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
서고트족은 모에시아를 거쳐 트라키아 지방에 이르렀다. 도시와 농장을 약탈하여 식량을 조달하고 물건을 빼앗고, 인질과 노예를 끌고 갔다. 서고트족이 성벽을 넘어 도시를 함락했다는 소문이 퍼져서 저항도 극렬하지 않았다. 그들을 막을 자는 없었다.
서고트족의 거침없는 전진 소식에도 그들을 막기 위한 로마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군은 다 어디로 갔지?”
“우리가 무서워서 숨어버렸나봐.”
서고트족은 낄낄거리며 로마의 대로를 활보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하드리아노폴리스에 도착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는 이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동로마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서고트족이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왔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겁을 먹은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루피누스를 불러서 물었다. 루피누스는 서고트족을 두둔하며 황제를 안심시켰다.
“서고트족은 그저 배고픈 좀도둑 무리입니다. 빈 집을 돌아다니면서 배를 채울 뿐이지 반역을 일으키는 위험한 세력은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안전합니다.”
황제는 그의 말이 못미더운 듯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하지만 약탈도 많이 했고 한참 지났는데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잖소. 언제까지 내버려둬야 하오?”
황제의 말에 루피누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의 행태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루피누스는 진지한 어조로 엄숙하게 말했다.
“저들이 교회는 불태우지 않고 기독교도는 죽이지 않습니다. 그 소문이 나서 겁먹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그냥 놔두시지요.”
당시 로마황실의 국교는 기독교였지만, 로마인중에는 여전히 전통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루피누스는 황실이 권장하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장려하기 위해서 서고트족의 약탈을 내버려두자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어처구니없게도 황제도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루피누스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군. 서고트족이 기독교 전도를 위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도 있군.”
루피누스는 황제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았다.
“제가 알아서 큰 위험으로 번지지 않게 관리하겠습니다.”
“어떻게?”
그는 대단한 계획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각 속주 군대에게 서고트족과 불필요한 교전을 하지 말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또한 서고트족에게는 콘스탄티노플로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발적 충돌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동로마를 노략질하고 다니는 서고트족과 전투를 하지 말고 서로 피하자는 루피누스의 의견에 황제는 별 고민 없이 동의했다.
“그렇게 하시오.”
황제는 자신이 있는 콘스탄티노플만 안전하다면 백성들이 어떤 고초를 겪던지 관심이 없었다.
“저기를 봐. 저 곳이 하드리아노폴리스야.”
알라리크의 손끝이 가리킨 도시를 보면서 서고트족은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진짜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왔네.”
20년 전 그들의 부모세대가 프리티게른과 함께 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황제를 전사하게 만든 역사적 장소에 오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 가운데는 젊었을 적에 왔던 감회에 빠져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기쁨은 성벽 가까이로 가면서 차츰 잦아들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의 성벽은 지금까지 그들이 공략한 도시의 성벽과는 차원이 달랐다. 햇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은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몇 개는 이어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앞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다.
알라리크는 즉석에서 계획을 수정했다. 그는 족장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와 콘스탄티노플은 성벽이 높아서 공략하려면 희생이 클 겁니다. 그러느니 남쪽으로 가서 부유한 그리스 도시를 약탈합시다.”
출발할 때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에게 말했던 목표는 하드리아노폴리스를 통과해서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로마 황제에게 담판을 짓고 땅과 보조금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그 목표대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계획은 언제든 상황에 맞게 조정이 필요했다.
서고트족의 머릿속에도 이제는 초기의 목표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로마의 음식과 사치품과 부유함을 맛본 그들은 굳이 황제에게 쥐꼬리만한 보조금을 받고 농지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다.
애초에 알라리크는 루피누스를 위해서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황제를 내쫒으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에 가본 그는 서고트족이 그 곳을 함락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서고트족의 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로마의 소유가 아닌 서고트족이 소유하는 땅,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수확물을 모두 서고트족이 가질 수 있는 땅, 로마법이 아닌 서고트족의 법이 시행될 수 있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로마영내를 돌아다니며서 수비에 용이한 지역을 찾아서 점거하고 그 곳에 국가를 세우고 서고트족의 땅으로 인정해달라고 협상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니 굳이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어려운 성을 공략할 필요는 없었다. 쉽게 약탈할 수 있는 농장과 작은 도시에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고, 방어에 적절한 지역을 찾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루피누스도 더 이상은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어려운 싸움을 하며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알라리크에게 당면한 가장 큰 목표는 배를 타고 오는 스틸리코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그와 싸우려면 미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어야 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이 좋아하는 산악지역이 근처에 있는 테르모필라이에서 싸우고자 했다. 그러려면 서둘러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족장들은 이의없이 알라리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려운 성을 공략하느니, 쉽고 빼앗을 게 많은 도시를 공격하는 게 낫지.”
“맞아, 뭐하러 성벽을 몸으로 들이받으면서 싸워? 도시가 널리고 널렸는데.”
