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
스틸리코가 출정하지도 않고 이탈리아에 앉아서 고작 5천의 군대로 아프리카를 정벌한데 이어서, 브리타니아의 픽트족과 색슨족을 연달아 격파하자, 에우트로피우스는 충격에 빠졌다.
스틸리코는 마음만 먹으면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고도 언제든 동로마를 접수할 능력이 있었다. 동로마를 그저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즉시 행동에 나설 것이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스틸리코에 대한 두려움에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반역자로 몰기 위해서 반역을 일으킬 것 같다는 의심만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도 마음대로 뜯어고쳤다.
심지어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연대책임으로 엮어서 처벌하는 조항을 넣었다. 로마법에는 죄인의 가족들에게까지 죄를 묻는 연좌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느꼈지만, 감히 누구도 나서서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로마의 법 체제는 오히려 수백 년 전으로 퇴보해갔다.
“콘스탄티노플은 어때?”
하드리아노폴리스 도서관에서 가이나스를 만난 알라리크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종종 연락을 하며 정보를 주고 받았다. 에우트로피우스가 바라는 바는 아니겠지만 알라리크가 알 바가 아니었다.
“여전하지 뭐. 에우트로피우스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지경이야.”
가이나스는 만나자마자 에우트로피우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알라리크는 그에게 맞장구를 쳤다.
“로마인들은 다 겁쟁이 아니면 바보 같아. 아니, 저런 멍청하고 탐욕스런 자가 자기 재산을 눈앞에서 뺏어 가는데도 보고만 있어. 누구 하나 앞에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그러게. 나도 그게 이상해. 로마인들은 왜 권력자가 자기를 괴롭히는데 반대하지 않고 보고만 있지? 에우트로피우스가 레오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해서, 네 말대로 군단 장교들의 반대의견을 모아서 냈더니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
가이나스는 알라리크의 조언에 감사했다. 알라리크는 앞에서는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을 듣는 척 하면서 뒤로는 가이나스를 움직여서 그에게 맞서게 만들었다. 칭찬에 약한 가이나스를 격려하며 이끌었다.
“잘했어. 그렇게 네 존재감을 드러내야 해. 넌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어. 언제까지 황궁의 환관들의 그늘에 있을 거야? 내가 빠르게 군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건 결단을 내리고 행동했기 때문이지 다른 건 없어.”
그들은 로마 황궁을 씹으며 도서관을 나와서 주점을 향해 걸어갔다.
“알라리크님 아니십니까?”
한 야만족 병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경외하는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를 하자, 알라리크는 멈춰 서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러자, 다른 서고트족이 다가와서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서성였다.
야만족 병사가 사라지자, 그는 알라리크에게 얼른 다가와서 눈을 맞추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 폐하께 충성을 바칩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하자, 주변의 로마인들이 흠칫 놀라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알라리크?”
로마인들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안 보는 척 하면서 알라리크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로마인은 그를 무서워하고, 야만족은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로마인들은 도망쳤고, 야만족들은 그와 악수를 한 번 하고 눈길 한 번 받기 위해서 졸졸 쫒아왔다.
알라리크는 한참동안 그를 둘러싼 야만족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해주고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알라리크와 가이나스는 다른 사람들이 말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주점 구석의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야, 너 진짜 저명인사다. 황제보다 더 유명하겠는데?”
가이나스가 부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라리크는 유명할 뿐 아니라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가이나스는 언제 잘려나갈 지 모르는 황제의 신하였지만, 알라리크는 죽을 때까지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자신만의 세력과 왕국을 갖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손을 내저었다.
“내가 무슨 황제보다 유명해. 황제보다 더 유력한 제국의 일인자는 너지. 너는 동로마제국군을 통솔하고 있잖아. 서로마군을 지휘하는 스틸리코 장군과 동등한 위치지. 아니, 동로마군이 서로마군보다 더 막강하니까 실은 네가 제국의 일인자나 다름없어.”
알라리크의 듣기 좋은 말에 가이나스는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알라리크는 목소리를 낮춰서 가이나스에게 속삭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은 아직 어리니 황제에게 문제가 생기면 네가 동로마 황제로 추대될 수도 있어. 그러니 원로원하고 잘 사귀어 놔.”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펄쩍 뛰며 아니라고 사양할 법도 한데, 가이나스는 자만심에 눈이 멀어 알라리크의 말을 철썩같이 믿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야만족 출신이 황제가 될 수 있겠어? 어림없지.”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너도 나를 지지해 주는 거지?”
“당연하지. 우린 동족이고 고향 친구잖아. 서고트족 출신이 동로마 황제가 되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알라리크는 진심이었다. 지금의 황제보다는 가이나스가 황제가 되는 것이 스틸리코를 견제하기에도, 서고트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로마는 왜 무능한 황제가 지배하도록 놔두는 걸까? 서고트족 같으면 무능한 우두머리는 단숨에 끌어내려지는데 말이야.”
전에는 알라리크가 그런 말을 하면 로마의 편을 들던 가이나스도 지금은 알라리크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야. 황제는 신이 내린 권능이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서고트족 같으면 너처럼 전공을 많이 세운 장군은 벌써 왕으로 추대되었을걸. 언제까지 로마인을 위해서 고생만 할 거야? 이젠 고생한 만큼 누릴 때도 됐잖아.”
알라리크는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그를 자극했다.
“네가 동로마 황제가 되고, 내가 서로마 황제가 되는 거야. 어때?”
가이나스는 그의 거창한 계획에 피식 웃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만 되면 서고트족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지.”
