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만니족
마지막 강은 아두아강이었다. 폭이 제법 넓었다. 날씨는 낮에는 많이 풀려서 봄이 가까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흘러내려서 강물이 꽤 불어나 있었다. 깊이도 상당히 깊어서 배를 타거나 다리 위로 건너야 했다.
정찰을 갔던 아타울프가 긴장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강 건너에 로마군이 있습니다.”
하루 이틀만 가면 밀라노에 도착했다. 밀라노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강 건너편에서 그들을 막으려는 모양이었다. 이 다리가 밀라노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다.
“규모는?”
“2천 명쯤 되어 보입니다.”
“강을 건너는 다른 다리는 없나?”
“근처에 다른 다리는 로마군이 다 끊어놓았고, 이 다리뿐입니다.”
아타울프는 더 가까이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의 지휘관이 사루스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상대가 사루스라는 말에 알라리크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는 편법과 잔머리를 잘 쓰는 편이지만, 그것을 순발력있게 막아내고 역으로 허점을 공격하면 쉽게 무너졌다. 좁은 길목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숫자는 서고트족이 많으니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알라리크는 동이 트기 전 새벽부터 서고트족을 다리 앞에 도열시켰다. 오늘 하루에 끝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로마군도 이에 맞서 전열을 갖췄다.
서고트족 병사들이 다리를 향해 다가가자, 건너편을 포위한 로마군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그들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사루스였다.
“알라리크! 숨지 말고 이리 나와라!”
사루스는 칼을 흔들며 도발했다. 알라리크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가 이탈리아를 점령하면 너에게 다시 한 번 추방령을 내릴 테니, 갈 곳이나 알아봐라.”
사루스는 치욕스러운 기억에 얼굴이 뻘개져서 아무 말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알라리크의 전진 명령에 서고트족은 방패를 들고 다리를 건너갔다.
로마군의 투석기에서 커다란 돌이 날아와서 건너편 땅에 박혔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육중한 타격에 서고트족은 멈칫하며 자리에 섰다.
“발사!”
화살이 날아왔다. 서고트족은 방패를 들어 막았다. 일리리쿰에서 자신의 몸에 맞는 로마의 갑옷, 투구, 군화까지 갖춰 입고 와서 별 피해가 없었다.
알라리크는 장교들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반시간 안에 끝장낸다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 해 싸워. 지치면 바로 교체해줄 테니까 힘을 아끼지 마. 적을 찌를 생각보다는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가서 자리를 확보해. 저들이 유리한거라곤 위치뿐이니까 그걸 무너뜨려야 해.”
장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격!”
서고트족이 다리를 건너가자, 다리 앞에서 로마군 보병들이 방패로 둥글게 둘러싸고 긴 창으로 그들을 도로 몰아냈다. 서고트족도 똑같이 방패로 자신의 앞을 막으며 창으로 상대방을 밀쳤다. 서고트족도 체계적인 훈련 덕에 로마군과 대등하게 싸웠다.
“돌파해!”
알라리크의 명령에 서고트족은 처음부터 있는 힘껏 거칠게 밀어붙였다.
서고트족의 화살이 건너편으로 날아갔다. 로마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서고트족은 재빨리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전진했다. 그렇게 조금씩 다리를 건너갔다.
양쪽 다 전력을 다해 싸웠기에 반시간도 안 되어서 지쳤나갔다. 알라리크는 손짓으로 빠르게 부대 교체를 명령했다. 어차피 수적으로 우세하니 체력소모전을 하려는 것이었다.
사루스도 지친 병사들을 빼고 새로운 병사로 교체했다. 이번에도 양쪽 다 물러서지 않고 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선발로 나섰던 하스타티 부대가 차례로 지쳐 나가떨어졌다. 사루스는 잠시 쉬게 하며 교체했지만, 오후가 되자 모두 녹초가 되었다. 서고트족에는 아직까지 싸우지 않은 체력이 좋은 하스타티가 다리 뒤쪽에 줄지어 대기 중이었다.
“막아!”
사루스는 어쩔 수 없이 고참병인 트리아리를 투입했다. 그것은 다급함 때문에 나온 좋지 않은 수였다. 트리아리는 경험이 많았지만 하스타티에 비해 힘은 좋지 않았다. 서고트족 하스타티는 쉬다가 이제 막 투입된 혈기왕성한 젊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노련한 상대를 공격하기보다는 웅크리고 수비하며 반발씩 앞으로 내밀며 자리를 확보했다.
