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플로이의 주위에는 세 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페네우스, 에리만토스, 알페우스 강이었다. 서쪽에는 페네우스 강이 시작되는 시냇물이 흘렀다. 동쪽에는 작은 에리만토스 강이 흘러서 플로이의 남쪽을 감싸는 알페우스 강에 합쳐졌다.
스틸리코의 계획은 서고트족이 이 세 개의 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물을 얻지 못해 갈증에 허덕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플로이에서 나오는 길목을 막으면 페네우스 강과 알페우스 강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모든 길목에 깊은 참호를 파서 서고트족이 플로이에서 나오지도 강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도록 했다.
동시에 플로이로 흘러들어가는 에리만토스 강의 상류를 막아서 물줄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할 생각이었다. 스틸리코는 공병대장과 함께 강 상류를 둘러보았다.
“운하를 파서 강물을 라도나스 강으로 돌릴 수 있겠나?”
공병대장은 운하를 파기에 적절한 지점을 찾아냈다.
“예. 사흘이면 가능합니다.”
토목공사와 건축에 능한 로마군은 강의 흐름과 지형을 보면, 어디를 어떻게 막고 어디를 파서 물줄기를 돌릴 수 있는지 금새 견적이 나왔다.
수만 명의 로마군이 달라붙어서 둑을 설치하고 땅을 파자, 불과 며칠 만에 에리만토스 강물은 옆에 위치한 라도나스 강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알라리크는 플로이로 들어오는 길목에 방어를 위한 목책을 설치하고 로마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로마군은 며칠 째 잠잠했다.
“로마군이 참호를 파고 길목을 막았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알라리크는 로마군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플로이의 길목마다 로마군이 서고트족이 설치한 것보다 더 높은 목책을 설치하고 앞에는 깊은 참호를 파 놓았다. 구덩이가 하나도 아니고, 하나를 기어오르면 또 구덩이가 나오고 또 구덩이가 나오도록 여러 겹으로 파 놓았다. 그 곳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라리크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들이 플로이에 오기 전부터 올 것을 알고, 주변에 배치되어있던 로마군이 재빨리 작업을 한 것이다.
“어차피 우리도 길목을 막아서 수비할 계획이었으니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딘가 불안했다. 포위를 한 게 아니라 참호를 팠다면 공격하려는 의도보다는 그들을 가두려는 것이다.
‘전투를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알라리크는 시간을 끌면 보급이 부족한 서로마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플로이에서 버티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로마군이 장기전으로 갈 듯이 참호를 파고 서고트족이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막았다.
‘무슨 의도지?’
알라리크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 다른 병사가 허둥지둥 뛰어왔다.
“에리만토스 강물이 말라버렸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강물이 말라?”
깜짝 놀라서 강으로 달려갔다. 원래도 큰 강은 아니었고 시냇물과 같은 작은 강이었는데, 물이 거의 말라붙어서 맨바닥을 드러냈다. 목이 마른 서고트족은 바닥에 달라붙어 흐르는 그 물이라도 마시려고 진흙을 핥고 있었다.
알라리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역사책을 보면 로마군은 종종 강물을 막아서 물길을 돌려서 적을 갈증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이었다. 그도 그 전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전술에 이렇게 직접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도 전투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역사에서 체득한 풍부한 경험과 현실에 바로 적용 가능한 지식. 로마군의 강력함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식량이 아무리 많아도 물이 없이는 며칠도 버틸 수 없었다. 제대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서고트족이 제발로 플로이에 걸어 들어갈 때 스틸리코는 박수를 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물을 구할 수 없나?”
산속에서는 땅을 파도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풀잎을 짜서 즙을 내어 마시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알페우스와 페네우스 강으로 가는 길목을 뚫기 위해서 직접 가 보았지만, 도저히 몇 겹으로 깊이 파여진 참호를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산을 넘어서 물을 몰래 길어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길이 험하고 가져올 수 있는 물의 양이 얼마 안 되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수 만 명의 서고트족이 매일 마실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로마군을 피해서 먼 산길을 돌아서 물을 길어 왔다. 여자들은 풀잎을 따서 썰어서 주머니에 넣고 즙을 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지만, 갈증은 점점 심해졌다. 로마군은 서고트족이 강물에 접근하지 못하게 더욱 철저히 감시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한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열사병을 앓았다. 갈증으로 인해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대로는 안 돼. 다른 길을 찾아야 해.’
