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서약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자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스틸리코는 아내 셀레나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셀레나는 울먹이며 성호를 그었다. 스틸리코의 마음도 착잡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보호자였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황제는 수십 대를 이어 내려오는 명문가 부자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로마에서, 아버지는 야만족에 어머니는 평범한 집안인 자신을 호위대장에 이어서 총사령관으로 발탁했다. 셀레나에 대한 수많은 구애자를 물리치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스틸리코에 대한 모함과 험담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황제는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지금의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이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라지면,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미 군부 뿐 아니라, 원로원과 법조계 등 로마의 실질적인 권력에 있어서 2명의 황자보다는 그가 실세였지만, 황제의 비호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었다.
이제까지는 황제가 그를 지원해줬다면, 이제는 그가 어린 황제들을 보살펴주어야 했다. 입장이 반대로 바뀌는 셈이었다. 그는 한층 더해진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방으로 들어가자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황제의 머리맡에 있었다. 황제의 유언을 적어서 받들기 위한 증인들과 법조인들도 와 있었다.
“아버지.”
셀레나는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며 황제의 바짝 마른 손을 잡았다.
“왔느냐.”
황제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듯 껌벅거리며 그녀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스틸리코.”
황제의 부름에 스틸리코는 가까이 다가갔다.
“말씀하십시오.”
황제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두 아들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황제폐하처럼 섬기겠습니다.”
“내 아들들의 후견인이 되어주게.”
“제 아들처럼 보살피겠습니다.”
스틸리코의 말에도 황제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거듭 그에게 말했다.
“내 아들들을 죽을 때까지 배신하지 않고 충성하겠다고 그리스도께 맹세해주게. 제발 부탁이네.”
만인의 위에 서서 호령하던 황제도 죽음을 앞두면 이렇게 나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죽음 뒤에 일어날 일을 모르기에 남은 사람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사정을 하는 처지가 될 뿐이었다.
스틸리코가 두 아들들을 제거한다 해도 로마에서 슬퍼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을 지켜줄 황비도 먼저 죽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로마를 위해 이룬 공적이 없으니 사라진다고 해서 아쉬워할 사람이 없었다.
스틸리코는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
“절대로 황자님들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배석한 서기가 황제와 스틸리코의 말을 적어서 기록했다. 증인과 법률가가 그의 약속을 들었다. 스틸리코가 자신의 약속을 어기면 로마인들에게 비난받을 것이다. 교묘하게 종교와 인정에 호소해서 스틸리코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얽어매놓은 셈이었다.
황제는 두 아들들에게 당부했다.
“아르카디우스, 너는 동로마의 황제가 되어서 다스리고, 호노리우스, 너는 서로마의 황제가 되어 다스리도록 해라.”
18살인 아르카디우스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멍한 표정이었고 10살인 호노리우스는 아버지가 임종을 맞은 것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황제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이미 몇 달 전 황제가 병상에 누운 후부터 각각 동서로마를 나눠서 다스리고 있었지만, 서로마는 스틸리코가, 동로마는 루피누스가 도맡아서 일을 처리했다. 황자들은 서류에 서명만 할 뿐이었다.
황제는 스틸리코와 루피누스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에게 부탁했다.
“자네가 서로마에 머물더라도 동로마가 공격을 받을 때 나서서 물리쳐주게.”
스틸리코는 불만 없이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너희 셋이 뜻을 하나로 모으면, 로마제국은 번영하고 너희들도 영화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갈라지고 의심하면, 그 순간 로마는 무너지고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황제는 자신이 선대 황제의 두 아들을 보좌해서 제국을 수호해왔듯이, 스틸리코가 자신의 두 아들과 제국을 지켜주기를 바랬다.
“모두 물러가 있게. 스틸리코만 남고.”
사람들이 나가고 황제는 잠시 스틸리코와 둘만 남았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스틸리코는 황제에게 바싹 다가갔다. 황제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네를 황제로 임명하지 않아서 서운한가?”
스틸리코의 속마음을 확인하지 않고는 차마 눈이 감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선황제의 어린 두 아들을 보필하게 된 경험 많은 장군 스틸리코의 처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와도 비슷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어리고 정치에 무관심한 두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2세를 보필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처음부터 동로마 황제로 임명되어서 독자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제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서로마 황제인 선황제의 아들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한 셈이었다.
반면에 스틸리코는 황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실세라 한들 그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두 어린 황제의 신하였다.
“황자 두 분이 계신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틸리코는 무명의 그를 총사령관에 임명해준 것만으로도 황제에게 감사했다.
“자네가 황제가 되면 더 잘 다스릴 거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지 않나?”
어린 호노리우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걱정해서 스틸리코가 서로마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도 그런 기류를 알고 있었다.