사루스는 지속적으로 부대를 바꿔가면서 출전시켰지만, 그때마다 알라리크는 체력적으로 우위인 새로운 부대를 투입했다. 사루스는 체력 싸움에서 번번이 밀렸다.
로마군이 지칠수록 다리 건너편에 발을 디딘 서고트족의 숫자가 빠르게 늘었다. 전선은 점점 옆으로 길어졌고 더 많은 로마군이 투입되어야 했다. 쉬지 못하고 싸우자 로마군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프린키페스!”
로마군이 하나 둘 쓰러지자 사루스는 하는 수 없이 최후까지 아껴놓았던 최정예병 프린키페스를 출전시켰다. 서고트족은 여전히 싸우기보다는 공간을 확보하며 더 많은 서고트족이 최전선에 설 수 있도록 다리 건너편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10명에서 50명으로, 다시 100명으로 점점 다리를 건너온 서고트족의 숫자가 늘어났다.
“전군 앞으로!”
초조해진 사루스는 결국 전군을 투입해서 총력전을 펼쳤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제 탈진해서 서있을 힘도 없었다.
“힘 내! 다 왔어!”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독려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적이 다음날 체력을 회복하기 전에 다리 건너편으로 밀고 나가서 전투를 끝내야 했다. 알라리크의 외침에 서고트족은 더욱 거세게 방패를 밀어댔다. 다리가 풀린 로마군은 쳐내면 맥없이 뒤로 서너 걸음 씩 밀려났다. 포위한 원이 넓어지면서 로마군의 간격이 듬성듬성해졌다.
“안되겠습니다. 무너집니다. 이러다 포위되겠습니다.”
부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루스에게 말했다.
“빌어먹을!”
사루스는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물고 알라리크를 노려보았다.
“후퇴해!”
밀라노를 수비하려면 남은 병사라도 보존해서 돌아가야 했다. 사루스는 다리의 수비를 포기하고 밀라노 성 안으로 퇴각했다.
“이겼다!”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그것도 불리한 위치에서 승리를 하자, 서고트족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그들은 알라리크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로마제국이 자신들의 손 안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틸리코는 라에티아에서 수에비족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수에비족은 강을 건너서 이곳저곳 찔러보며 공격해왔다. 로마군이 지치도록 만들려는 모양이었지만, 스틸리코는 그들의 움직임을 자주 지속적으로 정찰하며 대비했기에 별 성과는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서고트족이 베로나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밀라노, 즉 황제였다. 속도를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알레만니족 마을은 복구되었나?”
“예. 대충 정리된 모양입니다.”
“다시 회담을 잡아.”
알레만니족은 지난번 습격으로 말들이 도망치고 식량이 불타버려서 곤경에 처해있는 모양이었다. 젊은 족장은 약이 올라서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보자고 한 거요?”
“수에비족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알레만니족은 왜 안 싸우는 거요?”
스틸리코의 빈정거림에 족장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비겁하게 회담이 끝나자마자 공격하다니.”
“그럼 공평하게 오늘 회담이 끝나면 알레만니족이 우리를 공격해오면 되겠군. 기다리고 있겠소.”
족장은 대답이 없었다. 처음부터 결전을 치를 각오로 싸운게 아니었다. 로마군을 툭툭 건드려보았는데, 오히려 불시에 선제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었다. 수에비족의 전투결과를 보면 로마군을 공격해봐야 피해만 보고 후퇴하게 될 것이 뻔했다. 싸움을 걸어서 한 대 얻어맞아 코피가 터진 상황인데 싸움을 더 크게 벌릴 수는 없고, 어떻게 체면구기지 않고 수습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팔짱을 낀 스틸리코는 풀이 죽은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다면, 반대로 우리가 일거리를 줄 수도 있소.”
그 말에 알레만니족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서 그를 쳐다보았다. 던진 말에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니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확실해졌다.
“로마군의 보조군 기병으로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에 있는 서고트족을 무찌르러 가는 것이오.”
스틸리코의 말에 알레만니족의 미간의 주름살이 확 펴졌다. 그들이 일년 내내 농사지어서 벌 돈을 일시에 손에 쥘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로마 영내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들은 알라리크와 협력하기로 했던 것도, 로마군과 싸웠던 것도, 로마에 요구하려던 사항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일하게 됩니까?”
“얼마나 오래 복무합니까?”
“어떻게 선발합니까? 조건이 있습니까?”
알레만니족과의 휴전 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 데려갈 기병대를 뽑았다.
