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호노리우스 황제의 불안증은 점점 심해졌다. 서고트족은 물러갔지만, 안 좋은 추억이 있는 밀라노에는 머물기 싫어했다. 알프스만 넘으면 야만족이 들이닥치는 밀라노가 아니라, 더 안전한 곳에서 지내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로마에서 지내기도 싫다고 했다.
스틸리코로서도 자신이 자유롭게 전선을 돌아다니려면 황제가 적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적당한 곳으로는 라벤나가 있었다. 라벤나는 해군기지가 있어서 여차하면 배를 타고 동로마로 도망칠 수 있었다.
라벤나는 이탈리아반도 동쪽 포 강 하구의 바닷가 늪지대에 위치했다. 수로와 운하가 도시 전체를 감싸며 흘러 다녀서 깊은 해자 역할을 했다. 적이 쳐들어와도 다리를 끊으면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과수원과 포도밭이 있어서 포위되어 물과 식량이 떨어져도 과일과 포도주로 어느 정도 자급할 수 있었다. 바다를 통해서 군대와 식량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스틸리코는 라벤나에 호노리우스가 거주할 황궁을 건설하도록 했다. 호노리우스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라벤나 요새에 들어갔다. 황제는 환관들 외에는 더욱 아무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스틸리코는 동고트족과 그에 합세한 수에비족, 부르군트족, 알라니족 40만 명의 무리가 도나우 강을 넘어 라에티아로 쳐들어오려고 한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동로마황궁이 알라리크를 일리리쿰 군사령관에서 해임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5만의 서고트족 부대가 도나우강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서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지금 속주에는 방어병력이 거의 없었다. 만약 야만족이 국경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온다면 병력이 있는 이탈리아로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격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은 속주의 방위는 각 속주에서 알아서 수비 병력을 모병해서 하도록 떠넘겼기 때문에 경제력이 부족한 속주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기존에 있던 군단병들도 40만명의 야만족이 몰려온다는 소문에 탈영을 하는 형편이었다.
원래 법대로 하면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다. 그렇지만 탈영병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다 처형했다가는 싸울 병력이 남아나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탈영병을 잡아다가 설득해서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부대의 절반 가량은 죽고, 나머지 절반은 탈영하고, 스스로도 탈영했다가 체포된 백인대장을 면담했다. 이전에도 계속 라에티아 전선을 지켜왔던 자로, 그도 알고 있는 자였다.
“왜 갑자기 탈영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스틸리코의 물음에 백인대장은 입술을 떨며 고개를 떨궜다.
“우리는 너무 지쳤습니다.”
그들은 휴가도 휴식기도 갖지 못한 채 몇 년 째 같은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야만족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아군은 죽어 가는데 충원은 되지 않고 반대로 싸워도 싸워도 적의 숫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러니 무력감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초롱초롱하던 그의 눈빛이 절망과 죽음의 어둠으로 가득해진 것을 봐도 그간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해졌고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소용없습니다. 저들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 다 죽을 겁니다.”
백인대장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스틸리코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맞아. 우리 모두 다 언젠가는 죽지.”
그의 부대가 죽어가는 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로마제국을 위해서 싸워달라고 백인대장을 설득해야 했다.
“자네 말이 맞아. 자네는 저들을 멈출 수 없었을 거야.”
스틸리코는 백인대장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어. 저들을 물리치는 건 사령관인 내 책임인데 백인대장인 자네에게 맡겨놨으니 당연히 버거울 수밖에 없지.”
스틸리코의 말에 백인대장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면서 몇 년 간 참아왔던 감정이 복받쳤다.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부하들을 윽박질러가며 혼자서 고립되어 전선을 지켜왔을 그를 생각하면 스틸리코도 안타까웠다.
“그동안 최전선에서 너무 힘들었다는 거 아네. 이제는 이탈리아에 와서 내 밑에 있게.”
스틸리코는 그에게 새로운 부대를 배치해 주었다. 펜을 들어 이탈리아에 있는 부대로 임관하도록 사령장을 써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쉬면서 기운 차리고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데리고 있던 부하들하고 같이 있는 편이 좋겠지? 탈영한 부하들을 체포하는 대로 그리로 보내줄 테니 부하들이 다시 마음 잡게 도와줘. 알겠나?”
백인대장은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그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스틸리코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하고 함께 싸우면 아무리 많은 적도 이겨낼 수 있네. 걱정하지 마.”
“그야 당연합니다. 총사령관님은 단 한 번도 패하신 적이 없으니까요.”
백인대장은 스틸리코의 기운을 받으려는 듯이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진심으로 감사함이 담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바로 자네 같은 사람 때문에 로마가 존재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야만족과 다름없이 살고 있겠지. 야만족과 우리가 다른 점은 자네 같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네.”
비로소 백인대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예전처럼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백인대장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새롭게 배치 받은 군단으로 떠났다. 그러나 스틸리코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방금 말한 대로 야만족을 물리치는 최종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이렇게 병력이 부족해서는 국경을 제대로 수비할 수 없었다. 방어선을 라인강 일대에서 갈리아 남부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알라리크는 다시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서고트족 세력을 모았다. 예전처럼 순식간에 사람이 불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표방하는 노선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로마와 싸워서 땅을 얻자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로마제국과 거래를 해서 서고트족의 땅을 얻자고 주장했다. 그의 제안에 서고트족 족장들은 관심이 시들했다.
“그래서 어떻게 거래를 한다는 겁니까? 뭐가 달라지는데요?”
