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황궁
서고트군은 숲으로 들어가 버렸고, 로마군은 쥐구멍 앞에서 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밖에서 그들이 나오기만 기다려야 했다. 숲으로 들어가려면 병력에 있어서 더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다.
평지에서의 전투는 진을 갖춘 로마군이 유리했지만, 숲속에서의 전투는 거의 일대일 백병전이어서 체격조건이 좋은 야만족이 유리했다.
스틸리코는 라인강에 있는 군단에 전령을 보냈다.
“지원병력을 보내라고 해.”
숲에서 전투를 하려면 매복 공격을 막기 위해서 군단을 나눠서 안전한 길을 확보하며 진군해야 했다. 그러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동로마 주민들은 스틸리코가 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동안 활개치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약탈하던 서고트족이 산속으로 들어가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과 밭을 버리고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던 농민들은 한참 자라고 있는 농작물을 무사히 수확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갈리아에 있던 로마군단이 테살로니키에 배로 도착했다. 숲에 고립된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을 섬멸하기 위해서 동서로마군이 투입되는 대작전이 시작될 전망이었다.
서고트족은 막다른 길로 몰렸다. 산 위에 고립되어서 식량이 떨어지면 결국 손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스틸리코의 군대가 테살로니키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피누스도 초조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에 스틸리코의 병사들이 많아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스틸리코가 알라리크를 무찌르고 나서 군대를 돌려서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그를 해임하라고 청하면, 가뜩이나 그와 멀어지고 있는 황제는 군대의 무력에 굴복해서 쉽게 서명을 할 것이다.
‘이를 어쩐다.’
이대로 알라리크가 무너지면 루피누스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뒷짐을 지고 방안에서 왔다 갔다 하던 그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틸리코의 군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거야.’
그가 군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알라리크에게 의존할 필요도 없고, 스틸리코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루피누스가 지금까지 손을 안 뻗친 곳이 없고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이 없는데, 유일하게 건드리지 못한 것이 로마군단이었다. 그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루피누스에게는 군권을 주지 않고 스틸리코에게만 일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동로마황제는 아르카디우스였다. 그라면 자신이 어떻게든 움직여 볼 수 있었다.
동로마 소속의 군단을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명으로 동로마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한 뒤에 황제를 구워삶아서 루피누스의 사람으로 군대의 장교를 교체하면 군단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그는 황제에게 작업을 시작했다.
“스틸리코의 군단 중에서 일부는 동로마 군단입니다. 이번 기회에 돌려달라고 하십시오. 지금 콘스탄티노플을 지킬 동로마군이 없습니다.”
아르카디우스는 루피누스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서고트족이라면 스틸리코가 공격하려고 하고 있지 않소?”
“다른 야만족이 이 곳으로 쳐들어오면 방법이 없습니다. 수도를 방비할 군대가 필요하니 스틸리코에게 즉시 동로마 황제의 군단을 볼려보내라고 명령하십시오.”
“티마시우스와 프라비타가 이끄는 로마군이 있지 않소?”
루피누스는 황제에게 계속해서 스틸리코의 험담을 했다.
“스틸리코에게 저렇게 많은 군단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손에 칼이 쥐어지면 휘둘러보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는 음험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스틸리코의 속셈을 모르시겠습니까? 서고트족을 공격한다는 핑계로 군단을 불러모아서 이곳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루피누스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아르카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생각해보겠소.”
루피누스는 그의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지만, 황제는 이전처럼 전적으로 그의 말만을 듣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황후 에우독시아의 지원을 발판으로 황제에게 전적으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루피누스가 스틸리코에게서 동로마군을 돌려받으라는데? 그래도 될까?”
에우트로피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저 늙은 여우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알 것 같았다.
“수도의 방비를 위해서 황제께서 동로마군을 돌려받는 것은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동로마군을 루피누스가 장악하는 것은 막으셔야지요. 군대는 황제의 것이니까요.”
“물론 그래야지.”
에우트로피우스는 한 술 더 떠서 머리를 굴리며 뭔가를 생각했다.
“동로마 군대를 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스틸리코에게 즉시 동로마를 떠나 서로마로 돌아가라고 하십시오. 황제가 스스로를 지킬 군대가 있는데, 그가 동로마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황제를 등에 업고 동로마 권력을 잡으려는 에우트로피우스에게도 군부를 장악한 스틸리코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루피누스를 쳐내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그에게, 언제든 황제가 될 힘을 가진 스틸리코가 동로마가 있다는 것은 뒤꼭지가 서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고트족을 퇴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
에우트로피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스틸리코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에게 너무 많은 군단과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가 동로마에 온 것은 알라리크의 핑계를 대고 사실상 황제의 자리를 노리려고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알라리크보다 스틸리코가 더 위험합니다.”
야만족보다 자신의 부하인 로마군 총사령관을 더 경계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였지만, 주변의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하자, 철없는 황제는 스틸리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맞아. 루피누스도 그런 말을 했어.”
황제는 다음날 루피누스가 가져온 동로마 군단 회군 명령서에 사인을 했다. 황제는 그가 요청한 것에 덤으로 스틸리코에게 동로마를 떠나라고까지 명령했다. 루피누스는 뛸 듯이 기뻤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물러나왔다.
“드디어 스틸리코에게서 군대를 빼앗았다. 이제는 저 군대를 이용해서 뭐든 할 수 있어.”
그는 전령에게 명령서를 들려서 테살로니키에 있는 스틸리코에게 보냈다.
