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에티아
수에비족은 강이 얼자 알라리크와 약속한 대로 라에티아로 쳐들어 왔다.
스틸리코는 자신이 직접 가서 빠르게 해결할 필요성을 느꼈다. 서고트족이 이미 이탈리아 귀퉁이에 한발을 들여놓고 있는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서고트족이 코앞에 있는데 이탈리아를 떠난다고?”
라에티아로 가겠다는 스틸리코의 보고에 호노리우스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되물었다. 해가 바뀌어 16살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황궁에만 틀어박혀 지내서, 생각이나 행동은 아직도 응석받이 어린아이 같았다.
“밀라노는 안전한 성이어서 공격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서고트족이 밀라노에 접근하면 제가 돌아와서 막으면 됩니다.”
스틸리코의 말에도 호노리우스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국경보다 이곳을 지키는 게 우선 아니야?”
이탈리아에 있는 서고트족은 앞으로 전진했을 때 포위하고 섬멸해야 하지만, 라에티아의 야만족은 국경을 넘어와서 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 골치아팠다. 때를 기다려야 하는 형세와 초반에 제압해야 하는 경우의 차이를 황제에게 설명해봐야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스틸리코는 다시 한 번 황제를 안심시켰다.
“서고트족이 아퀼레이아에서 밀라노에 오려면 강을 4개는 건너야 합니다. 강 앞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넌다 해도 제가 돌아올 시간은 충분합니다.”
“라에티아에서 밀라노에 오려면 알프스를 넘어야 하니 한참 걸리잖아.”
스틸리코는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어를 위해서 알프스를 수도 없이 넘어 다녔기 때문에 곧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황제는 우는 소리를 하며 골이 나서 뿌루퉁했다.
“국경을 지키는 건 황제의 군대잖아. 왜 황제군이 황제를 지키지 않고 다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거야?”
스틸리코는 16살쯤이면 이제 국가가 없으면 황제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되었는데 씁쓸해하면서 말했다.
“영토를 지키지 않으면 황제의 권위도 없습니다. 속주민들은 자신을 지켜주기 때문에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속주세로 황제의 군대가 유지되는 겁니다. 그들을 지켜주지 않으면 충성을 기대할 수 없고, 속주가 없이는 로마제국도 모래성처럼 흩어질 겁니다.”
그의 말에 호노리우스는 입을 비죽이며 출전을 허락했다.
스틸리코가 나가자 환관 올림피우스가 황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서고트족이 올 걸 예상하면서도 라에티아로 가버리다니, 스틸리코 장군도 너무하십니다. 그깟 속주의 땅이 조금 약탈당한다고 해서 황제를 야만족 앞에 버려두고 가다니요.”
황제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위험한데 먼 국경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
올림피우스는 황제에게 귓속말을 했다.
“장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로 더 깊이 들어온 후에 싸울 생각이랍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마도 제 추측에는 스틸리코 장군이 일부러 라에티아로 가서 자리를 비우고, 서고트족을 황제폐하가 계신 밀라노로 끌어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즉, 황제 폐하를 서고트족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올림피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스틸리코로부터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서 얼토당토 않은 말을 지어내며 모함했다. 어리고 황궁에서만 지내서 판단력이 부족한 호노리우스 황제는 외부로 돌아다니며 일하는 스틸리코와 달리 늘 자신의 곁에 붙어있는 환관에게 더 의지했다.
“나를 미끼로 해서 서고트족을 끌어들이려고 한다고? 그게 진짜야?”
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조심하시라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능구렁이같은 올림피우스의 말에 황제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틸리코는 사루스를 불렀다. 그에게 병사를 주어서 아두아 강 앞에서 서고트족을 막도록 했다.
“적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나만 남기고 끊어.”
다리 앞의 좁은 길목에서 건너오는 적을 맞아 싸우면 소규모 병력으로도 다수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루스가 알라리크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소수의 병력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가장 열심히 싸울 사람이니 충분히 시간을 끌어줄 것이다.
사루스는 큰소리쳤다.
“걱정 마십시오. 알라리크는 한 발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알라리크에게 설욕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투지가 솟는 모양이었다.
스틸리코는 아직 꽝꽝 얼어붙지 않은 가르다 호수의 얼음을 헤치고 배를 타고 알프스로 향했다. 알프스의 설빙이 흘러 내려와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였다.
