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렌티아 전투
여기저기서 비명과 울음소리, 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무기를 꺼내든 서고트족 병사들은 갑옷을 입을 시간도 없이 적에 맞서려고 했지만, 진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기병대에게 한 명씩 거꾸러졌다.
알라리크도 갑옷을 입지도 못한 채 말에 올랐다.
“기병대 앞으로!”
도망치는 병사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이도록 칼을 들고 소리쳤다.
“알라리크는 어디 있나!”
선봉에 선 알라니족 사울은 그를 찾아다니다가 덤벼들었다.
“너 때문에 피해를 보는 야만족 병사들이 몇 명인 줄 아느냐? 네가 서고트족을 꼬드겨서 약탈과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바람에, 야만족이 로마에서 출세도 못하고 있다.”
사울은 괴성을 지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사울이 내리친 칼과 알라리크의 칼이 부딪쳤다.
사울은 다시 무서운 힘으로 내리쳤다. 알라리크는 몸을 뒤로 뉘어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칼끝이 그의 가슴을 찌르며 옷을 베었지만 상처를 입히기에는 거리가 모자랐다.
알라리크는 몸을 일으키며 반동으로 앞으로 몸을 굽히며 칼로 찔렀다. 사울의 갑옷이 퍽 소리와 함께 찌그러들었다.
“그렇게 사령관이 되고 싶나? 사령관 나도 해봤지만 소용없어. 열심히 일해도 황제의 변덕에 날아가는 건 한순간이야.”
알라리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사울의 칼이 그의 코앞에 나타났다.
“너를 죽여서 로마군에 복무하는 야만족의 명예를 되살리고야 말겠다.”
사울은 팔을 쭉 뻗어서 분노를 담아 칼을 찔러왔다. 알라리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사울의 칼을 밀쳐냈다.
로마군에는 알라리크를 미워하는 야만족이 많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가이나스도 그랬고 로마군에 잘 적응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야만족 출신들은 로마와 야만족의 불화를 일으키고 다니는 문제아 알라리크를 증오했다.
“너 따위가 로마제국의 고마움을 모르고 야만족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것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다.”
알라리크가 거듭 막아내자, 사울은 거칠게 소리치며 이번에는 칼을 옆으로 휘둘러서 알라리크를 베려고 했다. 미처 갑옷을 입지 못한 알라리크는 베이기만 해도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죽어라! 이 배은망덕한 서고트족아!”
사울은 악에 받쳐서 알라리크를 공격했다. 그동안 그가 겪었던 야만족으로서의 수모와 차별과 억울함이 모두 알라리크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알라리크가 있다!”
사울의 기병대가 알라리크를 잡으려고 달려왔다. 무기를 든 서고트족도 알라리크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주변에 몰려든 사울의 알라니족 기병대와 서고트족이 뒤섞여서 난전을 벌였다.
휙 하는 바람을 일으키며 사울의 칼이 알라리크의 팔에 스치자, 피가 흘러내렸다. 알라리크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알라니족과 서고트족을 싸우게 만드는 상황을 보고도 모르겠나? 로마는 돈으로 야만족들끼리 싸우게 만들고 이용해먹을 뿐이지 절대로 야만족을 동등하게 대해줄 리 없다.”
“닥쳐! 나는 야만족이 아니라 로마인이다.”
사울은 반뼘 차이로 그의 칼끝을 피해가는 알라리크를 쫒아서 점점 깊이 칼을 휘둘렀다..
“그런다고 로마인들이 인정해줄 것 같아? 넌 절대 로마인이 될 수 없어.”
“헛소리 마라! 네 목을 베고 진정한 로마인이 되고 말겠다.”
사울은 헐떡거리며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알라리크는 그에게 소리쳐 대답했다.
“그래, 로마인이 되는 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가 너를 로마인들에게 인정받게 해주지.”
사울은 다시 고함을 지르며 증오를 담아서 칼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려서 머리위에서부터 칼을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쇄도한 알라리크의 칼이 먼저 아래에서 위로 사울의 목에 꽂혔다. 사울의 목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사울의 눈이 부릅떠진 채로 알라리크를 노려보았다. 알라리크는 사울을 향해서 말했다.
“야만족이 로마인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로마를 위해서 죽는 것뿐이야. 넌 이제 로마인들에게 용감한 야만족으로 영원히 그들의 역사에 기록될 거다.”
사울은 그대로 말 위에서 땅으로 고꾸라져 떨어졌다. 사울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피에 목이 막혀서 입만 벙긋 거리다 숨을 거두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던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는 로마군이 공격해오자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들의 수레로 도망쳤다. 건장한 청년인 그들은 기병대의 공격의 표적이 될 것이다.
서둘러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방패를 들고 싸우기 위해서 자신의 부대를 찾아 달려갔다. 바닥에 떨어진 빵과 계란 바구니가 발에 채였다. 뿌연 먼지 속에서 기병대가 지나갈 때마다 깨진 포도주병에서 흘러나온 포도주 향과 피 냄새가 뒤섞였다.
그들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두리번거리며 소속부대의 깃발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저기 있다.”
간신히 부대를 찾아갔지만, 자신들처럼 제대로 찾아온 병사의 숫자는 백 명 중에서 고작 삼십 명이었다. 이 숫자로는 전열을 갖출 수 없었다.
이내 스틸리코의 본대가 돌격해왔다. 로마군 깃발아래 한 명도 도망칠 수 없도록 일렬로 줄을 맞춰 방패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보병대의 모습이었다.
“기수! 부대별로 집합!”
