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보낸 협상단을 맞았다.
원로원 의원인 바실리우스는 처음부터 그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 그리스어로 자신의 학식을 자랑했다.
“호메로스가 이런 말을 했소. ‘니키 데 파미베타이 안드라스.’ 무슨 말인지 아시오? 라틴어로 번역하면 ‘승리는 여러 사람에게 돌아다닌다.’는 뜻이오. 즉 승리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격언이오. 지금까지의 승리에 기고만장해있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요. 로마는 외적의 침입을 천 년간 물리치고 이겨냈소. 우리가 방심한 틈에 여기까지 살아서 온 것만 해도 천만다행인 줄 알고 썩 물러가시오.”
알라리크는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 말은 로마에 돌려주겠소. 승리가 영원히 로마에 머물지 않소. 지금까지 로마가 상대를 이겨왔다고 앞으로도 이길 거라고 생각하오?”
바실리우스는 자신이 한 말의 역설에 빠져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알라리크 역시 호메로스의 명언을 인용했다.
“호메로스가 이런 말도 했소. ‘힘든 경험을 해본 사람은 고통도 즐길 수 있다.’ 로마시민들이 고통을 즐기는 수준이 되려면 힘든 경험을 더 해봐야 하겠소.”
바실리우스는 무식할 거라고 여겼던 알라리크가 그리스 어로 말하자, 헛기침을 하며 협박했다.
“좋게 말할 때 물러가시오. 그렇게 지고도 로마군의 무서움을 모른단 말이오? 야만족 따위는 막강한 로마군에게 상대가 안 되오. 로마가 얼마나 넓은지 봤을 거요. 성 안에 몇 개 군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군대가 있소. 그들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싸운다면 당신들은 다 죽은 목숨이오.”
알라리크는 로마의 성벽 안에 엄청난 대군이 있다는 말에 비웃는 미소를 지었다.
“성 안에 병력이 아주 많다고? 그거 잘 됐군.”
바실리우스는 병사가 많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알라리크의 말에 무슨 뜻인지 몰라 눈썹을 찡그렸다.
“풀은 무성할수록 더 베기가 좋지.”
“그게 무슨 말이오?”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식량도 빨리 떨어지겠지. 안 그렇소?”
그제야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논리의 구멍을 지적하는 알라리크의 말을 알아듣고 당황해서 썩은 표정이 되었다. 굶어죽고 있는데 병사가 많다고 자랑하다니, 앞뒤가 안 맞았다.
“병사들끼리 굶주림에 서로 잡아먹고 마지막 병사가 남으면 그자하고만 싸우면 되겠군.”
알라리크는 그들의 협상전략을 다 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바실리우스를 약 올렸다.
바실리우스는 알라리크를 말로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바실리우스의 강경책이 알라리크에게 박살나며 깨지자, 요하네스가 나서서 달랬다.
“그래서 이렇게 대화를 하러 왔지 않습니까. 서고트족은 몇 년간 로마의 아미쿠스로 서로 잘 지냈습니다.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알라리크가 거절할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했던 두 번째 제안을 꺼냈다.
“지급하기로 했던 금 4천리브라를 제공해서 약속을 이행하겠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도 약속대로 로마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십시오.”
알라리크는 전혀 급할 게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건 처음부터 약속을 지켰을 경우의 이야기지. 로마가 약속을 어겨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위약금을 받아야겠소.”
알라리크는 문제를 회피하며 확대시킨 그들의 무능과 잘못을 조목조목 짚었다.
“나는 에모나에서 그대들이 제안을 통과시키기를 몇 달을 기다렸소. 통과시키고 나서 약속대로 보상을 지급하기를 다시 몇 달을 기다렸소. 로마에 와서도 공격을 하지 않고 포위만 하고 약속만 지키면 물러가겠다고 하고 있는데, 여전히 그대들은 시간만 끌며 답변을 하지 않고 있소. 그러니 이게 누구의 탓이란 말이오?”
위약금이라니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었다. 바실리우스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외면했고, 요하네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약금이라 하면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알라리크는 턱을 들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도시 안의 모든 금과 은, 가치가 있는 물건 전부, 야만족 노예들 전부를 내주면 물러가지.”
터무니없는 요구에 바실리우스와 요하네스는 입을 벌리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요하네스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가치가 있는 물건 전부와 노예까지 달라면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말씀이신데,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뭡니까?”
