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훈 족
“거의 다 왔습니다.”
길잡이가 말했다. 아에티우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치도록 며칠을 말을 달려도 집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지도도 없이 뭘 보고 다 왔다는 것을 아는 걸까. 훈 족에게 가고 있는 건 맞는 걸까. 다른 곳에 그들을 팔아넘기는 건 아닐까.
이아손도 불안한 듯 연신 이마의 땀과 먼지를 닦으며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에티우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길잡이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탄 훈 족이 다가왔다. 작달막한 키에 사나운 눈을 한 그들은 날카로운 화살을 그들에게 겨누었다. 가늘지만 단숨에 그들의 목을 관통할 수 있는 무기였다. 멀리서 쏘기에 반격할 방법이 없이 당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무서운 점이었다.
아에티우스의 길잡이가 훈족말로 그들은 뭐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훈족은 활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훈족의 볼모로 온 아에티우스와 이아손을 자신들의 왕에게 데려갔다.
훈족의 왕은 울딘이었다. 울딘은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추고 동로마와 서로마와 교류하며 용병을 제공하고 필요한 재물을 얻고 있었다. 게르만족에게는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훈 족이었지만, 로마의 영토로는 섣불리 들어가지 못했다. 성벽과 목책으로 방어하는 로마의 장벽을 훈족 주력병력인 궁기병만으로 뚫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훈족의 마을은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했다. 건물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천막뿐이라 야영지나 다름없었다. 양가죽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양떼를 몰고 다니거나 양젖을 짜고 나무를 다듬어 화살을 만들고 있었다.
“이게 뭐야? 마을이야? 저게 궁전이라고?”
이아손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서고트족의 볼모로 있을 때는 로마영지인 일리리쿰에 머물렀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생활했는데, 훈족에게로 오니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훈족의 왕이 머무는 궁전은 궁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 천막과 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목조건물 안에는 로마와 페르시아에서 약탈한 귀금속과 값진 항아리와 양탄자가 가득했다. 그래봐야 화려하게 치장된 높은 석조건물을 보고 자란 그들의 눈에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으로 보였다.
울딘은 그들에게 라틴어를 좀 할 줄 아는 하인과 음식과 빨래를 해 줄 하녀와 지낼 천막을 지정해주었다. 부드러운 로마식 침구에 나름대로 극진히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지만, 편리한 도시 생활에 익숙한 그들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향신료도 없이 양젖과 발효시키지 않은 딱딱한 빵뿐인 음식도 입에 안 맞았고, 매일 공중목욕탕에서 뜨거운 목욕을 하던 그들은 씻지 못하는 것도 찝찝했다. 연극도 전차경주도 음식점도 도서관도 없고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프랑크족에게 가겠다고 하지 그랬어.”
이아손이 울상을 하며 툴툴거렸다.
“우리가 저들을 몰라서 그래. 저들도 뭔가 사는 재미가 있겠지. 적응하면 살만 할 거야.”
아에티우스는 열심히 훈족 말을 배웠다. 훈족은 가장 무시무시한 용병집단이었다. 그들을 부리려면 그들의 말을 알아야 했다.
언어 뿐 아니라 활을 쏘는 법도 배웠다. 활의 사정거리와 관통력, 특성, 강점, 약점 등을 직접 활을 쏘면서 몸으로 익혔다. 훈족의 무기와 전투방식의 장단점을 눈여겨보고 파악했다.
몇 달 지나면서 말도 배우고 생활에도 익숙해지자, 차츰 적응되었다. 붙임성 좋은 아에티우스는 훈족 사람들과도 금새 친해졌다. 울딘과 그의 아들들은 로마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을 때면 그에게 물어보았다.
울딘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쇠약하고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세 아들 루길라, 옥타르, 문주크가 울딘의 뒤를 이어서 영지를 나눠서 다스리고 있었다.
울딘이 사망하고 첫 아들 루길라가 뒤를 이었다.
울딘의 셋째 아들 문주크에게는 블레다와 아틸라라는 아들이 있었다. 블레다는 아에티우스와 비슷한 나이였고, 아틸라는 예닐곱살 어렸다.
