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게리크
회담에서 핏기가 없는 얼굴이 되어 돌아온 알라리크를 보고 아타울프가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왕비님과 왕자님께 무슨 일이 있답니까?”
“아니.”
알라리크는 혼자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머리를 감쌌다. 자신이 스틸리코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기력한 로마군이 스틸리코만 만나면 비상하게 전투력이 상승하는 것도 모두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실력도 안 되면서 스틸리코와 싸우겠다고 덤비는 것은 서고트족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었다. 그를 이기지 못하면 자신이 없어져주는 편이 서고트족에게 나을 것이다.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으로서 자살을 할 수도 없고, 서고트족 왕에서 물러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보려고 마음먹었다.
어떤 극단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스틸리코의 뜻대로 호락호락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순순히 로마 황제의 길들여진 노예로 살아갈 뜻은 없었다.
전술로 스틸리코를 이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략이 아닌 돌발행동으로 흔들어보려는 것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안심하고 있는 상대방의 허를 찔러서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어디를 공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
그들이 퇴각하는 경로에는 만토바, 베로나 등의 도시가 있었다. 만토바는 평야지역에 있고 이탈리아 내륙에 위치해서 포위될 우려가 있었다.
베로나는 알프스 산맥 끝자락과 연결되어 있어서, 북방의 야만족과 연결할 수 있는 길목이었다. 여차하면 산으로 도망가기도 쉬웠다.
알라리크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조약대로 퇴각하는 척 하면서, 지나가는 길에 있는 베로나를 공격해서 손에 넣으려 했다. 그는 비밀을 유지하려고 그가 신뢰하는 몇몇 족장들에게만 정보를 알려주었다.
“베로나를 공격한다고요?”
그들은 놀라서 눈이 커졌다.
“퇴각하기로 로마와 조약을 맺었지 않습니까?”
알라리크는 그들을 설득했다.
“신과의 약속인 부활절을 지키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데, 인간끼리의 약속인 평화협정을 무시하는 것쯤 무슨 상관이야.”
족장들은 이내 수긍했다.
“하긴 그렇습니다.”
부활절에도 공격하는 스틸리코를 이기려면, 그 이상의 대담한 미친 짓을 해야 했다.
베로나에는 높은 성벽이 있지만, 그들이 퇴각한다고 믿으니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할 준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안에 병력도 얼마 없을 것이고, 로마군은 밀라노와 로마 주위에 배치되어 있었다.
성 앞에 난 가도를 따라 행군하며 지나가는 척 하다가 기습적으로 말을 달려서 열린 성문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것이다. 기병이 성문 앞의 문지기를 제거하고 성문을 닫지 못하도록 한다. 그 틈에 병사들이 들어와서 성을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알라리크는 모든 족장에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측근과 몇몇 족장들에게만 알려주고 입단속을 했다.
“이건 절대 비밀이야. 사전에 작전을 누설하면 안 돼.”
기습공격이니만큼 스틸리코의 귀에 정보가 들어가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비밀을 지키기로 했지만,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었다. 자신의 수하들 몇몇에게는 작전을 공유하고 미리 언질을 줄 수밖에 없었다.
베로나의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사다리를 준비해야 했다. 족장의 명령에 부하들이 물었다.
“갑자기 사다리는 어디에 쓰려고 만들라는 겁니까?”
“쓸 데가 있어서 그래.”
“혹시 어디 공격하려고 그러는 건가요?”
“그건 말 할 수 없어. 알려고 하지 마.”
그들은 끈덕지게 족장에게 물었다.
“대충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싸울 준비를 하죠.”
“맞습니다. 갑옷이라도 입고 있어야 싸우죠. 맨몸으로 어떻게 싸웁니까?”
족장들의 부하들은 그의 혈육과 친족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몇몇에게만 비밀을 지키라고 하면서 알려주었다. 그들도 비밀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역시 완벽한 비밀은 없었다. 그렇게 알음알음 소문이 비밀리에 퍼져나갔다.
서고트족은 천천히 북상하며 포 강을 건너서 퇴각했다. 강의 다리를 건너며 말에 물을 먹이기 위해서 잠시 쉬어갔다. 말이 물을 마시는 동안 병사들도 수통에 물을 채웠다.
싱게리크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다리 밑으로 갔다. 알라리크를 따르는 족장의 부하 중 한 사람에게 슬쩍 다가가서 수통을 씻는 척 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공격하려는 도시가 어딘지 알아봤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싱게리크에게 귓속말을 했다.
“베로나랍니다.”
싱게리크는 씨익 웃더니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서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네 사촌이 네게 안부 전해달래. 나중에 잘 되면 로마군에 자리 하나 알아봐 준다고 하네.”
그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 강을 건넌 서고트족은 민키우스 숲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며 베로나를 향해 갔다. 3일 후에는 베로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해질녘이 다가오자, 서고트족은 불을 피우고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어둑어둑해지면서 동굴에 숨어있던 박쥐 떼가 먹이를 찾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잠이 들자 싱게리크는 야영지를 벗어나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숲길을 따라서 아까 지나오면서 자기가 삼각형으로 나뭇가지를 꺾어서 표시한 곳으로 되짚어갔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 정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싱게리크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알라리크가 베로나를 기습공격 한답니다.”
정찰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그에게 전해주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싱게리크는 돈주머니를 옷 속에 집어넣고 주위를 둘러보고 야영지로 돌아갔다.