바실리우스도 얼굴이 뻘개져서 삿대질을 했다.
“아니, 요구를 해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 하잖소. 우리한테도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협상을 할 게 아니오.”
알라리크는 그들의 사정을 봐 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냉혹한 눈빛으로 말했다.
“목숨은 남아 있잖소.”
알라리크의 눈빛에 질린 바실리우스는 소리치다말고 입을 다물고 쭈그러들었다.
알라리크는 냉랭하게 그들을 조롱했다.
“굴욕적으로 살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게 로마인들이 늘 하는 말이지. 그러니 굴욕적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면 충분히 많은 걸 가진 게 아니오?”
바실리우스와 요하네스는 소득이 없이 오히려 더 늘어난 요구사항을 들고 돌아왔다. 원로원은 이런저런 핑게를 궁리해서 협상액을 최대한 깎아보려고 머리를 짜냈다. 하지만, 협상이라는 것은 이쪽도 상대방을 위협할 수단이 있어야 성립했다.
알라리크를 다시 찾아간 요하네스는 그에게 사정했다.
“현실적으로 전 재산에 해당하는 양을 로마 밖으로 실어 나르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그냥 값나가는 물건으로 양을 정해서 합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알라리크도 조각상이나 가구와 같이 부피 큰 물건은 받아봐야 들고 다닐 수도 없고 짐만 되니 금은으로 받는 것이 편했다.
“야만족 노예를 달라고 하셨는데 야만족 노예가 많지도 않거니와 야만족인지 아닌지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외모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기준이 어중간합니다.”
알라리크도 로마 시내에 얼마나 많은 야만족 노예가 있는지 몰랐고, 그들이 모두 자신을 따라가기를 바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굳이 협상조건에 넣지 않아도 그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성문이 열리면 도망쳐나와서 합류할 것이다.
협상의 주도권을 쥔 그는 철수 조건을 낮춰주고 생색을 냈다.
“그럼 그 조건은 빼고 금 5천리브라, 은 3만리브라, 비단옷 4천벌, 가장 비싼 염료인 주홍색으로 물들인 천 3천필, 향신료 3천리브라를 주면 로마에서 포위망을 풀고 물러가겠소.”
원로원은 금 4천 리브라에서 훨씬 인상된 요구인데도 불구하고 알라리크가 제시한 협상조건을 통과시켰다. 협상이 굴욕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협상을 더 해서 액수를 낮춰보자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협상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그들의 노예들이 굶주려 죽어가며 그들의 재산피해액은 막대해지고 자신도 전염병으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군말 없이 동상에 칠한 금까지 벗겨내서 재빨리 금과 은, 그 외 공물을 모아서 내놓았다.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공포 속에서 벗어나고 포로나 다름없는 감금 생활을 마치고 싶었다. 궁핍하고 답답하고 굶주리고 질병의 두려움을 느끼고, 그들의 인생에서 이런 최악의 시기를 겪은 적은 없었다.
알라리크는 배상금 지급이 완료되자, 성문 앞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멀찍이 물러난 알라리크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로마인에게 해를 가하거나 모욕하면 군법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로마시민에게 피해를 주면 로마인들이 결사항전을 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작은 피해라고 해도 원로원이 그것을 트집 잡고 물고 늘어져서 비방하고 로마시민의 군중심리를 자극할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심리전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로마시민을 조롱한 몇몇 병사를 본보기로 채찍으로 때리는 벌을 주었다. 로마인에게 말만 잘못해도 모욕죄로 처벌을 받는데, 폭력을 사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밀을 실은 배가 테레베강을 통해서 로마로 들어가자, 부두에서 기다리던 일꾼들이 포대를 받아서 짊어지고 갔다. 피골이 상접해서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들 수만 명이 부두에 모여들었다. 밀가루 포대가 땅에 놓이자마자 풀어헤치고 생 밀가루를 손으로 집어 입에 쑤셔 넣고 목이 막혀 컥컥거리며 기침을 했다. 제빵소의 굴뚝에 연기가 나고 오랜만에 오븐에서 빵 굽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성문이 열리고 시민들이 서로 밀치며 쏟아져 나왔다. 성 밖에는 이미 음식을 팔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몫 잡아보려고 멀리서 온갖 식량을 싣고 온 상인들까지 북적거렸다. 시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식량을 사들여 싹싹 긁어갔다.