알레만니족은 언제 알라리크와 협력해서 로마와 싸웠느냐는 듯이 스틸리코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수에비족만 진압하면 서고트족이 밀라노에 당도할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서고트족은 여러 개의 강을 건너야 하니 밀라노로 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열흘 안에 수에비족과 협상을 마무리하고 알프스를 넘으면 시간이 얼추 맞을 거라고 계산했다.
그런데 서고트족이 파죽지세로 밀라노에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벌써? 강에서 시간이 지체될 줄 알았는데?”
스틸리코는 아녀자가 딸린 부대가 4개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강이 얼은 곳도 있고 강물이 말라붙어서 건너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았나 봅니다.”
얼음과 눈이 녹아내리기 전에 서둘러 이동을 해서 강을 수월하게 건넌 것이다. 그것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아두아강은 쉽게 건널 수 없었을 텐데?”
출발하기 전에 사루스에게 이탈리아 수비군단을 주고 아두아 강의 다리를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끊고 건너오지 못하게 다리 앞에서 막으라고 이야기해놓았다.
“서고트족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사루스의 말로는 무기나 전술이나 로마군이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며칠은 버텨줬어야 했는데.”
로마군이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고도 하루를 못 버티고 후퇴했다니 실망이었다.
알라리크가 일리리쿰에서 4년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틸리코도 일리리쿰으로 시찰을 가서 훈련상태를 파악했을 때 서고트족 군대가 로마군과 같은 수준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병력의 숫자와 지휘관의 역량 차이였다.
병력은 서고트족이 훨씬 우세하니 언젠가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나 버티고 밀리느냐인데, 그것은 지휘관의 역량이 좌우했다.
적은 숫자로 좁은 다리에서 많은 적을 맞아 싸우려면 상황판단과 병사들을 그때그때 교체해서 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머리싸움에서 사루스가 알라리크에게 말려서 출전 부대의 순서가 꼬이면서 단번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고트족이 예상보다 빠르기 진격할 것도 예상해서 대비를 해 놓았다. 밀라노 성벽은 두텁고 병력과 식량도 충분했다. 석 달 이상 버틸 수 있었다.
수에비족을 공격해서 사나흘 안에 협정을 체결할 것이다. 기병만으로 라에티아를 출발해서 알프스를 넘어가는 데 겨울이라 쉬엄쉬엄 간다 해도 넉넉잡아 닷새면 주파할 수 있다. 아무리 알라리크라고 해도 튼튼한 밀라노 성을 열흘 만에 공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황제에게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 테니 밀라노를 사수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편지를 보냈다. 라에티아의 야만족을 진압이 거의 끝났으니 곧 돌아가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알라리크의 행동은 예측했지만, 호노리우스 황제의 행동은 예측하지 못했다.
서고트족이 밀라노를 포위하자, 호노리우스는 겁에 질려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성벽 밖에서 지평선까지 쫙 펼쳐져 있는 수만 명의 야만족을 보자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수 만 명이라고는 해도 병사는 2만 명도 안 되고, 나머지는 아녀자들이었지만, 황제의 눈에는 모두가 악령에 씌인 자들로 보였다. 지금껏 조용한 밀라노 황궁에서 로마의 원로원과의 교류도 없이 오로지 그의 비위를 맞추는 환관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내던 황제에게 몸집이 큰 야만족의 모습은 괴물처럼 흉악해보였고 공포 그 자체였다.
“도, 도망쳐야 해. 어서, 어서, 도망쳐.”
황제는 덜덜 떨며 식은 땀을 흘리고 자신의 방에서 물건을 챙기며 우왕좌왕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황제의 왕관이 든 상자가 굴러 떨어져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어, 어떡해. 친위대장은 뭘 하는 거야. 어서 나를 탈출시켜.”
친위대장은 황제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진정하십시오, 폐하. 저들은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저들은 사다리를 가졌잖아. 사다리를 타고 넘어올 거야.”
성 안으로 퇴각해서 수비군을 이끌고 있는 사루스가 말했다.
“성 위에서 공격하면 막아낼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수만 명이야.”
“막을 병력은 충분합니다. 안심하십시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고트족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황제는 놀라서 펄쩍 뛰며 눈을 희번덕거리고 자신의 몸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안, 안 돼. 살려줘.”
황제는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폐하를 모셔라.”
환관들이 손발이 차가와진 채 몸을 뒤틀며 벌벌 떠는 황제를 침대로 떠메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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