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리 가문
아말리 가문은 오랫동안 서고트족을 이끌어온 명문가였다. 아말리 가문은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가문에 소속된 사람을 배신하는 자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복수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고트족은 아말리 가문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말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다.
아말리 가문의 집은 서고트족 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높은 건물이었다. 벽돌로 쌓여진 높은 담장과 작은 창문, 뾰족한 지붕이 로마인들이 사는 집과 흡사했다.
아말리 가문의 수장은 사루스였다. 협상을 위해서 종종 로마군 진영을 방문했기 때문에 로마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에게든 모욕을 당하면 절대로 잊지 않고 있다가 보복하는 성격이어서 로마군 장교들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가이나스는 그와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나?”
짧은 수염을 기른 사루스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서고트족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젊은 나이라는 것을 의식해서 나이가 들어보이기 위해서 수염을 기른 모양이었다.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자네도 로마군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들었네. 스틸리코 장군의 직속 부관이 됐다며.”
사루스의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쉼없이 상대방을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었다. 가이나스는 어깨를 으쓱 했다.
“자네가 로마군에 오면 나보다 더 출세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나는 아말리 가문을 지켜야지.”
사루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이나스는 그가 로마군에 들어와서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상관의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루스는 어디에서든 제멋대로 행동했고 남의 통제를 받는 성격이 아니었다. 서고트족을 비롯해서 야만족들이 그런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사루스는 다른 사람에게 제지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요즘은 서고트족에 별 일 없나? 로마에 불평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든지.”
가이나스는 서고트족의 동향을 물어보았다. 사루스가 아니라도 서고트족에는 로마군에 정보를 주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 간에 크로스체크를 통해서 어느 정보원이 믿을 만한지를 가려나갔다.
“그럴 일은 없지. 다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로마제국에 적응하려고 하고 있어. 내가 잘 통제하고 있어.”
사루스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이미 반 로마파가 알라리크에게로 모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문제가 없는 척 하다니 가이나스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눈가리고 아웅하면 모를 줄 아나.’
가이나스는 사루스가 알라리크와 발티 가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알라리크가 발티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던데, 내 기억에는 장난이 꽤 심해서 자주 야단을 맞던 꼬마였는데 어떻게 발티 가문의 수장이 되었지?”
사루스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발티 가문이 스스로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나봐. 그런 망나니를 수장으로 삼다니.”
그는 알라리크를 평가절하했다. 가이나스는 개의치 않고 자세히 캐물었다.
“듣자하니 바스타르네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사루스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주먹을 공중에 휘둘렀다.
“다 헛소문이야. 로마군 장수 한 명을 죽였다고 서고트족이 로마제국에 맞설 수 있다느니 하고 떠들어 대고 있어. 로마에 장수가 얼마나 많은데, 장수 한 명 죽였다고 로마제국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나?”
“물론 전혀 타격이 없지.”
“그런데도 그런 선동에 넘어가서 알라리크에게 붙는 사람들이 있어.”
사루스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문제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루스가 평정심을 잃을 정도로 초조해하는 걸 보니 알라리크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게 커진 모양이었다.
“왜 사람들이 알라리크에게 붙는 것 같나?”
“에리울프가 프라비타에게 죽은 이후로 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자가 없잖아. 그러니, 제국에 불만을 가진 반 로마파들이 알라리크에게로 집결하고 있는 거지.”
“그렇군.”
가이나스는 본론을 꺼냈다.
“실은 서로마제국의 아르보가스트를 정벌하기 위해서 용병단을 섭외하려고 왔는데 별 영향은 없겠지?”
사루스는 돈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어. 알라리크도 로마제국에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야. 뭔가 건수를 잡아서 돈을 더 뜯어내려고 하는 거지.”
가아니스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더 주기는 어려운데.”
돈 이야기는 확실히 해 놓는 편이 좋았다. 사루스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당연하지. 그냥 기존 가격대로 하면 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들은 용병단 구성과 개략적인 비용에 대해서 합의했다. 가이나스는 일어나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용병단이 구성되면 로마군에 와서 결과를 알려줘.”
“물론이지.”
가이나스는 사루스와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고 그의 집을 나섰다.
가이나스는 발티 가문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온 김에 알라리크도 만나볼 계획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가 마을을 떠날 때 알라리크는 열 살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말을 타고 높은 울타리를 넘다가 떨어져서 땅에 처박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꼭 남들이 안하는 일을 해서 사고를 쳤다.
발티 가문의 집의 뜰은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는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집의 문으로 다가갔다. 막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에 정원에 앉아서 햇빛을 쬐며 책을 읽고 있는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가이나스를 아는 듯 쳐다보았다.
“가이나스?”
“알라리크. 맞구나. 너무 커서 긴가민가했네.”
가이나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던 개구장이 꼬마는 훌쩍 커서 늘씬한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얌전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얼굴을 보니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가이나스는 그의 얼굴을 보자 떠오른 과거 기억에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너 없어졌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산을 뒤질 때 나도 갔었잖아. 너 찾느라고 내가 하루 종일 산속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그랬어?”
“그래. 그때 내가 산에서 다리 삐어가지고 겨우 기어 내려왔잖아. 정작 너는 멀쩡하게 발견됐는데.”
가이나스는 지금까지도 억울한 기분이 드는 듯이 신음했다.
