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
알라리크는 연합을 할 게르만족을 하나하나 물색했다.
트리비길트가 이끌던 동고트족은 그와 함께 몰살당해서 당분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을 잃었다.
프랑크족은 아르보가스트가 죽은 이후에 북쪽으로 물러갔다. 로마의 동맹이 되어서 로마로부터 라인강 하류에 거주지역을 얻어서 라인강을 수호하고 있었다. 프랑크족 족장 마르코미르는 스틸리코에게 협력해왔으니 제외하는 편이 안전했다.
반달족은 훌륭한 지도자인 고디기젤이 상당한 세력을 결집시켰다. 그는 용맹한 장수이고 반달족은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부족이었다. 그들은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프랑크족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알라니족은 친 로마파인 고아르와 반 로마파인 레스펜디알을 따르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부족 내부 주도권 다툼 중이었다. 외부 전쟁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수에비족은 마르코만니족, 알레만니족, 쿠아디족 등 여러 개의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리리쿰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종종 도나우강을 건너 공격해왔기에 알라리크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수에비족에게 밀사를 보내서 지도자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시도했다.
야만족들은 각자 상황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있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수에비족은 답변을 보내왔다. 수에비족 전령이 직접 길을 안내하러 온 것이다.
“족장들이 당신을 만나보겠다고 합니다.”
일리리쿰과 가까운 노리쿰과 라에티아의 북쪽에 위치한 그들은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이 로마군을 상대로 이루어낸 성과를 잘 알고 있었다.
아타울프는 직접 도나우강을 건너 야만족의 땅으로 가겠다는 그가 걱정되어 말렸다.
“얼마 전에도 수에비족과 전투를 치렀는데 그들을 만나러 직접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내가 직접 가야 내 말을 들을 거야.”
알라리크는 소수의 병사들만을 데리고 전령을 따라서 도나우 강을 넘어 노리쿰과 라에티아를 지나 수에비족의 땅으로 들어갔다.
숲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나무에 사방이 어두웠다. 짙은 나무향기가 코를 엄습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이 로마에 정착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숲에서 산 기억은 없었다. 숲은 그의 조상들의 고향이었다.
숲에서 살던 부모와 할아버지 세대 조상들의 삶이 어땠을지는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굶주리며 누더기를 걸치고 사는 수에비족을 비롯한 야만족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알라리크는 겉모습은 야만족이었지만, 생활양식으로 보면 로마인에 가까웠다. 짐승 가죽을 걸치고 맨발로 산속을 뛰어다니며 머리도 빗지 않고 다니는 야만족을 보노라면,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면 질겁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길도 없는 산속을 며칠 걸어서 수에비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집과 천막이 많을 뿐,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할 시설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로도 우물도 방앗간도 대장간도 도로도 아무것도 없었다. 로마의 도시처럼 도서관과 목욕탕과 원형극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빵집이나 음식을 파는 가게라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조차도 없었다. 그저 통나무집과 마구간뿐이었다.
수에비족을 대표하는 족장 헤르메리크는 여러 부족을 끌어안은 포용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알라리크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은 알레만니족, 쿠아디족 등 다른 부족의 족장들을 소개했다.
점잖은 수에비 족장과 달리 젊은 알레만니족 족장이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를 공격하더니 꼴좋게 되었군.”
그들도 알라리크가 해임된 것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른 족장도 시끄럽게 발을 구르며 야유를 했다.
“그렇게 우리를 쫒아내다가 로마에 버림받으니, 이제 우리에게 손을 잡자고?”
그들이 로마를 습격하고 약탈할 때마다 알라리크가 이끄는 로마군이 격퇴했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헤르메리크는 손을 들어서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무슨 일로 우리를 보자고 한 거요?”
그는 알라리크의 의도를 궁금해 했다.
“로마군으로서 온 거요, 서고트족 왕으로서 온 거요?”
알라리크는 족장들의 냉대에도 개의치 않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수에비족의 친구로서 왔습니다.”
