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
“만세!”
로마군은 다 이긴 것처럼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스틸리코의 등장만으로 힘이 불끈 솟았다. 비록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것은 기병대뿐이지만, 이전에 알라리크를 2번이나 물리쳤고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진 적이 없었다. 그가 왔으니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서고트족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그들의 앞길을 막는 로마군 중에 하필 유일하게 2차례 패전으로 몰아넣은 장수가 스틸리코인데, 그가 온 것이다.
알라리크는 뭔가 또 계산이 틀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 도착할 줄은 알았지만, 스틸리코는 항상 그가 생각한 타이밍보다 한 발자국 일찍 움직였다. 이탈리아에는 3월에나 돌아오겠거니 했는데 2월에 돌아왔고, 빨라도 내일에나 아스타성에 도착하겠거니 했는데, 오늘 도착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 스틸리코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성을 함락시키면 승산이 있었다. 성은 함락 직전이고, 스틸리코는 기병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병으로 그를 막으면서 재빨리 성안으로 들어가면 황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때 정찰병이 달려와서 알라리크에게 보고했다.
“로마군이 오고 있습니다.”
“알아. 저기 오고 있잖아.”
알라리크가 동쪽의 스틸리코 기병대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남쪽에서 보병대가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로마군 본대가 남쪽에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알라리크는 정신이 아찔했다. 스틸리코는 알프스에서 출발 전에 미리 이탈리아에 배치된 군단에게 아두아강을 건너와서 언제든지 밀라노로 출격 가능하도록 대기하라고 지시해놨을 것이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오자마자 그들에게 아스타 성으로 오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오늘은 후퇴했다가 다시 공격할까요?”
퇴로가 막힐 것이 걱정된 아타울프가 알라리크에게 물었다. 알라리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계속 밀어붙여. 우리에게 유리한 시간은 지금 뿐이야.”
서고트족이 우세해 보이지만, 지금 황제를 잡지 못하면 판세가 뒤바뀔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로마군이 황제를 보호하며 수세적으로 나오지만, 황제가 안전해지면 로마군이 오히려 공세적으로 나올 것이다.
알라리크는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불리한 상황이지만, 아직까지는 스틸리코도 딱히 승기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기병대를 막고 시간을 벌면서 남쪽에서 오는 로마군 보병이 도착하기 전에 아스타를 함락시키면 되었다. 결국 누가 더 최후까지 집중해서 절박하게 싸우느냐로 아슬아슬하게 승패가 갈릴 것이다.
“가서 기병대를 막아.”
성을 공격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아타울프에게 기병을 이끌고 가서 스틸리코의 기병대를 맞아 싸우도록 했다.
알라리크는 초조하게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계속 공격해!”
직접 성벽 가까이에 가서 지시하며 소리쳤다. 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려 귓전을 스쳐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직접 성벽에 붙어서 기어오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적들은 오백 명도 안 된다! 이제 삼백 명도 안 남았을 것이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다가오는 로마군과 성벽 위의 로마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됐어! 좀 더 밀어붙여. 저쪽으로 올라가!”
알라리크는 공격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투의 흐름이 조금 전과는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로마군은 끝없이 올라오는 서고트족과 백병전을 하느라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갑자기 힘이 솟는 약을 먹은 헤라클레스처럼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서 몸을 사리지 않고 괴성을 지르며 반격했다.
반면에 성을 기어 올라가는 서고트족 병사들은 다가오는 스틸리코의 기병을 쳐다보고 겁에 질린 듯이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아타울프는 기병대를 끌고 스틸리코와 맞서 싸우러 나아갔다. 스틸리코의 기병대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공격을 한번 받아친 후에 휙 지나쳐서 성을 공격하는 서고트족에게 달려갔다.
“엇! 거기 서라!”
아타울프는 방향을 돌려서 스틸리코를 쫒아갔다. 스틸리코가 편성해서 데려온 알레만니족 기병대가 아타울프의 앞을 막아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마군과 싸우겠다던 그들이 이제는 서고트족에게 칼을 들이댔다.
스틸리코의 기병대는 아스타성을 포위한 서고트족 주위를 돌며 공격했다. 서고트족의 밀집 대형을 공격하며 허물었다.
게다가 남쪽에서 열을 맞춰 전진하는 로마군 본대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왔다.
서고트족은 성 안, 동쪽, 남쪽 3군데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대로 시간이 가면 자신들이 포위될 수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불리하게 전황이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성을 함락하기는 틀렸다. 구원군을 보고 기세가 오른 아스타성의 로마군은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물쭈물하다 스틸리코의 본대에게 포위되면 아스타성을 포위한 서고트군이 궤멸될 수도 있었다.
“후퇴하라!”
결국 알라리크는 아스타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그가 로마군에게 고립되면 서고트족 군대는 아스타와 밀라노에 분산되어서 스틸리코에게 각개격파될 것이다. 밀라노로 돌아가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싸우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알라리크는 멀리 보이는 스틸리코를 지나쳐가며 노려보았다. 번번이 그 때문에 앞길이 가로막혔다. 다른 로마군과도 많이 싸워 봤지만, 스틸리코가 있는 로마군과 없는 로마군은 분명히 뭔가가 달랐다.