스틸리코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로와 같은 폭군만 아니라면 누가 황제가 되든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로마는 황제 한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황제, 원로원, 군대, 시민이 합심해서 만드는 나라입니다. 제가 황제이든 아니든 제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또 황자분들도 마음이 너그러우시니 신하의 의견을 들어서 황제의 업무를 잘 해나가실 겁니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는데, 사고를 치고 다니는 못된 아이들은 아니었다. 유능하지는 않아도 막 되먹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들에게 충성하기만 하면 뜻을 맞춰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고맙네. 스틸리코. 고마워.”
황제는 그의 대답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이윽고 황제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
황제가 숨을 거두자 셀레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던 스틸리코도 이날만은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야만족 출신의 그를 로마 최고 군사령관에 올려놓은 은인에 대한 은혜를 두 아들들에게 갚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숙제는 풀기 쉬은 것이 없었다. 무력한 원로원, 부패한 루피누스가 장악한 동로마, 라인강과 도나우 강을 넘어오는 야만족의 공격, 떨어지는 제국의 생산성, 줄어드는 세금 수익, 치솟는 물가, 병역을 회피하는 시민들, 모두가 그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수천만 명의 로마인들의 운명이 그에게 달려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틸리코는 로마제국의 잠재력을 믿었다. 로마는 천 년을 지속되어온 나라였다. 야만족이나 그 어떤 국가도 갖지 못한 견고한 체계와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로마제국은 목숨을 걸고 수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국가였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로마인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야만족의 핏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다. 아버지의 동족인 반달족을 비롯해서 국경에서 야만족과 싸우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로마영지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으로 라인강변에서 비참하게 사는 야만족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자신과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도시에서 매일 뜨거운 목욕탕에서 씻고 우아한 옷을 입고 머리를 빗질하고 수염을 깎고 요리한 음식을 먹는 청결한 로마인과 달리, 반 벌거숭이나 다름없이 짐승 가죽을 걸치고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로 뛰어다니는 야만족의 모습을 보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왜 저렇게 살까 하는 것이었다.
‘왜 반달족은 아버지처럼 로마군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곧 그는 원한다고 모두가 로마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로마군에 들어올 수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행운아였다. 그의 아버지가 로마로 와서 로마 여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스틸리코도 다른 반달족처럼 숲에서 벌거숭이로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 야만족은 로마인과 같이 규칙을 지키고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할까.’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야만족이 로마인이 될 수 없다면 로마와 같은 독자적인 사회체계와 규칙을 자기들끼리 만들고 공공시설을 만들어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야만족들끼리 원로원을 만들고 세금을 걷어서 법으로 통치하는 국가를 만들면, 로마제국보다는 못살아도 지금보다는 문명화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곧 깨어졌다. 야만족의 머릿속에는 로마인이 가진 법과 약속, 신뢰와 같은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힘이 법이었기에 손바닥 뒤집듯이 약속을 깼다. 그들은 마치 오늘만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로마에서는 내가 가진 물건과 내가 오늘 한 노동의 가치가 내일까지 보존된다는 것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였다. 내 물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키지 않아도 법으로 소유권을 보호받았다. 내가 한 노동을 돈으로 축적해서 보존할 수 있기에 더 열심히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해서 터득한 지식을 글로 적어서 보존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장기적인 투자와 규모가 큰 공사가 가능했고, 그것은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스틸리코는 야만족이 로마제국과 같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국가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로마제국의 이념과 가치에 동의하는 야만족들만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로마제국을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이었다.
로마제국이 천 년에 걸쳐서 만들어낸 원로원과 황제와 민중의 권력 분권, 법률, 조세제도, 군대체계, 토론과 합의에 의한 정치, 건축기술, 행정제도, 도시운영방법 등은 결코 값싸게 폄하할 수 없는, 어느 나라도 갖고 있지 못한 현존하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었다.
스틸리코는 자신에게 문명의 수혜를 베푼 로마제국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로마 시민들은 반란군과 야만족으로부터 제국을 지켜낸 황제의 죽음을 애도했다.
황제의 유언대로 18살의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고, 10세인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동로마에는 어느 정도 성장한 아르카디우스와 루피누스, 서로마에는 어린 호노리우스와 스틸리코를 배치해서 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현재의 평형상태가 미래에도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출 거라는 예측이 들어맞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과연 제국을 위해서 좋게 작용할지 나쁘게 작용할지는 긴 시간이 흘러봐야 판가름 날 것이다.
스틸리코가 어린 호노리우스 황제를 대신해서 섭정을 하는 것에 서로마 원로원의 반발은 없었다. 그들은 어리고 능력이 증명되지 않은 황제보다 스틸리코가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서 일한 성과를 믿었다. 그가 반달족 출신이라는 것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후견인으로서 황제의 재산을 두 아들들에게 분배했다. 땅과 노예와 귀금속, 그리고 황제가 소유한 군단과 장교, 병사들도 나누었다. 그는 장교들의 성향과 재능을 검토해서 동로마와 서로마에 배치했다.
황제의 장례식과 새 황제의 즉위식이 끝나자, 스틸리코는 야만족이 자주 출몰하는 북방으로 갔다. 황제가 바뀌고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봉기하는 야만족이 있을까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진정한 위협은 제국의 안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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