“약탈도 못한다면서요? 당장 땅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뭘 하자는 겁니까?”
서고트족은 전투와 전리품 약탈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이제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무엇이 좋아지는지 목표가 없어서 그들에게 확 와 닿지 않았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재주가 있는 알라리크도 보이지 않는 목표를 그들에게 설득해내기는 어려웠다. 상호 신뢰를 쌓음으로서 협력관계를 구축해서 서고트족이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는 목표는 너무 막연했다. 아무리 로마화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신뢰와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효과를 모르는 서고트족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동고트족과 같이 로마로 쳐들어가는 게 백번 남는 장사 아닙니까?”
서고트족 족장들은 꼬리를 물려고 달리는 개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이미 여러 차례 로마를 약탈한 달콤한 경험이 있는 그들에게 로마로 진격한다는 동고트족과 라다가이수스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알라리크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로마로 쳐들어가면 그 다음은? 전리품 약탈하면 뭐하게? 스틸리코에게 도로 다 뺏길 텐데?”
족장들은 대꾸를 하지 못하고 뺨을 긁적었다. 일 년 간 돌아다니며 힘들게 긁어모은 전리품을 스틸리코에게 홀랑 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어쩝니까?”
“우리가 원하는 건 로마영내에서 로마인과 평등하게 사는 거잖아. 그러니 로마를 공격하기보다는 그들과 거래를 하자는 거야.”
알라리크는 말을 못 알아듣는 족장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설득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뿌리깊이 박인 로마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야만족을 멸시하는 것처럼 서고트족도 수십 년 간 로마인에 대한 쌓인 감정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우리를 야만족이라고 멸시하면서 이용만 하려고 합니다. 그게 얼마 전까지 당신이 할 말 아닙니까?”
서고트족은 갑자기 바뀐 알라리크의 태도에 의혹이 섞인 눈길을 보냈다.
“맞아. 나도 얼마 전까지는 죽어도 로마와는 손잡지 않을 생각이었어. 지금도 로마를 무조건 믿자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거래를 하자는 거야. 거래를 하려면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야지.”
알라리크는 자신도 과거에는 그들처럼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끈기를 가지고 족장들과 대화했다.
스틸리코와 알라리크는 서로를 이용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은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협력할 수 있는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협상을 했다.
스틸리코가 서고트족을 통해서 우선 해결하려고 한 문제는 이탈리아로 소환하느라 비어버린 갈리아 속주의 병력 보충이었다.
법을 개정해서 속주에서 모병을 할 권한을 주었지만, 제대로 실행이 되지 않고 있었다. 법이 실행된 지 꽤 시일이 지났지만, 갈리아 군단의 숫자는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방법의 문제는 각 속주의 재정상황과 능력이 미비하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리코가 직접 나서서 모병을 했기에 반발은 있어도 징집한 사람으로 군단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속주에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속주민은 군대에 지원하지 않았고, 갈리아의 의원은 돈을 내놓으려하지 않았다. 중앙정부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각 속주에 하라고 하니 제대로 되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로마군 방어선을 갈리아 남부로 이동시키는 대신, 방어가 필요한 갈리아 북부의 군사 거점 인근의 땅을 일부 서고트족에게 나눠주고 그 지역에 정착해 살면서 방어하도록 하는 방안을 알라리크에게 제안했다.
일리리쿰에서 서고트족과 로마인이 섞여서 살면서 그 지역을 방어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차이점이 있었다. 새롭게 제안한 방법은 그 지역을 방어해주는 대가로 땅의 일부를 서고트족에게 불하해주는 것이었다. 일리리쿰에서는 땅을 받지는 못했는데, 이번에는 서고트족에게 수비를 해주는 대가로 땅을 주는 것이었다.
서고트족 왕국을 독립적으로 세우지 못해도 땅을 준다니 일단은 만족스러운 조건이었다.
“땅을 얼마나 주면 되겠나?”
스틸리코의 물음에 알라리크가 대답했다.
“절반은 줘야지.”
아무리 그에게 은혜를 입었어도 거래는 거래였다. 그에게는 서고트족 왕으로서 그들의 이익을 대표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부대를 유지하는 비용을 받은 땅에서 나온 수익으로 모두 충당해야 하니 헐값에 협정을 맺을 수는 없었다.
“절반을 내놓으라고 하면 원로원에서 절대 통과가 안 될 거야.”
로마인이 가진 땅을 야만족에게 주도록 하려면 원로원에 법안을 통과시켜야 했다. 둘만 합의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스틸리코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원로원은 야만족과 동등해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우월한 위치를 점해야 승인할 것이다.
“그럼 1/3로 하지.”
그들은 논의 끝에 갈리아 북부에 방어가 필요한 군사기지 인근지역에 1/3 의 땅을 받고 해당 지역을 방어하는 것에 합의했다.
알라리크는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서 손가락을 자르고 몸을 자해해서라도 어떻게든 빠지려고 드는 로마인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몰라서 못하는 건 가르치면 되지만, 알면서 안 하려고 드는 건 방법이 없지.”
규칙을 지킬 줄 모르는 야만족은 규칙을 지키도록 가르치면 되지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무를 짊어지기 싫어서 도피하는 로마인은 가망성이 없다는 뜻이었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말을 받아쳤다.
“모르는 것은 평생 모르는 채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이미 아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천할 수 있지.”
타락하고 나태하더라도 명예와 의무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야만족보다는 로마인이 앞서있다는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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