알라리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전에 서고트족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영내에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할당받기를 원했다.
“당신들의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훈족으로부터 안전한 로마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을 원하시는 거지요?”
헤르메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도 프랑크족처럼 로마에 거주할 땅을 받고 싶소. 로마는 프랑크족만 영내로 받아들여서 우리와 싸우게 하고,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소.”
로마가 흔하게 사용하는 이이제이 전략이었다. 프랑크족에게만 독점적으로 국경의 땅을 떼어주고 나머지 야만족들과 싸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약 프랑크족이 불손한 기미를 보이면 그 특권은 다른 부족에게 넘어갈 것이다.
“로마로부터 땅을 얻어낼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알라리크의 말에 족장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로마로부터 땅을 얻어낸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스틸리코가 버티고 있는 로마군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이오?”
알라리크는 그들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로마는 우리를 전략적으로 상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힘으로만 밀어붙일 게 머리를 써야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전투에서 이길 생각만 하는데 전투에서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마군과 싸워서 반드시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족장들은 알라리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눈썹을 찡긋거리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들도 알라리크가 스틸리코에게 패했지만, 일리리쿰 군사령관이 된 것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목적을 이루었는지 방법이 궁금했다.
“이기지 않고 어떻게 원하는 걸 얻는단 말이오?”
“괴롭히면서 협상을 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저들이 빨리 협상에 임해야만 하는 급한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급한 상황이란 게 전투에서 이기는 것 말고 뭐가 있소?”
“속주에서 아무리 소란을 떨어봐야 로마인들은 눈 하나 깜짝 안합니다. 자기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몇 만 명이 죽어나가도 상관하지 않죠. 저들의 본토, 황제와 원로원이 있는 곳, 이탈리아를 공격해야 합니다.”
“아하.”
족장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에만 몰두하는 그들에게 본토를 공격하자는 알라리크의 전략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로마 내부의 상황과 역학관계를 아는 알라리크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었다.
“맞아. 팔다리를 아무리 공격해도 소용없어. 머리나 심장을 공격해야지.”
한 족장이 질문했다.
“국경도 못 뚫는데,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까지 어떻게 간단 말이오?”
그것이 알라리크의 작전의 핵심이었다.
“여기서는 멀지만, 내가 있는 일리리쿰에서는 멀지 않습니다. 내가 이탈리아를 공격할 겁니다. 여러분은 라에티아를 공격하십시오.”
“양동작전이로군.”
“진짜로 이탈리아가 일리리쿰에서는 가깝네.”
족장들은 머리를 지도 위로 들이밀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라에티아가 공격받으면 스틸리코는 이리로 올 겁니다. 그때 내가 이탈리아를 공격할 겁니다.”
알라리크는 지도에서 자신의 군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내가 일리리쿰에서 이탈리아를 공격하면 스틸리코는 나를 막기 위해서 서둘러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원하는 요구조건을 무조건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안 돌아가면 황제와 원로원이 위험하니까요.”
그의 말에 족장들은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겠네. 자기 집이 공격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스틸리코의 뒤를 치는 거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어 알라리크를 비웃던 족장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눈이 빛났다.
헤르메리크가 물었다.
“그럼 당신이 얻는 건 뭐요? 뭘 바라는 거요?”
알라리크는 지도에서 밀라노를 가리켰다.
“내가 원하는 건 당연히 호노리우스 황제입니다. 당신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에 그를 잡을 겁니다.”
로마 황제를 잡겠다는 자신만만한 알라리크의 말에 족장들은 입을 벌리고 경탄에 마지않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황궁을 공격해서 황제를 사로잡아보겠다는 패기를 가진 야만족은 없었다.
“그게 가능하겠소?”
“서고트족은 로마군과 똑같이 훈련했습니다. 로마군이 하는 작전은 모두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도 가능합니다.”