“그뿐이냐? 닭 서리해서 훔쳐 먹고 닭뼈를 우리 집에 갖다 놓고 도망가서 나 혼나게 만들고.”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알라리크는 얼굴이 붉어져서 미안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중에 내가 했다고 사실대로 말했잖아. 난 그냥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해서 그랬어.”
“그렇다고 그런 장난을 쳐?”
“그래서 너랑 닭 주인한테 양쪽에서 쥐어터지고 3배로 갚았잖아.”
“그러게 왜 매를 벌어?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가이나스는 그를 째려보며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던 말썽꾸러기가 발티 가문의 수장 되었다고?”
알라리크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가이나스야말로 출세했던데.”
그는 스틸리코의 신임을 받아서 프라비타보다도 빠르게 고속 승진을 하고 있었다. 40대의 프라비타는 서고트족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라틴어나 교양에 있어서 부족했지만, 20살부터 로마군에서 복무해서 이제 막 30대가 된 가이나스는 언어나 사고방식이 로마인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로마군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지.”
자기자신과 로마군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여유있는 태도였다.
“너도 로마군에 복무해볼 생각 없어?”
“생각이야 있지. 아니, 꼭 해보고 싶어.”
가이나스는 반 로마파라는 소문과는 달리 친근하고 온건한 알라리크의 태도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마침 로마군에서 용병단을 모집하고 있어. 거기서 전공을 세우면 높은 사람들의 눈에 띌 수도 있고, 그러면 빨리 승진을 할 수도 있지.”
“그래? 그럼 자원해봐야겠네.”
가이나스는 순순이 소집에 응하려는 알라리크를 보면서 사루스가 그에 대해서 과장한 면이 있다고 판단했다. 알라리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린 가이나스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너도 바스타르네이 전투에 참가했다던데 로마군과 전투를 해보니 어때?”
“아, 바스타르네이 전투.”
알라리크의 얼굴에 살짝 어두운 표정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바스타르네이 전투를 이야기하면 언제나 그의 전공을 칭찬했지만, 그는 그 전투를 생각하면 언제나 유리크가 먼저 떠올라서 마음이 안좋았다. 자신이 사양한 투구 때문에 유리크가 죽었는데, 로마 장군을 죽였다는 명성은 살아남은 자신이 전부 취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강하더라.”
“그래도 네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던데?”
“로마군 장수를 한 명 죽였을 뿐이야. 그것도 우연치 않게.”
“역시 그게 너였군. 그 로마군 장수가 프로모투스라고 로마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어.”
“서고트족은 훨씬 많이 죽었는걸.”
로마군 장수가 어떤 인물이었던 알라리크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친구와 많은 마을사람들이 그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가이나스는 알라리크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흘깃 보았다. 그리스어로 된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그리스어까지 공부하네?”
“로마제국이 수백 년 쌓아온 지식을 서고트족이 따라가려면 밤낮으로 공부해도 모자라.”
가이나스는 농담을 하듯이 가볍게 툭 던졌다.
“사람들 말로는 발티 가문이 로마제국을 싫어한다던데, 발티 가문의 수장을 직접 만나보니 그렇지도 않네.”
알라리크는 피식 웃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불공정한 관계를 개선해나가자는 거지.”
그의 말에 가이나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을의 건물들을 가리켰다.
“지금의 관계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해? 내가 떠날 때 이 마을은 황무지였고 사람들은 집도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살고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잖아.”
가이나스의 말에 알라리크는 갑자기 진지해지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서고트족은 로마인 지주의 밭을 갈아서 지주에게 세를 내고,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갚고, 제국에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어. 겉으로는 이전보다 나아진 것 같아도 안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굶주리고 있어.”
가이나스는 비관적인 어투로 말했다.
“굶주리고 사는 것이 서고트족만은 아냐. 프랑크족도 반달족도 심지어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 중에도 배고픈 자들은 있지. 그건 누가 나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해결하기가 쉽지야 않겠지. 그래서 로마제국을 공부하는 거야.”
알라리크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들의 부의 원천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서고트족이 로마인들처럼 잘 살 수 있는지, 그걸 알아야 하니까.”
알라리크는 다시금 열띤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가 서고트족에게 많이 불공정한 건 사실이지. 용병료만 해도 그래. 서고트족이 좀 더 높은 가격을 받아도 돼. 어차피 로마인은 군에 입대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사람이 부족하잖아. 로마군의 반의 반도 안되는 급여를 받는 건 문제가 있어.”
속마음을 들어보니 알라리크가 과격한 반 로마파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가이나스는 양팔을 벌렸다.
“로마가 줄 수 있는 용병료 예산에는 한계가 있어. 용병료를 올리면 고용하는 사람 숫자가 줄어들지. 혜택받는 사람만 줄어들 게 될 걸.”
“차라리 그게 서고트족 전체로 보면 이익이지. 용병에 뽑히지 않아도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되니까.”
가이나스는 알라리크를 설득하는 것은 포기했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병사라고 다 똑같은 병사가 아니야. 이번에 보조군으로 들어와서 봐봐. 로마군이 얼마나 대단한지. 옆에서 보면 더 놀랄 거야. 왜 급여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지.”
“그래. 기대되는걸. 곧 다시 만나.”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알라리크는 책을 덮고 집을 나섰다. 사루스가 곧 용병모집을 위한 족장회의를 소집할 테니, 그 전에 미리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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