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로
키케로의 별장에서 며칠 머무른 후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어디까지 남쪽으로 내려가실 겁니까?”
“가봐야 바다밖에 없는데요.”
족장들은 알라리크의 목적지를 궁금해 했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곳은 아프리카였다.
로마를 포위하면서 아프리카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깨달았다. 그 곳의 밀 공급만 통제하면 서로마를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땅이니만큼 서로마에서도 아프리카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무력한 원로원도 아프리카에서 밀 공급이 끊어진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서고트족이 아프리카에 자리를 잡으려면 카르타고와 로마의 싸움처럼 여러 대에 걸친 결전을 각오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로마를 적으로 돌렸으니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땅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프리카는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로마군도 준비 없이 섣불리 공격해 들어올 수 없었다. 훈족이나 다른 야만족도 쉽게 건너오지 못할 것이다.
헤라클리아누스 장군이 지키고 있었지만, 로마군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서고트족 병사가 1만 명이라도 무사히 건너기만 하면 도시 하나 정도 점령하기는 쉬울 것이다. 도시 하나만 손에 넣으면 그곳을 방어하면서 조금씩 인근의 땅으로 세력을 넓혀 가면 되었다.
알라리크가 바다를 건너가려 한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무리한 계획은 아니었다. 일리리쿰은 아드리아해를 접하고 있어서 그도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한 경험이 있었다.
스틸리코와 비밀 협상을 하러 이탈리아에 갈 때도 배를 이용해서 아드리아해를 건너본 적이 있었다. 바람만 잘 타면 삼사일이면 쾌적하게 갑판에서 바람을 쐬거나 선실에 누워서 책을 읽으며 아드리아해를 건널 수 있었다. 계속 말을 달려야 하는 육로보다 편하고 시간도 절약되었다.
그래서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프리카도 그렇게 일주일이면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서고트족은 그렇지 않았다. 서고트족이 플로이를 탈출해서 에피루스로 갈 때 배를 이용하긴 했지만, 로마인이 운항하는 안전한 배를 타고 건너편 땅이 보이는 좁은 해협을 건넌 것이었다. 스스로 배를 몰아서 땅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것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었다.
아프리카로 간다는 알라리크의 말에 족장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산과 평지에서만 살아온 그들에게 바다는 두려운 곳이었다. 발밑이 흔들리는 배를 타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다.
“왜 우리가 굳이 아프리카에 가야 합니까?”
알라리크는 부하들을 설득했다.
“그 곳에는 밀이 잘 자라서 농사가 쉬워. 얼마든지 곡식을 키울 수 있어.”
“농사가 잘되는 땅이 꼭 아프리카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맞습니다. 갈리아나 히스파니아도 농사가 잘 된다던데요.”
아프리카의 중요성을 아는 알라리크와 달리 그들은 굳이 바다를 건너서 다른 땅에 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아프리카에 가면 로마의 식량공급도 우리 손에 틀어쥘 수 있어.”
전략적으로 아프리카는 서로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속주였지만, 족장들은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 오히려 로마에게 공격받게 되잖습니까.”
“바다를 건너가기는 어려워도 일단 건너가면 쳐들어오는 적을 수비하기가 쉬워.”
부하들은 로마와 필연적으로 분쟁이 생길 아프리카를 굳이 취해야할까 곤혹스러워했다.
“로마와 너무 가까운데요? 로마와 먼 땅을 얻으려고 하셨잖습니까.”
서고트족은 갈리아나 히스파니아에 정착하고 싶어했다. 굳이 바다를 건너가야 하나 의구심을 품었다. 20만명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배도 없는데 어떻게 건넌단 말입니까?”
로마군의 군선을 이용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배가 없는 서고트족이 지중해를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배도 없지만 선원도 없습니다. 길도 모릅니다.”
먼 옛날 신화속의 오디세우스도 트로이 전쟁 이후에 집에 돌아가느라 지중해에서 20년이나 표류하다가 돌아갔다. 항해술이 뛰어난 그리스인들이 그럴 정도인데, 배를 만들 줄도 운항할 줄도 모르는 서고트족이 과연 지중해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알라리크도 로마인이 운항하는 배를 탔을 뿐이라, 직접 항해를 하는 것은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로마인도 처음에는 배도 선원도 없고 길도 몰랐어. 우리는 그래도 로마 배를 타고 로마인 선원을 고용할 수는 있잖아.”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서고트족이 해안선에서 외적을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로 옮겨놓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는 일단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칠리아 섬으로 가서 그곳에서 아프리카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 섬까지는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육지에서 바로 보였다.
시칠리아섬과 로마 본토를 오가며 배와 항해에 익숙해지면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겁먹지 마. 저 정도 거리면 중간에 바다에 빠져도 헤엄쳐서 건널 수 있어.”
잔잔한 물살의 지중해 바다를 보니 땅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보였다. 배를 타고 노를 젓기만 하면 문제없이 건널 수 있을 듯 했다.
“저 섬이라면 갈 수 있겠습니다.”
“노 몇 번만 저으면 도착하겠네요.”
서고트족도 예상보다 가깝게 보이는 섬을 건너가는 것에는 용기를 냈다.
