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알라리크는 5일간 약탈을 허용하고 6일째에 로마를 떠났다. 5일은 인구 백만 명의 거대한 도시를 털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알라리크는 돈을 챙겨서 빨리 이곳을 떠나기를 원했다. 이제 더 이상 로마제국에게는 아무런 기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로마에 대한 증오마저도 없었다. 로마의 가치 대한 존경도 사라졌다. 지난 2년간 로마의 민낯을 본 그는 이제 로마에 환멸을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환멸은 스스로에 대한 좌절감을 깊게 만들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고트족과 로마 사이에서 중재를 하며 애써준 요비우스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아탈루스를 지지하고 호노리우스를 등지는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알라리크에게 협력하며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전쟁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 노력한 요비우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약탈했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는 미안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오.”
알라리크의 말에 요비우스는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다 신의 뜻이겠지요.”
그동안 알라리크가 얼마나 참을성 있게 인내했는지는 곁에서 협상을 해온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로마와 좋게 해결을 하고 싶어 했던 알라리크의 진심도 이해하고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수년간 여러 차례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로마는 번번이 기회를 발로 걷어찼다. 그들을 보호하는 스틸리코를 비난하고 죽인 것도, 알라리크에게 약속한 금4천리브라를 지급하지 않은 것도, 요비우스가 합의한 4개 안을 거절한 것도, 로마에서 가장 멀고 척박한 노리쿰 땅만 주면 물러가겠다고 하는데 거절한 것도, 황제와 원로원과 로마시민이었다.
“우리와 같이 가면 어떻소? 여기 남아있으면 위험하지 않겠소?”
알라리크는 그에게 서고트족과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동안 요비우스가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의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고 아탈루스의 편에서 일했으니, 호노리우스의 보복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 남겠다고 했다.
“원로원 의원이 다 같이 아탈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모두를 죽일 수는 없을 겁니다. 협박에 못 이겨서 한 일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호노리우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원로원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소. 아프리카에 서고트족을 보내야 한다고 연설까지 했는데 괜찮겠소?”
요비우스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알라리크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 걱정은 마십시오. 그 정도 요령이 없으면 지금까지 원로원에서 버티고 있겠습니까.”
그는 말에 오르는 알라리크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알라리크는 가슴이 답답했다. 수레는 전리품으로 어느 때보다도 꽉 차 있었다. 명성, 군대, 권력, 모든 것이 정점에 있었다. 세계의 수도 로마를 발밑에 꿇렸는데도 그의 마음은 허전했다. 그가 가장 원하는 서고트족의 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고트족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심한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땅 한 뼘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추슬렀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시 일어서야 했다.
“나도 모르겠소. 지금까지 안 가본 땅으로 갈 거요. 서고트족의 땅을 얻을 때까지.”
그들은 각자 갈 길을 갔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과 남쪽으로, 요비우스는 로마로 돌아갔다.
“출발!”
약탈품으로 무거워진 수만 대의 수레가 천천히 움직였다. 수레의 뒤에는 부자들과 의원들이 나귀처럼 줄에 묶여 끌려갔다.
며칠 새 반쪽이 되어 초췌해진 람파디우스는 양손을 묶인 채 노예처럼 끌려갔다. 이웃 도시로 농장을 팔러 간 하인이 돈을 가지고 돌아와서 몸값을 치르기까지 이렇게 죄수처럼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20만명의 야만족은 언제 왔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지옥의 문이 닫힌 것처럼 흔적도 없이 로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고트족이 떠난 후 요비우스는 적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은 이중첩자였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호노리우스 황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반역자 아탈루스의 믿음을 사기 위해서 한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그를 파멸시키려고 접근한 겁니다.”
심문관이 물었다.
“아프리카에 서고트족을 보내서 점령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서고트족의 편을 든 게 아니오?”
요비우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파병하려는 알라리크와 그것을 반대하는 아탈루스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 계략대로 알라리크가 아탈루스를 폐위시키지 않았습니까?”
원로원 의원들도 요비우스를 감쌌다. 그들도 경중은 있지만 모두 아탈루스를 황제로 섬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요비우스가 처벌받으면 그들도 처벌받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일처럼 보호했다.
“요비우스는 진심으로 아탈루스를 섬기고 서고트족에게 협조한 게 아니오.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하는 척 했을 뿐이오.”
“원로원을 대표해서 협상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저들의 입장을 대변한 거요.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소.”
의원들의 제 식구 감싸기 덕분에 요비우스는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
서고트족은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갔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이어졌다. 날씨도 화창하고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로마군도 없었다.
그들은 걱정 없이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여유 있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로데리크는 마차를 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에는 로마에서 약탈한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는 물건 하나하나의 가치를 잘 몰랐지만, 부잣집의 노예였던 비터리크는 값나가는 물건을 볼 줄 알았다. 최대한 비싸고 부피가 작은 물건들로만 골라서 마차를 꽉꽉 채웠다.
마차에는 비터리크와 그의 가족이 함께 타고 있었다. 로데리크는 조카가 너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찡긋 하고 볼을 부풀리며 우스운 표정을 짓자 아이가 헤헤 웃었다. 나이를 먹어가니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언제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언제쯤 이렇게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할 수 있을까.
“형은 결혼 안해?”
비터리크도 그가 부러워하는 것을 눈치 챘는지 물어보았다. 일리리쿰에서 결혼하려고 돈을 모으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어디 농사지을 땅이라도 구해야 결혼하지.”
“다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결혼하고 사는데 뭐.”