“알라리크가 베로나를 친다고 합니다.”
사루스는 싱게리크가 보낸 정보를 스틸리코에게 보고했다.
로마군에 오랫동안 복무한 서고트족이 많기 때문에, 족장의 부하들과 혈연으로 얽혀있거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싱게리크는 그들을 앞세워서 알라리크를 따르는 족장의 부하들에게 접근해서 돈을 주고 정보를 알아냈다.
“끝까지 말썽입니다. 악마에 홀린 게 아니고서야 왜 이런 짓을 합니까?”
가우덴티우스가 투덜거렸다.
알라리크는 어째서 이렇게 로마 공격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집념을 가지는 것일까.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자해에 가까운 공격을 반복해서 할 수가 없었다.
일리리쿰으로 돌아가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도 될 텐데 남은 병력마저 모조리 쏟아가며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사루스는 조바심을 내며 스틸리코에게 강하게 주장했다.
“어리석은 알라리크가 탐욕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않고 알라리크를 죽여 없애야만 합니다.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스틸리코는 대답 없이 베로나 인근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알라리크의 심경을 읽어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족도 잃고 자존심도 잃은 알라리크는 명예를 회복하고 서고트족의 흐릿해진 목표의식을 재결집시키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다.
알라리크가 아직도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런 희망조차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병력을 이동시켜.”
스틸리코는 흩어져있는 군단을 베로나 주위로 소환했다. 이번에야말로 알라리크가 가진 전 병력을 빼앗아버릴 것이다.
“베로나 성 주위에 참호를 파고 병력을 숨겨놔.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위장해놓고.”
“알겠습니다.”
“베로나에도 연락해서 대비를 하도록 하고. 전투는 금방 끝날 테니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라고 해.”
전령은 스틸리코가 써준 편지를 들고 베로나로 갔다.
베로나로 출발하려는 스틸리코에게 사루스가 다급하게 요청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스틸리코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기병은 가우덴티우스의 부대로 충분해. 여기 남아있어.”
사루스는 분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서 떠나는 자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무장을 갖추고 이동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베로나로 출발하면서 알라리크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이번 공격에 사활을 걸었다. 베로나 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이대로 죽을 것이고, 성을 점령하면 그 곳을 기반으로 알프스를 넘어서 그를 찾아오는 야만족들로 차근차근 세를 불려서 다시 한 번 로마로 쳐들어갈 요량이었다.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대부분의 족장들은 베로나를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영문을 모르고 갑옷을 꺼내 입었다.
“전투가 있습니까? 로마군과 싸우는 겁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어디를 향해 가던 대장을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도 갑옷을 갖춰 입었다. 가지고 있던 갑옷과 투구는 폴렌티아 전투에서 강을 건너 헤엄쳐가느라 벗어놓고 왔지만, 그동안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약탈해서 갑옷과 투구를 훔쳐놓은 것이 있었다.
로데리크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병사도 몇 명 안 되는데 어디를 공격하려는 것일까. 지금까지 싸운 전투 중에서 가장 적은 숫자의 병사로 싸우는 것이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동생의 갑옷 줄을 조여 매주었다.
일리리쿰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투라니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리리쿰에 가도 할 일은 농노가 되어 농사짓는 것 밖에 없었다.
싱숭생숭한 그와 달리 비터리크는 새로운 모험에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알라리크가 그들을 승리로 이끌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비터리크는 칼을 수건으로 닦으며 환한 얼굴로 로데리크에게 물었다.
“어디를 공격한대?”
“몰라. 비밀이래. 뒤처지지 말고 잘 따라오래.”
로데리크는 방패의 손잡이가 흔들거리지 않는지 확인하고 군화 끈을 당겨서 맸다. 비터리크는 몸통을 이리저리 돌리며 풀었다.
“어디든 스틸리코만 없으면 문제없어.”
스틸리코는 협정 후에 밀라노로 갔다는 소문이었다.
서고트족은 베로나 앞으로 뻗은 가도를 따라서 이동했다. 북쪽에는 눈 덮인 알프스 산이 아름답게 뻗어 있었다. 남쪽에는 곡식이 익어가는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북쪽의 알프스 너머의 라에티아, 노리쿰, 판노니아에 있는 야만족 부족과 손을 잡기도 편하고, 베로나에서 로마까지는 걸어가도 열흘이면 갈 수 있었다. 야만족 부족을 베로나로 불러들여서 그곳에서 진영을 갖추고 로마로 쳐들어 내려가는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다.
알라리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성벽 너머로 보이는 높은 교회 종탑과 건물 지붕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성문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말아야했다.
베로나 성벽의 붉은 벽돌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베로나는 서고트족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평상시와 다름없이 성문을 열어놓은 채였다. 농부들이 한산하게 수레를 끌고 드나들었다.
야만족의 무리가 가까이 오자, 로마인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성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성을 드나드는 사람이 뚝 끊어졌다.
알라리크는 태연하게 성 쪽을 쳐다보지 않고 지나가는 척 했지만,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지기들은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도 동서로마를 휘젓고 다닌 알라리크의 악명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성문 앞을 지나갈 때 알라리크가 소리쳤다.
“가자!”
알라리크의 신호에 서고트족 기병은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서 베로나 성문을 향해서 달려갔다.
문지기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마른 수건에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서둘러 성문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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