아틸라는 나이는 어렸지만, 생각의 약싹빠름이 어른 못지 않았다. 문주크가 어느날 갑자기 죽었지만, 형 블레다와 함께 자신의 부족이 흩어져 다른 부족에게 가버리지 않도록 잽싸게 통제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형이 아버지의 통치구역을 자연스럽게 이어받도록 한 후에야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아직 어린 자신이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는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아에티우스에게 다가가서 자신들의 무기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로마인을 신기한 듯이 지켜보았다.
아에티우스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의 주위를 빙빙 도는 아틸라를 올려다보았다.
“왜 항상 말에서 내리지 않아?”
아틸라는 말 위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다. 먹고 마시고 말할 때도 거의 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말을 타고 있어야 훈 족이지. 말에서 내리면 더 이상 훈 족이 아니야.”
아틸라는 말과 활이 있어야만 훈 족의 강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말에서 내리면 눕고 싶어지고, 누우면 게을러지지. 말타기를 싫어하고 로마인처럼 걸어다니게 되면 훈 족은 더 이상 훈 족이 아니야.”
아틸라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들을 따라서 원정을 나갔다. 로마에서는 빨라야 열 여섯 살 정도에 전투에 참가해서 후방에서 참관을 하는데, 훈족은 훨씬 이른 나이부터 짐승 사냥에 따라 나갔고 이어서 전투에도 나갔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틸라는 몸값을 받기 위해서 포로를 잔뜩 끌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시일이 지났는데도 몸값을 가져오지 않았다.
아틸라는 몸값을 가져오지 않은 자들을 끌어내서 머리를 휘어잡고 칼로 목을 베었다. 이아손은 양이라도 잡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목을 썰어버리는 아틸라를 보면서 사색이 되었다.
“노예로 팔면 되지 굳이 죽일 것까지는 없잖아.”
아틸라는 태연하게 말했다.
“노예로 팔려면 도시까지 끌고가야 하잖아. 그 동안의 밥도 줘야 하고 시간도 걸리니 귀찮아.”
아에티우스는 아직 묶인 채 갇혀있는 남은 자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들은 왜 살려주는데?”
“죽인 자들은 몸값이 싼 자들이고 저자들은 몸값이 비싼 자들이야. 몸값이 싼 자들은 데리고 있어봐야 밥값도 안 나오니까.”
아틸라는 자신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을 선택하고 살려주거나 죽였다. 마치 양떼 중에서 어느 양을 잡아먹고 어느 양을 살려둘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대로 키우고 이용하고 잡아먹는 양떼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목숨은 누구나 소중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한 아에티우스와 이아손의 눈에는 충격이었다. 로마에서는 누구나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한 표를 행사하는 평등한 존재였다. 사람의 목숨은 노예라 할지라도 동물보다는 가치 있었다.
그러나 이 곳 훈족의 세계에서는 사람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는 전적으로 얼마의 몸값을 낼 수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가격으로 평가되었다. 쓸모가 없는 사람보다 쓸모있는 가축 한 마리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이아손은 아틸라에게는 말을 못하고 뒤돌아서서 아에티우스에게 토할 것 같은 얼굴로 분노를 터뜨렸다.
“저렇게 미개하니 야만족이라고 부를 수밖에. 야만족도 저런 야만족이 없네.”
아틸라는 라틴어를 못했지만 야만족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는지 칼을 들고 성큼성큼 그들에게 걸어왔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내 욕했지?”
이아손은 흠칫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아에티우스의 뒤로 숨었다. 아에티우스는 단호하게 아틸라에게 말했다.
“우리는 로마의 볼모야 네가 우리를 해치면 훈족과 로마의 관계를 파탄 내는 거야.”
아틸라는 자신보다 훨씬 크고 나이도 많은 아에티우스를 올려다보며 피 묻은 칼로 그의 배를 쿡쿡 찔렀다.
“로마의 볼모? 그게 나한테 무슨 쓸모가 있지? 먼 나라 관리의 아들이라. 몸값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너를 죽인다고 멀리 있는 네 나라 사람들이 눈 하나 깜짝 할까? 물에 빠져 떠내려가서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야.”
아에티우스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넌 뭐든지 돈으로 환산하는데, 돈 말고 더 중요한 가치가 있어.”
“그게 뭔데?”
“능력이지. 양은 털과 젖을 줄 능력이 있고, 말은 너를 빨리 태워다주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각자 그런 능력이 있어.”
