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동료
“루피누스가 죽었다고?”
콘스탄티노플로 사정을 알아보러 갔던 서고트족 연락병은 루피누스가 이미 죽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알라리크에게 보고했다. 알라리크는 자신의 편이 갑자기 권력에서 밀려나 죽었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스틸리코의 군대를 회군시킬 정도의 권력을 가진 자가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죽다니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인가?”
“가이나스가 이끄는 로마군 열병식에 갔을 때 병사들이 그를 죽였다고 합니다.”
“가이나스. 그렇군.”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는 단순한 성격이니, 뒤통수를 친 루피누스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알라리크와의 내통을 눈치 챈 스틸리코의 지시도 있었을 것이다. 루피누스의 뒤를 이어 에우트로피우스가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가이나스에게 많은 보상을 내렸다고 하니, 여러 상황이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어쨌든 알라리크는 가장 든든한 동업자를 잃었다. 이만한 후원자를 또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했다.
서고트족 땅을 얻어내려면 로마군과 싸워 이기고 황제와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서로마에는 스틸리코가, 동로마에는 가이나스가 버티고 있으니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훈 족을 격퇴한 티마시우스 장군도 로마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일단 여기서 겨울을 나자.”
겨울철에는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이 안전했다.
서고트족은 원래 숲에서 살던 부족이라 곡식이 부족한 것 말고는 그런대로 지금 숨어있는 산에 적응해서 살 수 있었다.
나무를 베어 오두막을 지었다. 부족한 식량은 근처 밭에서 약탈해왔다. 한참 곡식이 영글어가고 수확을 하기 전에 로마군이 철수해주었으니 다행이었다.
“어차피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야.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면 돼.”
알라리크는 집을 짓는 서고트족에게 돌아다니면서 격려했다. 그들은 협력해서 뚝딱 집을 지어냈다. 협소하지만 겨울이 오더라도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도끼로 통나무의 가지를 쳐내고 다듬는 그에게 아타울프가 반가운 사람을 데려왔다. 아말리 가문을 따르느라 그와 함께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이웃마을 부족장이었다.
“알라리크!”
그를 본 부족장은 기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낯선 땅을 얼마나 길을 잃고 헤매면서 그를 찾아다녔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알라리크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얼싸 안았다.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고생 많으셨죠?”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우리 부족도 함께 하려고요.”
그는 알라리크가 로마제국을 휩쓸고 다니며 성읍을 정복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서 백 여 명의 부족민들과 이끌고 왔다.
“로마군이 붙잡지 않던가요?”
“방비가 점점 허술해지고 있습니다. 국경이나 서고트족 거주지역에도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적은 숫자로 몰래 넘어오면 들키지 않습니다.”
서로마는 스틸리코가 국경을 지키고 있지만, 동로마는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황궁과 수도 경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움직여 볼 여지가 있을 듯 했다. 동로마 황제와 황궁은 야만족이 아무리 제국의 영토를 누비고 다녀도 자신들이 있는 수도만 안전하면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도 루피누스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누가 알라리크요? 우리는 알라리크를 만나러 왔소.”
다음날은 낯선 전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언어와 외모는 같지만 종교와 성향이 다른 동고트족 사람들이었다.
고트족 중에서 서고트족은 20년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에 로마의 허락을 받고 서고트족 거주지역에 살았지만, 동고트족은 여전히 로마 영내가 아닌 도나우강 건너편에서 야만족으로 살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닌 전통 게르만 신을 믿었고 로마화되지 않아서 법을 지켜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서고트족이 보기에는 동고트족은 자기들에 비하면 무질서한 야만족이었고, 동고트족이 보기에는 서고트족은 도시화된 로마인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알라리크요.”
알라리크가 앞으로 나서자, 그들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을 따르러 왔소. 로마군을 물리치고 제국과 싸우는 알라리크와 함께 하겠소. 우리를 받아주시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마도 숲에서 겨울에 먹을 것이 떨어져서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 몇몇이 의기투합해서 약탈품과 전리품을 챙길 목적으로 왔을 것이다.
알라리크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목적은 서고트족을 위한 땅을 얻는 것인데 동고트족을 받아들여도 좋을까. 다른 족장들은 그것에 동의할까.
서고트족은 로마 영내에서 살며 법을 지키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알라리크가 주의를 주면 일일이 감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랐다. 하지만 동고트족은 로마 밖에서 살았고, 다른 야만족처럼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약속을 해놓고도 멋대로 행동했다.
눈에 보이는 서고트족의 물건을 슬쩍 해서 다툼을 일으킬 수도 있고, 들어가지 말라는 로마인의 교회에 들어가서 성화를 훼손해서 로마인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알라리크가 망설이자 동고트족 전사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저희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그러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몇 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지내려면 엄격하게 신경써서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약속을 잘 지킬지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동고트족은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어떤 규칙이든지 따르겠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저희를 채찍으로 때리고 내쫓으셔도 됩니다.”
“당신을 왕처럼 모시고 받들겠습니다. 제발 받아만 주십시오.”
그들이 서고트족의 규칙을 잘 따른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로마에게 위협이 되려면 병력의 규모를 늘려야 했다.
알라리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해도 좋습니다.”
동고트족은 기쁜 얼굴로 입을 모아 알라리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알라리크는 아타울프에게 그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규칙을 알려주고 돌봐줄 사람을 붙여주라고 지시했다.
겨울 내내 산으로 알라리크를 따르려는 자들이 꾸준히 몰려들었다. 동고트족 뿐 아니라 수에비족, 알레만니족에서도 모험을 찾는 젊은이들이 왔다.