배에서 내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길은 눈에 덮여 얼어붙었지만,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닐 만 했다. 올라갈수록 공기가 희박해져서 말과 사람 모두 헐떡거렸다. 일 년에 몇 번 씩은 알프스를 넘는 그로서도 겨울의 사나운 강풍을 맞으며 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알프스를 넘지 않았어. 재작년에는 몇 번 넘었더라? 두 번인가, 399년에는 한 번, 398년에는 다섯 번이었지?’
알라리크가 일리리쿰에 온 이후로는 이탈리아를 비울 수 없어서 자주 오가지 못했지만, 그 전에는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오갔다. 그는 추위를 잊기 위해서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알라리크가 수에비족과 연합했을까?’
만약 그가 아퀼레이아에서 겨울을 나지 않고 이탈리아를 가로지르기 시작하면 수에비족과 미리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뭐 내막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었다. 서고트족이 아퀼레이아에서 이탈리아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이 그가 바라는 바였다. 서고트족이 평지로 나오면 그때 산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퇴로를 끊고 일거에 소탕하는 것이다.
그의 계획은 한 달 안에 수에비족과 알레만니족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알프스의 추위도 절정을 지나 다소 누그러질 것이다.
서고트족은 부녀자가 딸려있어서 전진 속도가 느렸다. 밀라노까지는 강도 여러 개를 건너야 하는데, 그들은 배가 없으니 좁은 다리로만 건너가야해서 병목현상으로 시간이 꽤 지체될 것이다. 수만 명이 강 하나를 건너는 데만도 며칠씩은 걸릴 것이다.
혹시나 라에티아에서 그가 돌아가는 시간이 좀 더 늦어진다 해도, 밀라노는 성벽도 튼튼하고 수비하기 좋은 성이니까 포위되어도 몇 달은 버틸 수 있다. 충분히 그가 라에티아에서 돌아갈 때까지 방어할 수 있으리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심해졌다. 눈코입이 얼얼하고 감각이 없었다.
“눈보라가 지나갈 때까지 근처 숙영지에서 쉬어가지.”
도로 근처에 만들어 놓은 숙영지로 가서 참호에 들어가서 불을 피우고 손을 녹였다. 병사들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여름에 다닐 때보다 자주 쉬며 발이 얼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썩을 놈들. 꼭 한겨울에 쳐들어와.”
병사들은 투덜투덜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함부로 야만족을 욕하는 병사는 없었다. 병사들의 절반 이상이 야만족 출신이었다. 로마군 병력에서 야만족을 제외하면 남는 병사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침략자도 그들의 목숨을 지켜줄 전우도 야만족이었다.
라에티아에 도착한 스틸리코는 군단장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았다.
“수에비족이 며칠 째 방어선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기병을 보내서 강을 건너오는 놈들을 쫒아버리고 있는데, 점점 숫자가 많아집니다.”
“알레만니족 움직임은?”
“기병으로 우리쪽 방어선의 빈틈을 넘나들면서 후방을 교란하고 돌아가곤 합니다.”
“막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어.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나?”
스틸리코의 물음에 군단장이 대답했다.
“저들의 마을로 쳐들어가기에는 우리의 숫자가 부족해서 주로 수비만 했습니다.”
“숫자가 부족해도 할 수 있는 공격이 있지 않나.”
스틸리코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잔소리를 하느니 직접 보여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수에비족과 알레만니족의 연합 공격에 국경을 지키는 서로마군이 군데군데 고립되어서 고전하고 있었다.
“수에비족 족장과는 이야기 해 봤나? 요구사항이 뭐지? 가을까지도 별 말 없다가 갑자기 태도가 바뀐 이유가 뭐라던가?”
“올해 수확량이 생각보다 적어서 다들 굶주리고 있답니다.”
“우리가 곡식을 지원해 줬잖아?”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답니다.”
“알레만니족 족장도 같은 의견인가?”
“알레만니족은 돈을 달랍니다.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다릅니다.”
뭔가 핑계를 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봐야 했다.
“수에비 족장과 만나자고 해. 알레만니족 족장과도 따로 시간을 잡아.”