아틸라는 코웃음치며 인질을 칼로 가리켰다.
“그런 능력이 나한테 무슨 소용인데? 저 자는 벽돌장수인데 우리에게 벽돌은 아무 쓸모도 없어.”
아에티우스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로마가 강한 건 각자 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일하기 때문이야. 벽돌을 굽는 자, 성벽을 쌓는 자, 공성기를 만드는 자, 갑옷을 만드는 자, 한 명 한 명이 다 각자 능력을 발휘하면서 로마제국이 이루어진 거야. 너희 훈족은 그런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돈으로만 가치를 따지니 로마를 이기지 못하는 거야.”
아틸라는 아에티우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이 잠시 말이 없다가 거칠게 내뱉었다.
“그럼 너희들은 무슨 능력이 있는데? 아무 것도 못하고 여기 붙잡혀 있으면서.”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우리가 로마로 돌아가면 나는 장군이 되어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아손은 원로원에 가서 외교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그러면 수만 명의 병사가 너를 위해 싸우기도 하고, 반대로 네게 칼을 들이대기도 할 걸?”
아에티우스는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똑같아 보이는 달걀이라도 부화해서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도 있어. 사람의 능력도 마찬가지야. 그걸 알아보는 게 진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지.”
아틸라는 칼을 거두고 훨씬 키가 큰 그들을 가축의 상태라도 살피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려서 피식 웃고는 돌아갔다.
그 후로 아틸라는 그들을 보기만 하면 놀려댔다.
“어이, 달걀들아. 도대체 언제 거위가 되는 거야?”
하지만, 그들이 그에게 살려둘 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인정한 듯 했다.
이아손은 훈족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지만,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세상에 적응했다. 훈족이 이렇게 강성한데는 그런 시스템이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효율과 가치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계에서 훈족은 각자의 가치를 증명하고 갈고닦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 도태되었다.
앉아서 입만 가지고 토론하고 과거에 쌓아놓은 부와 인맥으로 영위하는 로마인들보다 훈족이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종교와 민족으로 선을 긋고 배척했지만, 훈족은 어느 종교도 어느 민족도 배척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우대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에게는 기대 이상의 보상을 해주었고, 반대하는 자는 가차 없이 제거했다. 특히 자신의 경쟁자가 되는 부족 내부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았다.
대화, 절충, 타협, 포용과 같은 로마의 미덕은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따지고 보면 훈족이 합리적이지 않아?”
아에티우스가 이아손에게 말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최적화된 시스템이지.”
이아손은 동의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사람을 동물이나 도구 취급하고, 관용이라곤 모르고, 필요에 따라 약속을 저버리는 야만적인 태도가 합리적이라고?”
원로원의 아들인 이아손과 기병대장의 아들인 아에티우스는 자라난 환경이 달랐고 생각도 달랐다. 아에티우스는 원로원의 문화가 현실과는 동떨어져있다고 여겼다.
“그런 고정관념에 묶여있으니까 로마제국이 어려움에 처한 거야. 원로원은 명분에 따라 움직일지 몰라도 군대는 아니야. 필요에 따라서 상대를 취하는 건 당연한 거야. 원로원에만 있으면 로마제국이 이상과 명분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착각하겠지만 전장에 있으면, 로마군의 행동은 훈족이나 별다를 바 없어.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필요에 따라서 그들의 가치를 매기고 이쪽과 손잡았다 저쪽을 버렸다 하는 건 흔한 일이라니까?”
“야만족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로마인끼리 그러는 건 안 되지. 신용이 있고 신뢰가 있는데.”
아에티우스는 입을 비죽였다.
“로마인끼리도 다를 게 없어. 원로원에서도 이익에 따라서 이쪽과 손잡았다 버리고 반대편과 손잡아서 얼마 전까지 어울리던 상대를 반역자로 모는 게 일상이잖아?”
이아손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아에티우스의 말도 일면 맞았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원로원의 정치싸움과 모략은 전쟁터 못지않게 무시무시했다.
결국 야만족처럼 대놓고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느냐, 로마제국처럼 제도와 윤리의식을 가지고 노골적인 욕망을 표면적으로나마 제어하려고 노력하느냐의 차이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혼란기에는 야만족의 방식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