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 전투
활짝 열려있던 베로나의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은 야만족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황급히 문을 닫았다. 무거운 문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빨리 빨리!”
로마군은 있는 힘을 다해서 문을 밀었다. 서고트족 기병들이 번개처럼 달려가서 닫히는 문 사이로 칼과 창을 찔러 넣었다.
“닫아!”
육중한 문 틈에 창이 끼면서 우지끈 부러졌다. 멀리서 달려가는 것과 눈앞의 문을 닫는 것은 아무리 문이 무겁다고 해도 문이 닫히는 것이 빨랐다. 간발의 차로 문이 그들의 눈앞에서 닫히고 안에서 덜커덕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하마터면 문에 부딪쳐서 얼굴이 깨질 뻔 했다. 말들은 놀라서 울며 앞발을 들어올렸다.
“젠장!”
아슬아슬하게 성의 탈환작전이 실패했다. 문지기 여러 명이 안에서 문을 붙잡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병이 움직이자마자 반응해서 문을 닫아버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알라리크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얽어서 만든 사다리를 가져오도록 했다. 성벽에 걸쳐놓고 기어 올라가려는 것이었다. 베로나의 성벽은 충분히 올라가 볼 만 한 높이였다.
“공격!”
기병도 말에서 내려서 모두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했다. 성벽 위에서 로마군이 고개를 내밀고 그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휘릭 소리를 내며 사방에 화살이 내리꽂혔다. 마치 공성전에 대비한 것처럼 궁수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공격받을 걸 알고 있었나?’
알라리크는 좋지 않은 예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정보가 또 새어나간 것인가.
사다리를 올라가던 병사들이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졌다.
로데리크는 자신의 위에서 올라가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진 병사가 떨어지면서 그의 얼굴을 세게 후려치는 바람에 머리가 띵하고 얼얼했다.
“억!”
얼굴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화살이 그의 팔에 와서 박혔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아파서 팔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조심해, 형!”
그의 아래에 있는 비터리크도 쏟아지는 화살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사다리에 딱 달라붙어서 방패를 머리에 쓴 채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멈춰있었다.
“비켜! 내가 올라간다.”
알라리크는 베로나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끝이라는 마음으로 말에서 내려 직접 사다리로 달려갔다. 베로나를 함락시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화살에 목이 꿰뚫리는 편이 나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막 사다리에 발을 걸치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아타울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며 그를 붙잡았다.
“저기! 저기를 보십시오.”
아타울프의 손끝을 보자, 북쪽의 숲에서 로마군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매복이군.”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안을 유지했는데, 이번에도 정보가 새어나갔다.
“로마군이다!”
“함정이다!”
서고트족은 로마군을 맞아 싸우기 뒤해 황급히 뒤돌아섰다. 알라리크도 다시 말에 올라서 다가오는 로마군을 향해 달려갔다.
바로 그때 좌우 양쪽에서도 로마군이 방패와 칼을 들고 땅속의 참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미리 며칠 전에 땅을 파고 숨어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서고트족은 성벽과 삼면에서 사방이 완전히 포위되어 공격받았다. 성벽 위에서는 그들에게 화살을 쏘았고, 삼면에서는 길게 늘어선 로마군이 끝을 좁혀오며 그들을 포위했다. 방패와 방패가 빈틈없이 맞닿아 벽처럼 늘어섰고, 촘촘한 긴 창의 대열이 그들의 몸을 찌를 듯이 다가왔다. 로마군은 커다란 우리처럼 야만족을 가두었다.
“포위를 뚫어!”
사방의 로마군에 갇힌 서고트족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기병이라 해도 긴 창을 앞세운 로마군을 뚫고 밖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등 뒤에 언제 화살이 날아와 꽂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서,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사납게 퇴로를 뚫으려고 로마군을 공격했지만, 로마군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전진했다.
알라리크는 이번에도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로마군의 후방에서 말을 탄 채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스틸리코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알라리크는 오늘이야말로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말을 타고 달려들어서 칼로 로마군의 창을 내리쳤다. 여러 개의 날카로운 창끝이 출렁거리며 파도처럼 그의 몸에 박힐 듯이 가까이 덮쳐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심하십시오!”
아타울프는 위험한 알라리크의 행동에 어쩔 줄 모르고 방패를 들어 그의 옆에 서서 창을 막았다.
그런데, 그 때 스틸리코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알라리크의 앞의 로마군 부대가 옆으로 벌리며 공간이 생겼다.
‘뭐지? 밖으로 유인해내려는 건가?’
알라리크는 틈을 열어준 것에 의아해했다.
“빨리 나오십시오!”
아타울프가 망설이는 알라리크를 재촉하며 포위망 밖으로 말을 달렸다. 그의 주위에 있던 몇몇 족장들과 아타울프가 그와 함께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빠져나가자, 퇴로는 곧바로 닫혔다.
‘나를 사로잡으려는 건가? 로마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게 하고 광장에 세워 시민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 위해서? 야만족들에게 본보기로 공개처형 시키려는 건가?’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그는 알라리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라리크가 말을 달려서 산으로 도망치는데도 스틸리코는 쫓지 않았다. 알라리크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난번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번에는 스틸리코가 자신을 일부러 놓아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를 죽여! 죽이라고!’
알라리크는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서고트족을 볼 면목이 없었다. 막다른 길에서 훈 족을 향해서 달려갔던 가이나스가 떠올랐다.
