동로마 황궁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도 모르고 꿋꿋이 동로마 제국을 지키려는 스틸리코가 미련해보였다. 로마를 지키려는 그를 도리어 공격하는 로마황궁에 무슨 미래와 희망이 있을까.
스틸리코도 동로마황궁이 알라리크를 지원하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루피누스는 죄값을 치렀다.”
“과연 루피누스 뿐일까?”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황제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알면서도 저렇게 충성을 바치는 건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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