‘한 시간만 더 있었어도 아스타를 함락할 수 있었을 텐데.’
알라리크는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씨근덕거렸다. 분명히 완벽한 계획이었고 호노리우스 황제도 성을 나와서 그를 도와주었는데, 아쉽게도 스틸리코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조금씩 그의 계획이 어긋나면서 결국은 간발의 차로 눈앞의 승리를 놓쳤다.
스틸리코는 굳이 퇴각하는 서고트족을 무리해서 쫒지 않았다. 지금은 황제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고트족은 언제든 물리칠 수 있었다.
“황제폐하, 괜찮으십니까?”
스틸리코는 아스타 성으로 들어가서 고립되어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를 찾았다.
“야만족이 나를 쫒아왔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황제는 서고트족의 공격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눈에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여기저기 시선을 돌렸다.
“서고트족이 밀라노까지 오는데 한 달은 걸릴 거라고 했잖아? 보름밖에 안 걸렸어. 자네 말대로 밀라노에 있다간 죽었을 거야.”
황제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흰자위를 치켜뜨며 스틸리코를 노려보았다.
황제로서 끝까지 싸우지 않고 야만족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성문을 닫아걸고 항전을 했다면, 스틸리코가 올 때까지 몇 달이고 충분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스틸리코의 계산 착오로 자신이 죽을 뻔 했다는 피해의식만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서고트족이 제 예상보다 빨리 이동했습니다.”
스틸리코는 고개를 숙여서 황제에게 사죄했다.
“저와 함께 밀라노로 돌아가십시오. 서고트족을 물리치겠습니다.”
황제는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제 이탈리아에는 있기 싫어! 야만족이 없는 갈리아로 가겠어.”
스틸리코도 철없는 황제의 응석을 언제까지 받아줄 수는 없었다.
“갈리아에는 가실 수 없습니다. 황제가 이탈리아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로마의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모욕입니다. 황제가 이탈리아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이탈리아를 지키겠습니까.”
그의 엄격한 목소리에 자존심이 상한 황제는 말은 못하고 토라져서 경련을 일으키듯이 입술을 씰룩씰룩했다. 황제는 환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듯이 쳐다보았지만, 모두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틸리코의 말이 너무나 명백하게 맞았기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밀라노로 가기 싫으시면 로마에 가십시오.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스틸리코가 대안을 제시하자, 황제는 볼멘소리로 뚱해서 물었다.
“로마에 서고트족이 오면 그땐 어떡하는데? 로마에도 오지 말란 법은 없잖아.”
보다 못한 친위대장이 나서서 황제를 달랬다.
“로마에서는 배를 타고 어디로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서고트족은 배를 타고 쫒아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숲에서만 살아온 서고트족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적이 없었다. 배를 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자, 황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를 표시했다.
스틸리코는 친위대장에게 배로 황제를 로마로 모시도록 지시하고 물러갔다.
그가 나가자 올림피우스가 황제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그것 보십시오. 스틸리코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은근히 서고트족이 황제폐하를 해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황제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가 그를 구하기 위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분한 표정으로 스틸리코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내가 이탈리아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의심스러워. 언제 또 나를 서고트족의 공격에 내팽개칠지 몰라.”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반대하다니요. 태도가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황제는 억울하다는 투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다른 놈들도 다 똑같아. 황제는 나인데 모두 스틸리코의 말만 듣고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잖아.”
“폐하 주변에도 온통 자기 사람을 심어놓아서 그렇습니다.”
올림피우스는 음험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속삭였다.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스틸리코가 황궁에 배치해 놓은 자들은 아무도 믿지 마시고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물러나온 스틸리코는 친위대장에게 밀라노를 떠나게 된 경위를 물었다. 친위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폐하께서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십니다.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시고 칼을 휘두르며 화를 내셔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스틸리코는 옅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호노리우스는 나이를 먹을수록 이상해졌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수줍음이 많은 아이겠거니 했는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이 잦아지고 신경질적이 되어갔다. 그럴 만한 나이니까, 크면 괜찮겠지 했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걱정을 하며 불안해했다.
훌륭한 스승님 밑에서 배우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스틸리코는 이름난 수도승과 철학자와 사제를 불러서 호노리우스를 가르치도록 하고 있었다.
호노리우스의 스승들과도 몇 차례 상담을 해 보았지만, 그들도 딱히 이유는 모르겠다고 했다. 황제에 대해서 함부로 말했다가 나중에라도 반역죄로 꼬투리 잡힐 수도 있으니 솔직하게 느낀 대로 말할 수 없었다.
“원래 사람이 타고난 성품이 있어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괴로운 법입니다.”
한 선생님이 에둘러서 호노리우스가 황제 감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딱히 해결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유명한 스승에게 배워도 호노리우스가 달라지는 기미는 없었다. 그러더니 결국은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전쟁에서 국가와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행동까지 하고 말았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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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아수라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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