로데리크는 비터리크가 말한 살라리아 가도와 연결된 성문 앞에서 기다렸다. 성문마다 수만 명이 일시에 몰려나와서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목을 빼고 동생을 찾았다. 혹시 너무 늦어서 굶어죽은 건 아닐까.
“비터리크! 비터리크!”
로데리크는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찾았다.
“형!”
자신을 부르며 나타난 동생의 모습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었다. 서고트족 거주지역에서 굶주릴 때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비터리크는 로데리크가 들고 있는 빵과 죽을 말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살아있었구나.”
그는 동생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내가 로마에 온 줄 어떻게 알았어?”
“야만족 부대가 탈주해서 알라리크에게 갔다는 소문을 들었어. 형도 당연히 알라리크에게 갔다가 그를 따라서 이리로 왔을 거라고 생각했지.”
비터리크는 노예임을 나타내는 팔찌를 차고 있었다. 로데리크는 그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주인한테 돌아갈 필요 없잖아?”
알라리크가 야만족 노예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 조건을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이 마음대로 탈주해서 알라리크에게 가세했다. 열린 성문으로 노예들이 줄줄이 빠져나와서 서고트족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처참한 기아를 겪으며 주인이 그들의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젊은 노예들은 안전한 생활을 버리고 모험과 자유를 찾아 나섰다. 그 숫자는 점점 늘어서 4만명에 이르렀다.
로데리크의 바램과 달리 비터리크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갈 수 없어. 지금은.”
“왜?”
“나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어.”
노예도 주인의 허락을 받으면 결혼할 수 있었다.
“아내도 같이 간다고 해야 갈 거야.”
로데리크는 뜻밖의 말에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동생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다니 축하할 일이었다.
“가만, 그럼 나한테 조카가 생긴 거야?”
로데리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어떻게 생겼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도 혼자였던 그에게 갑자기 제수와 조카까지 3명의 가족이 생긴 것이다. 당장이라도 성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
“제수씨랑 이야기해보고 언제든지 와. 난 계속 알라리크를 따라다닐 거니까.”
로데리크는 약탈해서 모은 금화와 소시지를 동생에게 건네주었다. 아내와 아이에게 음식을 양보하다보니 더 굶주렸을 것이다.
“조카한테 맛있는 거 사줘. 보고 싶네.”
“고마워, 형.”
노예라 해도 음식을 주는 주인과 안락한 도시생활을 버리고 군대를 따라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더욱이 어린 아이와 여인에게는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로데리크는 아쉬운 마음으로 성으로 돌아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도 서른이 훌쩍 넘었다. 병사들이 보통 마흔살이면 은퇴하니 이젠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었다. 지금 생활에 특별히 불만은 없었지만 허전하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상황에서는 결혼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물러나서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토스카나로 가서 겨울을 났다. 산맥으로 둘러싸여서 방어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일리리쿰에 남아있던 서고트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올림피우스의 야만족 박해가 심해져서 알라리크를 따라서 이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탈리아로 진군할 때는 상황이 어찌 될지 몰랐기 때문에 병사들만 데리고 왔지만, 이제는 주민들을 데려와도 좋을 듯 했다.
아타울프에게 가서 그들을 이탈리아로 데려오도록 했다. 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서고트족과 야만족 집단 10만명을 토스카나로 인도해왔다.
올림피우스는 총사령관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에 대한 불만의 여론이 끓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훈족 용병부대 300명에게 아타울프가 토스카나로 데려가는 10만명의 야만족 무리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들은 저항할 힘이 없는 아녀자들을 공격해서 천 명을 죽였다. 올림피우스는 겨우 300명으로 적을 천 명이나 죽이고 아군의 피해는 17명뿐이라며 자신의 전과를 부풀려서 선전했다.
피해를 입었지만, 아타울프는 토스카나에 도착했다.
이제 알라리크를 따르는 무리는 군대만이 아니었다. 서고트족 병사 3만명에 스틸리코의 병사 3만명, 로마에서 탈출한 노예 4만명에 새로 합류한 서고트족과 야만족 10만명까지 해서 20만명에 육박했다. 그 중 싸울 수 있는 병사들만 해도 10만 명의 대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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