함께 이동하는 서고트족 무리에는 젊은 여자도 과부도 많았다. 전리품과 약탈한 돈도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결혼을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로데리크는 선뜻 마음을 먹기 어려웠다. 언제까지 돌아다니게 될지 모르고, 언제 로마군과 싸우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혼을 하기는 부담스러웠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에는 오래 전 로마제국을 다스렸던 정치가들이 살던 별장들이 남아있었다. 그중에는 키케로의 별장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감회에 젖어서 키케로의 별장의 정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곳이 바로 키케로가 살았던 곳이래.”
서고트족 족장이 그에게 물었다.
“키케로가 누굽니까?”
“오래 전에 로마제국을 다스렸던 정치인이지.”
“용감한 전사였나요?”
“훌륭한 연설가이자 문장가였지.”
족장은 툴툴거리며 입을 비죽거렸다.
“하여튼 로마놈들은 다 입으로 해먹으려고 든다니까.”
키케로의 심미안으로 엄선한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정원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분수에서는 시원한 물이 쏟아져 나오고, 따스한 햇빛에 나뭇잎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백년 전, 서고트인들이 움막같은 집에서 살 때, 로마인들은 이미 벽돌로 빛이 잘 드는 이런 아늑한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어째서 이렇게 몰락하고 만 것일까. 알라리크는 설명할 수 없는 회한에 젖어서 조각상들을 바라보았다.
“로마에는 연설가들만 있었던 건 아냐. 키케로의 시대에는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도 살았지.”
족장들도 카이사르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 그 유명한 카이사르 말이군요?”
“키케로와 카이사르는 경쟁자였어. 로마제국의 권력을 두고 싸웠지.”
“그래서 카이사르가 이겼나요?”
“음, 이겼지만, 암살당해서 키케로보다 먼저 죽었지. 그러면 키케로가 이겼다고 봐야 하나?”
알라리크의 설명에 그는 한숨을 쉬며 팔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저런. 스틸리코도 그렇고, 로마는 자신을 지켜주는 장수들을 왜 자꾸 죽이는 걸까요?”
알라리크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정원수의 그림자를 밟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지. 그렇지만, 죽이고 나면 저들도 후회라는 걸 할 줄은 알더군.”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 로마는 잠시 혼란에 빠졌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혼란을 수습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로마가 항상 옳은 선택만 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역사는 항상 어리석은 행동과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다른 제국들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한방에 멸망해버린 것을 생각하면, 로마는 수습하는 복원력이 뛰어난 국가인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이번 로마 약탈에서도 로마시민들은 위기가 닥치자 빠르게 현실을 인정하고 대응했다. 원로원은 회의를 해서 적극적으로 황제와의 협상을 중재했다. 절망하기보다 위기는 위기대로 견뎌내고 이후를 도모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만 항상 다시 일어서는 것이 그들의 저력이었다.
이번에도 로마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로마를 구원할 인물이 나타날까.
알라리크는 자신의 몸이 많이 약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서고트족은 어떻게 될까. 아타울프를 비롯해서 지금은 서고트족 지도부가 하나로 똘똘 뭉쳐있지만, 로마군에게 패하거나 위기가 닥치면 연기처럼 흩어질 수도 있었다.
서고트족은 로마처럼 위기에서 다시 일어나는 복원 체계가 없었다. 그때 서고트족에게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작은 땅이라도 죽기 전에 마련해놓고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원로원 의원이 직접 나와서 그를 맞았다.
키케로의 별장은 로마에서 피신해 나와 있는 원로원 의원의 소유였다. 로마 약탈의 소문을 전해들은 그와 그의 가족들은 겁을 먹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알라리크를 극진히 대접했다.
알프스의 얼음에 재워 바다에서 수송되어 온 신선한 굴 요리에 악사들과 무희들까지 불러서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식기까지도 금으로 장식된 최고급 제품들을 아낌없이 꺼내어 그에게 바쳤다. 그러면서도 연신 대접이 소홀해서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의원은 아껴두었던 최고급 포도주를 따서 그에게 따랐다.
“어서 드십시오. 눈이 내리기 직전에 마지막에 여문 달콤한 포도로 빚은 포도주입니다.”
웃고 있는 그의 표정과 달리 이마에는 진땀이 솟아있고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로마인들이 나를 무도한 야만족이라고 비난하는데, 이렇게 환대해주니 고맙소.”
알라리크의 말에 의원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몇몇 있었지만, 소수입니다. 그들도 별 생각 없이 그랬을 겁니다.”
“원로원은 야만족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살 수 없다며 내 제안을 거절했잖소?”
뼈가 있는 알라리크의 말에 의원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건 오해가 있으신데, 서고트족은 어차피 로마의 아미쿠스인데, 굳이 돈을 주면서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하느냐, 다른 걸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뭐 그런 의견이 있었죠.”
“그런데 결국 내가 로마를 약탈했으니, 원로원의 판단이 옳았던 것 아니오?”
계속해서 알라리크가 원로원의 모순을 지적하자 의원은 울상이 되어서 벌벌 떨었다.
“그러니까, 예, 잘못 판단한 것이 있었죠. 그 뭐냐, 애초에 저희가 잘못 생각하는 바람에, 에, 아무튼 잘못했습니다.”
횡설수설하며 변명하고 사죄하는 원로원 의원을 바라보던 알라리크는 포도주잔을 들어서 들이켰다. 차라리 예전에 그를 비난했던 성직자처럼, 자신의 신념을 당당히 말하는 원로원 의원이라면 알라리크도 로마제국을 존중해 줄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도 원로원의원도 타인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안위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알라리크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따분하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알라리크의 말에 의원은 서둘러서 악사들에게 손짓했다.
“그, 그럼 음악을 바꿀까요?”
알라리크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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