같이 있는 상황에서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부족별로 생각이 다를 테니 의견 대립을 유도해보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들과는 이전에도 몇 번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야만족들이 원하는 것은 대체로 돈, 식량, 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돈과 식량만 주면 물러갔지만, 최근에는 땅을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훈족의 압박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숲에서 생산되는 식량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곡식이 잘 자라는 비옥한 땅을 받고 싶어 했다.
다음날 수에비 족장과의 회담을 위해서 강가로 나가려는데 알프스를 넘어 전령이 도착했다.
“서고트족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답니다.”
역시 수에비족과 알라리크가 미리 이야기가 되었던 거였다.
“하여튼 잔머리는 잘 씁니다.”
가우덴티우스가 밉살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기껏 잔머리를 써서 한다는 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거니 잘 됐지 않나.”
너무 빠르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서고트족의 평지로의 이동은 로마군이 바라는 바였다.
스틸리코는 하루 쉬고 다시 혼자 눈 쌓인 알프스를 넘어가야 하는 전령에게 말했다.
“서고트족이 파도바에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확인이 되면 그때 다시 보고하도록.”
전령은 아직도 빨갛게 얼어있는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안개가 낀 을씨년스러운 도나우 강변은 축축한 습기를 머급은 채 얼어붙어있었다. 여름이면 경치가 아름다운 강이고 지금도 눈 덮인 풍경이 아름답지만, 몸을 파고드는 한기와 살기어린 야만족의 눈초리가 그런 정취를 느낄 겨를이 없게 만들었다.
강가에 서 있던 족장 헤르메리크와 수에비족은 스틸리코와 로마의 호위대가 다가오자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몸을 흔들며 발을 옮겼다. 스틸리코가 황제보다도 더 권위있는 로마의 제일 권력자이고, 수없이 야만족을 무찌른 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측은 천천히 하얗게 얼어붙은 강 위로 걸어가서 가운데서 만났다.
“로마는 약속한 바를 지켰소. 뭐가 문제인 거요?”
스틸리코의 물음에 헤르메리크가 에둘러서 대답했다.
“올해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서 식량이 부족하오.”
“올 겨울은 우리도 이미 곡식배분이 끝나서 마련하기 어렵소. 미리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도 마련할 방법이 없소.”
스틸리코는 족장의 요청을 거절했다.
“곡식이 대장간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건 알 거요. 곡식을 수확하는 데는 1년의 시간이 필요하오.”
“아이가 얼마나 태어날지도 알 수 없소. 10달 동안 뱃속에 있으니까 말이오.”
스틸리코가 입을 열려 하자 재빨리 그가 덧붙였다.
“올 겨울은 어떻게 난다 쳐도 내년에도 그 아이들이 먹을 식량이 필요하오. 매번 로마에 손을 벌릴 수 없으니 농사지을 땅을 할당해주시오.”
이게 본론이로군. 스틸리코는 수에비족이 원하는 바를 파악했다.
“그럴 수는 없소. 불가하오.”
“그렇다면 힘으로 빼앗을 수 밖에 없소.”
헤르메리크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스틸리코는 무표정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서고트족을 막으려 곧 알프스를 넘어 돌아가겠거니 하고 배짱을 부리는군.’
그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계산이 뻔히 읽혔다.
“좋소. 시간은 많으니까. 겨울 내내 싸워봅시다. 어차피 알프스의 눈이 녹을 때까지 나는 발이 묶여서 못 돌아가오.”
스틸리코의 말에 수에비족들은 당황해서 수군거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이 녹을 때까지 못 돌아간대.”
“겨울 내내 싸우자고?”
‘알라리크가 내가 곧 돌아갈 거라고 말했겠지.’
역시나 서고트족과 공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에게 헤르메리크가 황급히 물었다.
“이탈리아에 서고트족이 들어와 있는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있겠소?”
스틸리코는 눈살을 찌푸리고 눈바람이 휘몰아쳐서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알프스 산을 쳐다보았다.
“정신 나갔소? 한겨울에 저 산을 누가 넘어갈 수 있단 말이오? 봄이 올 때까지 나는 여기 있을 수밖에 없소.”
몇 달 간의 스틸리코의 공격에 살아남을 야만족이 몇 명이나 될까. 그는 얼굴이 눈빛처럼 허예진 수에비족이 얼음 위에서 고민하도록 남겨놓고 뒤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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