알라리크의 기발하고 대담한 계획에 족장들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좋소. 한번 해 봅시다.”
“언제 시작할 거요?”
알라리크는 공조를 위한 시기를 조율했다.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다가 겨울에 강이 얼어붙으면 건너십시오. 저는 아퀼레이아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스틸리코가 알프스를 넘어가면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알라리크는 겨울에 수에비족이 공격해오면 스틸리코가 알프스를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눈으로 길이 막혀서 발이 묶인 틈에 자신이 호노리우스를 잡으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행운을 빌겠소.”
그들은 굳게 결의를 다지고 헤어졌다.
일리리쿰으로 돌아온 알라리크는 서고트족 족장들을 소집했다.
“우리에게는 안심하고 정착해서 살 땅이 필요하오. 이탈리아를 공격해서 우리 땅을 얻어내겠소. 다 같이 출정하는 거요.”
그들도 알라리크가 일리리쿰 군사령관에서 이유 없이 해임된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옳습니다. 황제를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 땅을 얻어서 독립해야 합니다.”
“알라리크 전하는 서고트족의 왕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하를 따를 겁니다.”
족장들은 즉시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가서 미련 없이 수레에 짐을 싣고 이동준비를 했다. 일리리쿰은 4년간 정든 땅이었지만,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부유한 귀족들의 농장에서 노역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라리크가 없는 이곳에 머물러봐야 미래가 없었다.
야만족 병사들도 대거 로마군을 이탈해서 알라리크를 따라나섰다. 이곳에 있어봐야 박봉에 평생 야만족과 싸우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알라리크를 따라서 이탈리아를 약탈하고 한 몫 챙겨보려는 야만족들은 너도나도 그를 따랐다.
“어떡할 거야? 알라리크를 따라 갈 거야?”
비터리크가 로데리크에게 물었다. 로마군에 야만족 부대에 편입되어서 급료를 받고 있는 그들이었다. 굳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알라리크를 따라서 방랑을 떠날 필요는 없었다.
“돈은 꽤 모았는데.”
로데리크는 중얼거렸다. 그는 결혼을 하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었다. 아직 마음에 둔 여자는 없었지만, 언젠가 그런 여자가 생기면 언제든 결혼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도 중매가 여기저기서 들어왔지만 딱히 마음이 확 끌리는 여자가 없었다.
알라리크를 따라나서면 안정적인 생활은 끝이었다. 월급도 결혼도 가정을 꾸리는 것도 당분간은 물건너 가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너는?”
“전에 얘기했잖아. 평생 알라리크를 따라다닐 거라고.”
비터리크는 벌써부터 흥분에 들떠 있었다. 그는 일리리쿰의 정착생활보다 예전에 약탈하며 돌아다니던 자유로운 방랑생활을 더 좋아했다. 알라리크가 야만족을 이끌고 일리리쿰을 떠날 거라는 소문이 돌자, 그때부터 훈련도 건성으로 참가하고 물건을 팔아서 처분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로데리크는 다소 무료하고 힘들고 따분하지만 일리리쿰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비터리크는 그를 잡아끌었다.
“같이 가자, 형. 군대에 있어봐야 평생 훈련만 하고 월급은 쥐꼬리만 하잖아. 이제 야만족은 승진도 잘 안 시켜줄 거래. 장교는 가톨릭교도에 로마인들만 될 거래.”
그건 그랬다. 야만족의 승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대 경험도 없는 로마인 젊은이가 바로 장교로 부임하는 것에 비하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가야 했다. 알라리크가 없으면 그마저도 어려울 것이다. 평생 애송이 로마인 청년 장교의 시중을 들 결심이 서지 않으면,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편이 나았다.
“그래. 까짓거 가자.”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두렵기도 했지만, 이전에 약탈했던 금괴와 보석과 비단옷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또다시 그런 것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리리쿰에서는 정직하게 노동하며 작은 보상에 만족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사치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알라리크를 따라가면 무한한 기회가 열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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