알라리크는 서고트족들도 전열은 갖추도록 명령했지만,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집합한 숫자는 절반도 안 되었다. 가족들을 보호하느라 그들과 같이 있던지, 도망쳤던지,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던지, 아니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모인 자들도 흥분해서 제멋대로 움직였다. 기수는 어디에 서야 할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병사들은 자신의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서로 부딪쳐 난장판이었다.
알라리크는 이번에도 패배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본대를 전진시키며 그 뒤에서 전황을 살펴보는 스틸리코의 모습을 발견하니, 가슴이 서늘했다.
스틸리코도 가톨릭 기독교도였기에 그가 부활절에 공격을 해올 줄은 몰랐다. 내일 쯤은 공격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좀 더 빨리 부활절이 끝나는 오늘 밤 자정에 야습해 올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뛰어넘고 부활절 당일 아침에 미사를 보고 있는 그들을 공격했다.
알라리크는 자신의 안이한 생각과 실책을 뼈저리게 자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여인과 아이들은 로마군을 피해서 수레를 버려둔 채 가까운 북쪽 숲 방향으로 달아났다. 얼마 가지 못해서 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로마군이다!”
북쪽의 숲에서 갈리아에서 소환한 병사들이 걸어 나왔다. 서쪽에서도 로마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남쪽은 타나로 강으로 막혀서 도망칠 수 없었다. 물을 확보하고 수비를 편하게 하려고 강을 끼고 전진했는데, 강이 그들을 가두는 우리가 될 줄은 몰랐다.
‘포위당했구나.’
알라리크는 머리가 띵했다. 서고트족이 강을 따라서 전진하는 것을 보고, 스틸리코는 오히려 강을 끼고 포위를 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오래 동안 그들의 뒤를 쫒으면서도 공격을 하지 않은 이유는 방심하고 무장을 하지 않은 부활절에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도망치지 못하게 강을 끼고, 산에 있는 퇴로를 차단하고, 부활절 예배 중에 일망타진하는 계획이라니, 완벽한 시간에 완벽한 장소 선정이었다.
전에도 패전을 했지만, 그 때는 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전투에는 졌지만, 병사들의 가족들은 안전하게 피했다. 지금은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로마군에게 포로가 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날씨가 아직 춥잖아. 이런 날씨에 아녀자들이 포로로 잡히면 고생이지.’
스틸리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 이미 서고트족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포위되었습니다. 뚫고 도망쳐야 합니다.”
아타울프가 알라리크에게 소리쳤다. 알라리크는 핏발이 선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들을 물리치지 못하면, 이 자리에 뼈를 묻을 것이다.”
아내와 아들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알라리크는 죽을 각오를 했다. 그러나, 아타울프 뿐만 아니라 다른 족장도 로마군에게 달려 나가려는 알라리크의 말고삐를 잡고 사정했다.
“서고트족의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왕이 없으면 서고트족은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겁니다.”
알라리크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아타울프가 알고 있었다. 그는 슬픔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왕비님은 내 여동생입니다. 나라고 그들을 버리고 가고 싶겠습니까!”
그 말에 알라리크는 가슴을 꽉 막히게 하고 목구멍으로 토해져서 올라오는 울분을 억지로 삼켰다. 이 모든 것이 그가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 서고트족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남은 서고트족에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까지 온갖 오욕과 비난과 책임추궁을 받아 마땅했다.
“이쪽입니다!”
아타울프가 로마군이 없는 남쪽의 강을 가리켰다. 알라리크는 이를 악물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아타울프를 따라서 말을 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보고 방긋방긋 웃던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로데리크는 알라리크와 아타울프가 말을 달려서 그의 곁을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
“알라리크가 저기 가는데?”
비터리크에게 말했다. 알라리크는 남쪽의 타나로 강을 건너서 말을 달려서 빠져나갔다. 그것을 보자 비터리크는 소속 부대의 전열을 벗어나서 달려갔다.
“어디 가? 부대에 있어야지.”
로데리크가 따라가서 붙잡자 그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도 알라리크가 있는 곳에 있어야지.”
처음부터 알라리크가 간다기에 온 것이었다. 그가 이곳에 없는데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가?”
로데리크는 동생의 말에 머뭇거렸다. 부대를 이탈하는 것은 탈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대라고 할 만큼의 전열이 갖춰진 상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지휘관인 알라리크도 달아나고 있었다.
“뛰자!”
그들은 몸을 낮춰 서고트족을 휘젓고 다니며 목을 베는 로마군 기병대를 요령껏 피해서, 알라리크가 빠져나간 강으로 헐레벌떡 달음박질 쳤다.
타나로 강은 폭이 꽤 되고 깊었지만, 물살이 잔잔했다.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건널 만 했다. 그들은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칼만 차고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들 외에도 서고트족 기병대가 말을 타고 우르르 물로 뛰어들어서 강을 건너갔다.
로데리크와 비터리크는 무사히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왔다. 그들은 숨을 헥헥 거리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뒤를 돌아보자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건너편 강가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다가 로마군에게 끌려갔다. 간발의 차이로 살아난 것이다. 그들은 뒷걸음질 쳐서 여전히 비명소리가 들리는 전장을 흘끔흘끔 보며 알라리크가 사라진 방향으로 뒤따라갔다.
“알라리크가 남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가우덴티우스의 보고에 스틸리코는 강을 건너서 멀어지는 서고트족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알라리크의 부인과 아들은?”
“붙잡아놨습니다.”
스틸리코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이제 슬슬 정리하고 돌아가지.”
로마군은 서고트족에게 알라리크가 도망쳤으니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지휘관이 없이는 저항이 무의미했다. 서고트족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몇 천 명은 도망쳤지만, 수만 명의 서고트족이 고스란히 포로로 잡혔다. 특히 아이와 여자들은 전원이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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