‘어쩔 거냐, 스틸리코? 황제의 명에 따르면 동로마를 떠나야 하고,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자가 되는 거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전령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날씨는 여름을 지나서 점점 서늘해졌다. 로마인의 밭에는 밀이 익어갔지만, 서고트족의 식량은 떨어져갔다.
알라리크는 산 중턱에서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을 내려다보았다.
“매일 숫자가 늘어나는군요.”
아타울프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우리도 숫자가 늘어나잖아.”
알라리크가 말했다. 여인들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아기를 낳았다. 오늘 새벽에도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기가 세 살 이상 생존할 확률은 절반 이하였다. 지금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편적으로 열 명을 낳으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는 아이는 두세 명이었다.
게다가 불행히도 산모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오늘을 넘길 수 있을지 몰랐다.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죽는 일도 흔했다.
“여인들도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는데 우리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지.”
그녀가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세상에 내놓은 아기를 좀 더 서고트족이 대우받는 세상에서 살도록 만드는 것이 서고트족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무라고 여겼다.
그의 소망과는 달리 로마군의 공격은 금방이라도 시작될 것 같았다. 저들의 준비상황으로 보아서 아마 하루이틀 내에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루피누스로부터 뭔가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니 항복하지 말고 버티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무슨 속셈인지 몰라서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이 산 위로 올라와서 패하면 더 높은 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을 토끼몰이를 당하는 것처럼 산꼭대기에서 모두 잡힐 것이다.
알라리크도 토끼를 수도 없이 잡아보았다. 토끼를 몰 때에는 항상 토끼에게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멀찍이 떨어져서 살살 몰아야 했다. 그래야 사냥꾼이 원하는 곳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토끼가 깨닫는 순간, 토끼는 필사적으로 사냥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알라리크는 자신들이 토끼처럼 도망칠 길이 없는 막다른 산꼭대기로 몰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로마군을 돌파해야 살아날 길이 있었다. 그렇지만, 수만 명의 아녀자가 딸린 서고트족을 이끌고 로마군 가운데를 뚫고 나아갈 수는 없었다.
모두를 데리고 탈출하기는 어려우니 소수의 병사들만 데리고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자고 하는 족장도 있었다. 알라리크는 자신을 믿고 정든 집을 버리고 따라와 준 아녀자들을 버리고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끝까지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그는 산모와 아기가 며칠 동안만이라도 더 높은 산 위로 이동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로마군이 올라올 길목마다 설치한 목책과 방어망을 돌아다니며 점검했다.
“내일 출정이다.”
스틸리코는 마지막 작전 회의를 마치고 부관들에게 자신이 맡은 임무를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그때 동로마황궁의 전령이 들어왔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스틸리코에게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직인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동로마 황제의 명령서입니다.”
‘뭐지?’
회의는 끝났지만, 장수들은 좋지 않은 예감에 아무도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정치에 무관심한 황제가 이런 중대한 순간에 명령서를 보냈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스틸리코는 봉투를 열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스틸리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비열한 자식! 분명히 그 놈 짓이야.”
스틸리코는 편지를 책상에 내던지고 뒤돌아섰다. 가이나스는 서둘러 편지를 집어들어서 읽어 내려갔다.
[동로마군대는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스틸리코는 서로마군대를 이끌고 서로마로 돌아가라.]
스틸리코가 말한 그 놈이 누구인지는 그의 부관들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선대 황제때부터 탐욕스러운 루피누스가 동로마제국과 군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부리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 적의 목에 칼을 대고 이제 찌르기만 하면 되는데 돌아가란 말입니까? 몇 달 동안 준비할 때는 아무 말도 안하더니?”
사루스가 얼굴이 뻘개져서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로 물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가이나스도 분해서 주먹을 부르쥐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로마의 재상이 야만족과 손을 잡고 로마군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인가. 암울하고 무거운 한숨이 막사를 채웠다.
“그냥 공격하면 안됩니까?”
사루스의 말에 다른 장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황제의 명령이야.”
야만족이라면 뒤에서 누가 뭐라고 하건 무시하고 그냥 공격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로마의 장군들은 법과 명령을 따라 움직였다.
동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서로마와 동로마가 내전에 돌입하는 사태를 가져올 수 있었다. 심지어는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게 될 수도 있었다.
스틸리코는 울분을 삭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루피누스가 이미 아르카디우스와 동로마황궁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야만족의 침입과는 차원이 다른 또다른 로마제국의 위기였다.
“루피누스가 동로마에 있는 이상, 우리는 등에 칼을 대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가이나스는 스틸리코에게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다른 부관들도 분노를 터뜨렸다.
“루피누스는 적의 편에서 로마에 해를 끼치는 역적입니다. 그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 자가 누명을 씌워서 죽인 장교들이 한두 명입니까?”
루피누스는 로마군단의 공공의 적이었다. 루피누스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무고한 장군들에게 역모죄와 뇌물죄를 뒤집어 씌워서 희생시켰다.
스틸리코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라리크도 골칫거리였지만, 루피누스는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수였다. 알라리크는 실력으로 힘으로 이길 수 있었지만, 황제의 바로 옆에서 황제의 귀에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속삭이는 루피누스는 그의 군사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 들 쳐낼 수 없었다. 황제의 신임을 받고 동로마 정권을 장악한 그를 멀리 떨어져있는 스틸리코가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스틸리코에게 루피누스가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괴롭지만 손을 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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