알라리크는 멈춰 서서 말머리를 돌려 칼을 뽑아들고 스틸리코에게 돌진했다. 그의 주위의 호위병들이 친절하게 그를 단칼에 죽여줄 테니 가이나스처럼 고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타울프가 놀라 뒤쫓아 와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여기서 개죽음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개죽음이라고? 지금이 개죽음만도 못한 상황이야!”
알라리크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달려가려고 했지만, 아타울프는 그의 말고삐를 잡으며 말렸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서고트족의 왕이시잖습니까.”
“내가 무슨! 난 그런 자격 없어!”
다른 족장들도 그를 붙잡고 말렸다.
“지금 그런 말 하면 어쩝니까? 우린 어떡합니까?”
스틸리코는 여전히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이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부끄러움에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말머리를 홱 돌려서 숲으로 달려갔다.
알라리크의 군대는 또다시 궤멸되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던 기병대와 병사마저 잃고 이제 그의 곁에는 늘 그의 옆을 지키는 측근들과 몇몇 족장들뿐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들이 갈 곳은 일리리쿰 뿐이었다. 그나마 서고트족이 4년간 살아왔고, 아직도 살고 있는 땅이었다. 그곳에는 알라리크에게 은혜를 입은 야만족이나 그에게 호의적인 로마인이 아직도 살고 있었다. 그들을 처절한 패배감을 곱씹으며 쓸쓸하게 일리리쿰으로 향했다.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는 이번에는 알라리크를 따라가지 못했다. 너무나 재빨리 포위망이 열렸다 닫혔기 때문에 빠져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기를 버려!”
지휘부가 탈출하고 남겨진 서고트족은 저항 없이 얌전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이쪽으로 와서 부대별로 일렬로 서.”
로마군은 항상 적들 가운데서 괜찮은 자를 로마군으로 뽑아갔다.
“기병은 이쪽으로 와.”
기병대는 전원 로마군으로 뽑혀갔다.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는 보병이었기에 손목과 발목을 밧줄에 묶인 채 한참을 서있었다.
“우린 어떻게 될까?”
비터리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마군으로 뽑혀가지 못한 자들은 대개 노예로 팔려갔다.
“노예가 되겠지.”
로데리크의 말에 비터리크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형은 일리리쿰을 떠나기 싫어했는데 나 때문에.”
“아니야. 나도 떠나고 싶었어.”
일리리쿰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지만, 지난 1년간의 생활도 나름 재미있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단 죽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
“우리 따로 팔려가겠지?”
“아마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글쎄.”
그들의 어깨에 채찍이 철썩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칼에 베인 것 같은 뜨겁고 날카로운 아픔이 지나갔다. 악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하필 화살을 맞았던 자리에 채찍이 맞으면서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흘러나왔다.
“거기 조용히 안 해?”
로마군 병사가 소리쳤다.
“이 녀석은 좀 쓸 만하겠는데요?”
로마군 병사가 로데리크를 가리켰다. 로마군 장교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어깨를 보니 힘 좀 쓰겠군.”
그들은 마른 비터리크는 놔두고 어깨가 넓고 몸통이 두꺼운 로데리크를 로마군 보병으로 차출했다. 방패를 오랜 시간 들고 서있으려면 어깨와 팔다리 힘이 좋아야 했다.
노예로 팔려 가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은 놀라서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빨리 따라와.”
로마군은 로데리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묶인 밧줄에서 풀어서 끌어당겼다. 그들은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보며 멀어져갔다.
“알라리크가 일리리쿰에 도착했습니다.”
알라리크를 미행하던 정보원이 스틸리코에게 돌아와서 보고했다.
“뭘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잘 감시해.”
알라리크의 행동은 일리리쿰에 있는 정보원들이 염탐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위험한 계략을 꾸미더라도 즉시 파악해서 조치할 수 있었다.
“어째서 알라리크를 놓아주시는 겁니까?”
가우덴티우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늘 문제를 일으키고 약속을 깨고 뒤통수를 치는 알라리크를 반복해서 놓아주었다.
“토끼 수천마리가 숲에 흩어져 있는 것과 평원 한 곳에 모여 있는 것, 어느 쪽이 잡기 쉽겠나?”
“그야 당연히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잡기가 쉽습니다.”
“알라리크가 야만족들을 한 곳에 뭉쳐놓으면 그 때 궤멸시키는 것이 쉽지.”
흩어져서 수시로 산발적으로 로마를 공격하는 야만족들 하나하나와 각개 전투를 치르느니, 알라리크가 한꺼번에 평원에 다 끌고 나왔을 때 포위하고 격파하는 쪽이 더 쉽다는 뜻이었다.
가우덴티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리크가 뭉쳐놓은 서고트족을 한꺼번에 포로로 잡아서 로마군으로 편성하고, 그들이 모아놓은 전리품도 챙기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입니다.”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을 뭉치게 만든다고 말한 것은 한 가지 이유일 뿐이었다. 스틸리코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뭉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는 로마로 쳐들어오는 야만족을 빨아들여서 성실한 로마군으로 개조해서 내놓았다. 거친 늑대와 같은 야만족이 자발적으로 그의 휘하로 몰려와서 길들인 군마처럼 규율 있게 행동했다. 그들은 박봉에 힘든 훈련을 마다하지 않고 알라리크의 지시를 따랐다.
로마의 군대문화에 익숙하고 로마군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훈련이 잘 된 노련한 군대를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보급해 줄 수 있는 원천이 바로 알라리크였다.
군인과 재원이 딸리는 지금의 서로마군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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