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
군사기지가 있는 파비아는 가톨릭 교구의 힘이 강한 밀라노와 가까워서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단인 아리우스파 서고트족과 협력하려는 스틸리코에게 반발했다.
올림피우스는 그 곳을 거사의 장소로 골랐다. 사루스를 통해서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매수해서 가담시켰다.
그리고 파비아 군단에 시찰을 하러 가도록 황제의 일정을 잡았다. 스틸리코를 지지하는 총독, 장관, 법률가, 재무관 등 관료들을 수행원에 포함시켜서 함께 가도록 했다.
“파비아에 뭐하러 가라는 거야? 이 사람들은 왜 데려가라는 거야?”
황제는 영문도 모르고 올림피우스가 시키는 대로 했다.
“파비아의 병사들은 야만족 이단과 손잡으려는 스틸리코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스틸리코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가서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겁니다.”
“그게 가능할까?”
황제는 겁이 나서 머뭇거렸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곳에는 스틸리코가 아닌 황제폐하께 충성하는 군인들이 많습니다. 다녀오시면 모든 일이 잘 되어있을 겁니다.”
올림피우스는 스틸리코의 부하와 지인들을 가능하면 많이 수행원에 집어넣었다.
“황제께서 파비아로 군대시찰을 가시는데 동행해서 장병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파비아로 출장을 준비했다.
스틸리코의 지인인 법률가 유스티니아누스도 파비아에 가는 수행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늦은 시간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보고 의아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눈에 띄지 않게 두건을 쓰고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 변호해주며 인연을 맺었던 파비아의 병사였다.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이번에 황제폐하를 수행하고 파비아에 가십니까?”
“그런데요. 왜요?”
“가지 마십시오.”
“아니, 어째서요? 폐하께서 명령하신 건데 어떻게 안 갑니까?”
“이유는 묻지 마시고 아뭏든 가지 마십시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빠르게 사라졌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촉이 좋았기 때문에 파비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갑작스런 병을 핑계로 파비아에 가지 못하겠다고 황궁에 통보하고 스틸리코를 찾아갔다.
“황제께서 파비아에 가시는 거 말이야.”
스틸리코도 황제의 일정을 보고받았다. 황제가 군부를 시찰하러 다니는 것은 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스틸리코는 그의 불안한 표정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 자네도 가지 않나?”
“아니, 나는 몸이 안 좋아서 못가네.”
“그렇군. 무슨 문제가 있나?”
“예감이 좋지 않아. 요즘같이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황제께서 파비아에 가시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스틸리코도 파비아의 열렬한 가톨릭 신자들이 이단 야만족에게 돈까지 주며 갈리아에 들여놓는 다고 분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맞아. 요즘 파비아 분위기가 별로 좋지는 않아. 그래서 황제폐하께서 친히 그들을 달래러 가시겠다는군.”
“괜찮을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파비아의 장군들은 폐하께 충성심이 깊으니 괜찮아.”
파비아의 주민과 병사들은 주교의 선동에 휩쓸렸지만, 파비아의 장군들은 스틸리코가 어째서 서고트족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지 이해했다. 반 스틸리코파 장군들도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정책에 불만이 있는 것이지 황제에게 불충한 것은 아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도 파비아 군부의 상황은 자세히 모르니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자네는 안 가지?”
“나는 볼로냐 호위대에서 폭동이 있어서 그걸 수습해야 해.”
파비아에는 정규군이 있었지만, 볼로냐는 군대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야만족과 노예병으로 구성된 군단이 있어서 사소한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스틸리코는 그들을 엄정하게 다스리면서도 불공평한 일이 없도록 군법에 따라 처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스틸리코가 파비아에 가지 않는다고 하니 파비아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영향 받지는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도 요즘 자네한테 불만이 있으시다는데 괜찮나?”
스틸리코가 느끼기에도 호노리우스 황제와 그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황제가 대놓고 그에게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자신에 대해서 가진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업무로 바빠서 가끔씩 황제를 만나는 그가 매일같이 황제의 옆에서 그에 대한 험담을 하고 멸시와 조롱을 퍼붓는 환관들을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폐하께서 파비아에 가는 길에 볼로냐에 들르실 거야. 그때 만나서 말씀을 드리려고.”
그는 나름대로 황제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황제는 파비아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볼로냐 군사기지에 들러서 스틸리코를 만났다.
“호위대에서 폭동이 있었다면서?”
스틸리코는 황제에게 폭동의 처리결과를 보고했다.
“주동자를 잡아서 십분형을 선고했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군단에 제비뽑기를 해서 열 명에 한 명을 죽이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형벌을 시행하기 전에 황제께 용서를 빌라고 할 테니, 그들이 빌면 사면해주십시오.”
스틸리코는 병사들을 황제 앞에 끌어내도록 했다. 사형을 언도받은 병사들이 묶인 채 줄줄이 꿇어앉혀졌다. 동료 병사들이 그들을 때려죽이기 위해서 몽둥이를 들고 옆에 섰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황제폐하께 자비를 구할 기회를 주겠다.”
자신은 엄하게 벌을 내리고, 병사들에게는 빌라고 하고, 황제에게는 용서해주라 하고, 미리 상황을 맞춰놓은 것이었다. 어찌 보면 짜고 하는 연극이었지만, 그는 군기를 세우고, 병사들에게는 황제의 힘과 너그러움을 느끼게 하고, 황제는 병사들과 가까워지도록 하려는 그의 의도였다.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죽을 위기에 처한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다. 형을 집행할 병사들도 자신들을 대표해 죽게 된 동료를 살려달라고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엎드려 호소했다.