그의 말에 알라리크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아니, 이건 로마인들에게도 좋은 일이야. 생각해 봐.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지배를 받는 게 좋겠어, 아니면 너랑 나의 지배를 받는 게 낫겠어? 누가 더 로마를 잘 다스릴까?”
“하긴 그러네. 당연히 우리가 낫지.”
가이나스는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동로마 황제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가이나스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지금까지의 목표는 황제에게 충성하고 로마제국에서 출세하는 것이었다. 동로마 총사령관이라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했다. 꿈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모래성처럼 허망한 것이었다. 황제의 변덕와 환관의 한 마디에 스러질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그는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알라리크처럼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황제와 제국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고, 종국에는 동로마의 최고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정리한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 국경의 다른 야만족, 그리고 동로마 황궁의 문제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일리리쿰의 병력이 또 늘어났군.”
스틸리코는 알라리크가 보낸 보고서를 보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턱을 쓸었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 군사령관으로서 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리리쿰을 습격해오는 야만족을 격퇴하고 포로로 잡아서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의 부대에 들어오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는 야만족도 있었다. 알라리크의 군대는 그가 장담한 것처럼 3만명으로 늘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늘어났다.
많은 군대를 유지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새로 편성한 야만족 부대는 신입들이라 고참 로마군보다 급여가 적었다. 대농장주들이 뇌물을 주고 세금을 내지 않고 감면받거나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것이 없도록 꼼꼼하게 따져서 철저하게 징수했다. 일리리쿰 군사령관에게 부대유지비용으로 주어지는 돈도 상당했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검투사 경기를 열거나, 연회를 열거나, 지참금이 필요한 가난한 귀족이나 사업을 하는데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해주어서 자선사업을 하고 후원자를 늘리는 데 열을 올렸다. 알라리크는 그런 사교활동도 후원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인과 사사로운 정으로 엮이기를 굳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으로 인맥관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야만족 혈통인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그에게 겉으로는 잘해줘도 속으로는 절대 권력을 나눠줄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런 데 들어갈 돈을 온전히 군대 유지에 썼기 때문에 그의 군대 재정은 그런대로 넉넉했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 들어오면서 지역에 새로운 활력이 생겨났다. 인구가 늘면서 경작지가 늘어나고 정체되었던 경제가 움직이면서 세금도 늘었다. 침체되어가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일리리쿰만큼 젊고 활기가 넘치는 속주가 없었다.
국경지대에 있는 로마 영지가 상습적인 야만족의 침입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일리리쿰은 안전했다. 게르마니아에 프랑크족 거주와 자치를 허용한 이후에 조용해 진 것과 비슷했다. 프랑크족은 게르마니아 일대를 점유하고 살면서 쳐들어오는 다른 야만족 무리를 물리쳤다.
다른 속주의 병력과 세금이 줄어들기만 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일리리쿰은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만성적인 세금과 병력 부족에 허덕이는 로마제국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다른 야만족에게도 그렇게 국경을 지키며 살도록 일부 영토를 허용해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스틸리코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20년 전 서고트족의 영내거주를 허용한 이후로 꾸준히 로마제국에 사는 야만족의 숫자는 늘어가고 있었다. 아프리카 속주에서처럼 반란과 폭정과 독재가 일어난다면 문제지만, 프랑크족이나 서고트족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스스로 로마에 융화되어간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스틸리코는 로마의 영토를 로마인들만의 힘으로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 세대에서 했던 것처럼 야만족을 뽑아서 용병으로 고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점점 악화되는 로마의 재정상태로는 무리였다. 차라리 국경지역의 땅을 주고 자치를 허용하면서 다른 야만족의 침입을 막도록 하는 것이 안정적이었다.
물론 수도에 거주하며 국경의 사정을 모르는 로마시민들은 그런 정책을 반대했다. 땅을 떼어준다는 것도 굴욕적이고, 국가를 세워서 세력이 커진 야만족이 로마제국으로 쳐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다.
야만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국경을 지키려면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시대처럼 시민군으로서 병역의 의무도 다 같이 지고, 세금을 내는 시민의 숫자도 많아야 했다. 하지만, 병역과 세금의 의무를 지는 시민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세금을 내지 않는 농노의 숫자가 늘어갔다. 시민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권리보다는 짊어져야 할 의무가 훨씬 더 많아서였다.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편안한 농노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시민이 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스틸리코는 변화하는 일리리쿰의 현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알라리크의 심경도 파악하려 했다.
“일리리쿰에 시찰하러 간다고 연락해.”
지금으로서는 스틸리코나 알라리크나 둘다 로마황제의 신하였다. 사실상 총사령관인 스틸리코가 속주사령관인 알라리크의 상관인 셈이었다. 그러니 시찰하러 가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가우덴티우스가 걱정스럽게 그를 만류했다.
로마군에서도 상관을 배신하는 일은 흔했다. 물론 야만족처럼 직접적인 칼부림으로 하극상을 하기보다는 내부고발이나 모함으로 상관을 쳐내고 자신이 그 자리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차례 전투를 치렀던 알라리크라면 그가 일리리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칼을 들이대고 공격할 수도 있었다.
“군단을 대동하니 괜찮아.”
스틸리코도 자신의 군단과 함께 가는 것이니 알라리크가 무모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스틸리코가 호출하면 인근 라인강변의 군단들이 모두 알라리크를 잡으러 달려올 것이다. 오히려 알라리크가 긴장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가 지금 일리리쿰에 가는 것은 알라리크의 군단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에 전력을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로마와 이탈리아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