“어떻게 나를 알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알라리크의 물음에 수에비족 청년이 말했다.
“알라리크가 로마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게르만족 사이에 자자합니다.”
“스틸리코를 물러가게 만든 사람은 지금까지 알라리크 뿐입니다.”
다키아, 트라키아, 모에시아, 마케도니아를 돌아다니며 로마군과 싸웠다는 전과에 과장이 덧붙여져서 전설처럼 다른 야만족들에게도 퍼졌다.
스틸리코에게 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를 물러가게 만들었다는 믿지 못할 성과로, 알라리크는 야만족에게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그들을 일일이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알라리크는 바빠진 몸이었다.
“우리는 로마와 싸울 것입니다. 약탈은 수단일 뿐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살 땅을 얻어내는 겁니다. 단순히 약탈을 위해서라면,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알라리크의 말에 수에비 족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우리도 로마와 싸울 거요. 로마와 싸운 이민족은 많지만, 로마제국을 공격해 들어가서 심장부를 약탈하고 그들과 대등하게 싸운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로마제국은 수백 년 간 우리를 착취했소. 이젠 우리도 뭔가 보여줘야 할 차례요.”
알라리크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7천명으로 줄었던 병력이 불과 몇 달 만에 1만4천명으로 늘어났다. 처음 서고트족 거주지역을 떠날 때 병사가 1만 명이었으니, 스틸리코와의 전투에서 패했는데도 오히려 병력이 이전보다 더 늘어난 것이다.
“언제 로마로 쳐들어갑니까?”
모여든 야만족 족장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알라리크에게 물었다.
알라리크는 군데군데 눈이 녹기 시작하는 땅을 가리켰다.
“날이 풀리는 대로 갈 겁니다.”
동로마가 루피누스에서 에우트로피우스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내부의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에, 알라리크는 충분히 세력을 되찾고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가이나스는 훈족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티마시우스 장군과 황궁의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와는 프리기두스 전투에 함께 참전해서 잘 알고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선황제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집정관도 지낸 명성이 높은 노장이었다.
“루피누스를 죽였다지?”
티마시우스의 질문에 가이나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 했다. 공식적으로는 스틸리코나 가이나스의 명령이 아닌 병사들의 우발적인 폭동으로 처리되었다. 티마시우스는 그의 얼굴을 보며 충고했다.
“황제의 명령 없이 자의적으로 군대를 사용해서는 안 돼.”
칭찬을 기대했는데 잔소리가 나오자 가이나스는 뿌루퉁하니 입을 내밀었다.
“다들 바라던 바 아닙니까? 루피누스는 반역자입니다. 그가 죽어서 기뻐하는 사람은 많아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아무도 실행할 용기를 못 냈을 뿐입니다.”
“자네가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게 아니야. 선을 지키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거야.”
티마시우스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로마에는 법과 절차라는 게 있어. 야만족처럼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들어서는 안 돼.”
내가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가이나스는 입을 비죽거렸지만, 한참 선배인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끝이 좋지 않아.”
“집정관까지 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티마시우스는 그의 모순을 지적하는 가이나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집정관을 맡은 건 실수였어. 그 이후로는 정치에 손 뗐어. 군인이 집정관을 하는 건 정적들에게 나를 찔러달라고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는 미친 짓이야. 군단과 정치, 둘 중에 하나만 가지려 해야지 둘 다 손에 넣으려는 순간 둘 다 잃어버리게 돼.”
가이나스는 그의 말을 반은 새겨들었지만, 반쯤은 의심했다. 권력다툼에서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에우트로피우스를 가까이 하지 마.”
티마시우스의 말에 가이나스는 분명히 말했다.
“저는 황제께 충성합니다. 에우트로피우스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티마시우스는 그의 어깨를 치고 사라졌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에우트로피우스는 점점 거만해졌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권력을 잡자 그동안의 한을 풀려는 듯이 루피누스 못지않게 악랄하게 굴기 시작했다.
동로마 주민들은 압제자가 루피누스에서 에우트로피우스로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동로마 곳곳에 자신이 황제나 신이라도 된 듯이 동상을 세웠다. 황후의 지지를 업고 원로원 최고 의원인 집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루피누스보다 한 술 더 떠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루피누스가 하던 것 이상으로 죄 없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재산을 갈취했다.
로마의 행정구역마다 값을 매겨서 건물과 보석와 땅을 받고 임명해주었다. 은밀히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속주 총독 얼마, 장관 얼마, 행정관 얼마 하고 가격을 표시한 게시판을 집무실에 내걸고 매관매직을 했다. 그런데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순서로 그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티마시우스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티마시우스의 주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은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탈탈 털어 조사를 해도 비리가 나오지 않았다. 막대한 돈을 준다고 해도 아무도 거짓 증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는 티마시우스의 군대에 소시지를 납품하는 상인 바르구스가 경범죄로 콘스탄티노플에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거다.’
그는 눈빛을 번득이며 주먹을 쥐었다.
바르구스를 불러서 과거 사실을 들춰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콘스탄티노플에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더군. 그런데도 여기서 장사를 하는 건 불법이지.”
바르구스는 벌벌 떨며 잘못을 빌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장사를 못하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얼마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거나 갚을 길 없는 막대한 벌금을 때릴 수 있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줄 알아.”
“뭘 하라는 말씀입니까?”
“티마시우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증언해.”
바르구스는 너무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라는 말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는 그 분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소시지나 납품하는 제가 그렇게 높은 분을 만났겠습니까.”
“아니면 너를 사형에 처할 수 밖에 없지.”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지시했다.
“감옥에 있으면서 잘 생각해 봐. 언제 그를 만났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바르구스는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끌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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