황제는 병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용서해주어라.”
황제의 명령에 스틸리코는 마지못한 듯이 그들을 사면해주며 황제의 덕으로 돌렸다.
“너희들은 군기를 어지럽히는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죽어 마땅하지만, 인자하신 황제폐하께서 너희를 용서하셨으니 평생 충성하며 은혜를 갚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황제폐하 만세!”
“호노리우스 황제 만세!”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은 황제를 칭송하며 물러갔다. 이제 저들을 죽을 때까지 호노리우스 황제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의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이 딴 데 가있는 듯 했다.
스틸리코는 황제가 파비아로 직접 위문하러 가는 것에 감사 인사를 했다. 라벤나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황제가 멀리까지 가서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제께서 친히 파비아의 장병들을 위로하러 가시니 다들 감격할 겁니다.”
그는 황제가 그를 위해 나서서 가톨릭 교도의 분노를 가라앉히러 가는 거라고 여겼다. 성인이 된 황제가 국론을 통일하고 로마를 위해 제 역할을 해준다면 그도 한결 짐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감사인사에 황제는 땀을 흘리며 헛기침을 했다.
“황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스틸리코는 최근 자신에게 날카롭게 굴던 황제가 오늘따라 부드럽게 말을 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의 기분 말고도 그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황제의 수행원들 가운데는 기병대장, 보병대장, 근위대 뿐 아니라, 총독, 장관, 재무관 등 스틸리코를 따르는 인사들이 다수 섞여있었다.
“파비아에 많은 사람들을 데려가시는군요.”
황제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 음, 저들이 파비아 병사들을 설득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스틸리코는 그들이 자기 대신 황제를 잘 보필하고 파비아의 민심을 달래줄 거라 믿었다.
“그럼 다녀오겠네.”
“잘 다녀오십시오.”
스틸리코는 파비아로 떠나는 황제를 배웅했다.
파비아에 도착한 황제는 그 곳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장군과 병사들을 사열했다. 올림피우스는 사루스를 통해서 포섭한 병사들을 소개받고 돈과 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곳에 데려온 스틸리코의 추종자들을 제거해주십시오.”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큰돈에 눈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야만족과 손잡으려는 반역자를 처단하고 공을 세운 자들은 황제께서 이보다 더 큰 포상을 내리실 겁니다.”
그들은 번쩍이는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넷째날, 황제는 병사들의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를 수행하는 관료들도 함께 자리에 있었다. 황제와 함께 할 때는 장군들이라고 해도 무기를 지녀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무방비상태였다.
갑자기 몇몇 병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그들에게 달려왔다.
“배신자를 죽여라!”
“야만족과 이단에게 로마를 팔아넘기는 자들을 죽여라!”
병사들은 스틸리코 파의 장군들과 관료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아무런 무기나 방패나 갑옷도 없던 법률가, 재무관, 총독, 장관들은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갑옷을 입고 있던 장군들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몇몇 장교들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탈출에 성공했다.
황제는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살육에 놀라서 공황 상태로 덜덜 떨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스틸리코의 추종자들을 죽일 거라는 건 알았지만, 몰래 죽일 줄 알았지 설마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끔찍한 학살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 살려줘.”
황제는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신음소리에 귀를 막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아무도 황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인자를 피해서 도망치고, 살해범들은 도망친 자를 추격하느라 사라졌다. 시체가 널려져있는 벌판에는 황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눈이 뒤집혀서 입에 침을 흘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파비아에서 도망쳐나온 장교는 볼로냐에 있는 스틸리코에게 달려갔다.
“큰일났습니다. 파비아에서 병사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스틸리코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황제폐하께서는 무사하신가?”
“모르겠습니다. 어디 계신지 아직 파악이 안 됩니다.”
스틸리코는 파비아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히 황제의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전군을 소집해.”
그는 자신의 휘하의 로마군은 물론 야만족 부대까지도 소집했다. 스틸리코를 따르는 군단의 장교들이 소집령에 응해서 그를 찾아왔다.
스틸리코는 그들 앞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파비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반란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만약 적들이 황제폐하를 시해했거나 포로로 잡고 있다면 즉시 출정한다.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울 것이다. 절대로 물러서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다. 알겠나?”
불리하다고 해서 퇴각하나 항복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안위가 걸렸으니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다.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이었다.
파비아에 주둔한 로마군은 로마군 중에서도 최정예군이었다. 내전을 치러야 하는 장군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스틸리코는 파비아에 전령을 보내서 사태를 파악하고 오도록 했다. 전령은 밝혀진 사망자 명단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틸리코의 오랜 친구이거나 열렬한 지지자거나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머지는 별 탈 없이 로마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도 무사히 라벤나로 돌아가셨습니다.”
반란이라면 가장 먼저 황제를 죽이거나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와 호위대는 다친 사람도 없이 멀쩡했다. 사로잡히거나 억류된 사람도 없었다.
“반란은 아닌 모양인데?”
스틸리코는 라벤나 황궁에 다시 사람을 보내서 사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군단과 장교들은 밤새 대기하며 새로운 소식을 기다렸다.
라벤나에 다녀온 전령이 알려왔다.
“황제께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들의 행동은 로마를 걱정하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라며 그들을 모두 사면해주었습니다. 파비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무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장군들과 사회의 지도층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수사도 하지 않고 죄를 묻지 않고 덮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학살은 황제가 의도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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