하드리아노폴리스를 지나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주변의 농장들은 깨끗이 털어서 식량을 비축했다. 막 봄이 시작되려는 때에 거주지를 떠나서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봄이 끝나갈 때 쯤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했다.
“서고트족이 그리스로 오고 있습니다. 출정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스 군사령관 게론티우스는 그리스 총독 안티오쿠스에게 보고했다.
그리스 총독 안티오쿠스는 당시 많은 동로마 관료들이 그렇듯이 루피누스에게 뇌물을 바치고 그 자리에 올랐다. 자신이 있는 곳까지 야만족이 몰려오지 않는다면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루피누스는 전 로마군에게 자리를 함부로 이동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수비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굳이 뭔가를 할 이유도 없었다.
“황제께서 병력손실을 막기 위해서 서고트족과 교전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네.”
안티오쿠스의 말에 게론티우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군단인데 병력을 잃으니 싸우지 말라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지시였다.
“그러면 다른 군단과 협공을 한다든지 다른 계획이나 지시사항이 있습니까?”
총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면 되네.”
게론티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물러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이라는데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어쨌든 방어에 유리한 테르모필라이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서고트족의 전진을 막아 볼 생각이었다. 로마군이 진을 치고 있으면 섣불리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며칠 후 그는 더욱 어이없는 상황을 겪었다.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뭐야?”
게론티우스는 벌떡 일어나서 서신을 읽어보았다.
[서고트족은 테르모필라이를 지나갈 겁니다.
불필요한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서 로마군단을 뒤로 물려줬으면 합니다.]
아예 정중하게 로마군에게 자신들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에게 지나갈 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서신을 보내는 정신 나간 짓을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게론티우스는 사태 파악이 안 되어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아니면 미친놈인가.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머리카락도 남지 않을 거라고 전해.”
그는 위협적으로 말하며 전령을 돌려보냈다. 서고트족이 다가오면 격퇴하기 위해서 병사들에게 전투준비를 지시했다. 병사들은 코앞에 있는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딛고 칼을 뽑아들고 대기했다.
돌아간 전령은 알라리크에게 게론티우스의 말을 전했다.
“로마군 장수가 하는 말이, 다가오면 가만 안두겠다는데요?”
“그래?”
알라리크는 다시 편지를 써서 전령에게 주었다.
“총독 관저로 가서 안티오쿠스 총독에게 전해.”
“알겠습니다.”
전령은 편지를 가지고 사라졌다.
게론티우스는 긴장을 하며 서고트족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그를 찾아 온 사람은 총독 안티오쿠스의 전령이었다. 그는 총독의 편지를 펼쳐서 읽었다.
[불필요한 교전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서고트족의 길을 막고 있는 거요?
어서 군사를 물리시오.]
“길을 내주라고?”
게론티우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차례 서신을 읽었다. 총독이 서고트족의 길을 막지 말고 비키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가 알라리크의 청을 거절하자마자 총독의 편지가 도착한 걸 보면, 분명히 알라리크가 총독에게 로마군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고 일러바쳤을 것이다.
게론티우스는 자신이 혼자 다른 나라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황제, 총독, 서고트족, 모두가 같은 편이고 혼자만 동떨어진 곳에서 온 이방인 같았다.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로마제국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만 모르는 일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 한통속이고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제야 그는 트라키아와 모에시아와 군사령관들이 어째서 서고트족과 싸우지 않고 내버려뒀는지 깨달았다. 모두가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편지를 구겼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부관이 다가와서 물었다.
“퇴각한다.”
“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투준비를 하라더니 적이 코앞에 있는데 싸우지도 않고 퇴각을 명령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부관이 머뭇거리자 게론티우스가 다시 말했다.
“못 들었나? 퇴각한다.”
서고트족이 트라키아와 모에시아에서 어떤 만행을 저지르면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길을 열어주면 서고트족은 그리스에서 똑같은 약탈을 자행하며 다닐 것이다. 병사들은 차마 그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병사들의 가족들의 안전도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싸우게 해주십시오.”
“여기서 막지 않으면 그리스가 전부 다 야만족에게 당합니다.”
병사들의 호소에 게론티우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뭐해? 다들 집에 가라고! 집에 가서 각자 재주껏 자기 가족들을 지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각자 흩어진 개별 병사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전우는 물론 아무도 의지할 수 없었다. 살아남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로마군이 퇴각했습니다.”
정찰병이 알라리크에게 보고했다. 루피누스가 말한 대로 총독에게 군사를 물려달라고 편지를 보내면 무사통과였다. 땅 짚고 헤엄치기가 이보다 쉬울까.
“가자.”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에게 앞으로 전진 명령을 내렸다.
“그것 봐. 이번에도 로마군이 꽁지 빠지게 도망칠 거라고 했지.”
서고트족은 아무 것도 모르고 로마군이 겁을 먹어서 도망쳤다며 좋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야만족들에게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로마군이 알라리크만 나타나면 도망쳤다. 몇 달 째 로마제국을 승승장구하며 돌아다닌다는 소문에 알라리크의 명성은 하루하루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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