주위 항구에서 배와 선원을 긁어모았다. 로마는 그들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도록 군함과 큰 배와 선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철수시켜 놓았기에 작은 배밖에 없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것마저 없으면 배를 만들 줄 모르는 서고트족이 바다를 건널 방법이 없었다.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기 위해서 배에 병사들을 나눠서 태웠다.
출항하기로 되어 있던 날 하늘이 흐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타울프가 물었다.
“비가 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비가 멎을지 좀 기다려볼까요?”
알라리크는 로마군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는 의도를 알아채면 즉시 군선을 보내서 서고트족을 격침시킬 것이다. 바다에서는 로마군 해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로마군함이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건너야 했다.
“예정대로 진행해.”
알라리크는 작전을 밀어붙였다. 시간을 끌다가 로마군이 시칠리아나 아프리카에 구원군을 보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서고트족을 태운 배가 하나씩 출항했다. 그런데 이제는 바람마저 거세게 불었다. 배를 다룰 줄 모르고, 바다에 나가 본 적이 없는 서고트족은 그다지 심한 폭풍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우뚱 거리는 배에 놀라 당황했다.
“조심해! 부딪친다!”
그들은 제어가 안되는 배의 방향을 잡으려고 애썼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육지와 달리, 배는 물살을 이길 수 없었다. 물살과 바람을 거슬러 움직이려고 하자 우지끈 소리가 나며 돛대가 부러졌다.
배들은 이리저리 표류했다. 조류를 잘못 타서 먼 바다로 떠내려가는 배, 암초에 들이받고 좌초된 배, 폭풍우에 돛이 찢어진 배, 돛대가 부러진 배들이 바다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며 우왕좌왕했다.
육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서고트족은 안타까운 한숨만 쉴 뿐 어떻게 물위로 달려가서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알라리크도 비가 내리는 항구에서 배들이 악천후에 고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바다로 내보낸 병사들이 무사히 돌아오거나 섬에 도착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두세 시간이면 건널 거리였지만, 날이 기울어서야 배들이 간신히 하나 둘 항구로 돌아왔다.
한나절 바다에 있었을 뿐인데 며칠 전투를 한 것처럼 병사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섬을 건너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먼 바다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서고트족은 사기가 꺾여 겁먹은 얼굴로 배에서 내렸다.
아타울프는 조심스럽게 알라리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바다를 건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부하도 주눅든 목소리로 말했다.
“신께서 우리가 바다를 건너는 걸 원하지 않으시는 듯 합니다.”
알라리크는 대답이 없이 계속해서 바다를 보며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아타울프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폐하?”
알라리크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알라리크!”
아타울프는 쓰러진 그를 안아 일으켰다. 온 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매일같이 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며칠 만에 눈을 뜬 알라리크는 자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신부님을 불러줘.”
그가 고해성사를 마치자 신부가 성호를 그으며 축복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알라리크의 영혼이 주님께 가려 하니 그를 영원한 안식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는 아타울프에게 유언을 남겼다.
“서고트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을 얻도록 노력하겠다고 맹세해줘.”
“맹세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아타울프는 그의 뜨겁게 열이 나는 손을 자신의 머리에 얹고 맹세했다. 알라리크는 다시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무덤이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도록 해.”
호노리우스 황제와 사루스가 그가 묻힌 곳을 안다면 시체를 꺼내서 갈기갈기 찢고 모욕을 가할 것이다. 로마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타울프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절대 아무도 못 찾도록 하겠습니다.”
알라리크는 아타울프에게 자신의 무덤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강물을 막아서 물줄기를 돌리고 그 아래에 묻어 줘.”
“그러겠습니다.”
말을 마친 알라리크는 자신의 가족과 부하들, 족장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동로마에서 이탈리아까지 긴 시간 동안 고난과 영광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서고트족에게 둘러싸여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고트족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문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성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모두 어깨를 늘어뜨리고 흐느꼈다.
생명도 지위도 가족도 부귀영화도 내던지고 오직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 한 길을 달려왔던 알라리크의 긴 여행이 이탈리아 코센티노에서 끝났다.
로마제국의 동쪽 귀퉁이에서 희망 없이 힘들게 농사짓고 전쟁터에 끌려 나가고를 반복하며 살던 서고트족이었다. 아무도 감히 로마에게 대항하지 못할 때, 알라리크는 서고트인의 나라를 세우자고 그들을 일으켜 세워서 로마로 쳐들어갔다.
로마를 횡단하며 로마군에게 4번이나 패배했으면서도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서 서고트족을 앞으로 끌고 나갔다.
서고트족은 더 이상 로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5년간 수천 km의 동서로마를 이동하며, 때로는 로마인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 틈에 섞여서 살기도 한 서고트족은 이제 로마인이 무서운 전사도 사악한 악마도 아닌 그들과 똑같이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라리크가 그들에게 깨닫게 해 준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그가 갈구하던 땅은 마련해주지 못했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가치 있는 선물을 서고트족에게 남겨주었다. 그것은 서고트족으로서의 자존감, 로마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로마제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많은 경험들이었다.
알라리크의 유산은 모든 서고트족의 마음속에 각자 살아서 빛나고 있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