알라리크는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루피누스가 스틸리코를 회군시켰던 것처럼 에우트로피우스를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갈 연락병을 뽑았다. 에우트로피우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적은 쪽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인처럼 작은 체구에 짙은 색 머리카락을 한 사람을 뽑았다. 로마군을 피해서 북쪽의 바위산을 넘어 코린토스만을 통해서 배를 타고 가도록 했다.
며칠이 걸렸지만, 연락병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말을 달려 콘스탄티노플의 에우트로피우스를 찾아갔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알라리크의 편지를 받고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달았다.
“물이 없어서 다 죽게 생겼다고?”
서고트족이 패하면 스틸리코의 명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알라리크가 사로잡히면 스틸리코는 그를 증인으로 앞세워서 에우트로피우스가 적과 내통했다는 것을 밝히고 그를 처형하도록 황제에게 요청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스틸리코가 전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성문 앞에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알라리크는 편지에 바다를 건너서 탈출 할 수 있도록 코린토스 만에 배를 대기시켜달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에 배를 보내주겠소.”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연락병이 돌아간 후, 그는 전전긍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했다.
‘알라리크만 믿고 있으면 안 되겠어. 스틸리코를 어떻게든 해치워야 해.’
에우트로피우스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스틸리코를 모함했다. 스틸리코가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서 그리스에서 식량을 수거해간 것을 트집 잡았다.
“스틸리코는 서로마군으로 하여금 그리스를 약탈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서고트족을 물리치러 왔다는 것은 핑계고 실은 그리스를 약탈하러 온 겁니다.”
황제도 서로마군이 자신의 영토인 그리스에서 물자를 빼앗아갔다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유감이오. 서로마와 스틸리코에게 엄중하게 항의를 할 것이오.”
“2년 전에 황제께서 동로마를 떠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허락 없이 동로마 영토인 그리스로 왔으니, 이는 황명을 어긴 것입니다. 스틸리코에게 당장 동로마를 떠나라고 하십시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스틸리코가 반란을 일으킬까 경계하기는 했지만, 그가 1년 넘게 동로마를 돌아다니는 골칫거리인 서고트족과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 만족하고 있어서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서고트족을 박멸하기 직전에 스틸리코에게 떠나라고 해서 서고트족이 다시 살아남아서 문제를 일으켰소. 그러니 이번에는 그가 서고트족을 소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나라고 하는 게 좋겠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온 에우트로피우스는 어떻게 하면 스틸리코를 물리칠 구실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 아프리카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왔다.
“아프리카 속주 군사령관인 길도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길도?”
아프리카 속주는 서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에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것일까.
길도가 은밀히 보낸 밀사를 통해서 한 말은 그가 서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동로마 황제를 섬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아프리카가 우리 동로마의 속주가 되겠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에우트로피우스의 귀가 솔깃했다. 그는 길도가 야심이 있는 자이고, 실질적으로 동로마를 섬기겠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마로부터 벗어나는 핑계를 대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자신의 반란에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제안일 것이다.
어쨌든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프리카는 서로마 제국에서 소비하는 밀의 절반 가량을 생산하는 곡창지대였다. 아프리카가 서로마와 관계를 끊으면 서로마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스틸리코는 서로마로 귀환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가 동로마의 속주가 되겠다면 우리는 당연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길도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서로마제국의 속주가 왜 굳이 동로마 제국에 들어오겠다는 거요? 그러면 서로마와의 관계가 애매해질 텐데.”
“이미 아프리카와 서로마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습니다. 아프리카가 로마제국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길은 황제께서 아프리카를 받아들이시는 길 뿐입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황제를 부추겼다.
“아프리카 군사령관 길도가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는 너무 어려서 믿을 수 없고, 아르카디우스 황제 폐하의 인품에 감명을 받아서 동로마를 섬기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받아주십시오.”
“하긴 호노리우스가 아직 너무 어리지.”
아르카디우스는 별 생각 없이 좋아했다. 자신의 영토가 넓어지는데 거부할 황제는 없었다.
날은 점점 더워졌다. 뜨거운 여름햇빛은 칼도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갈증에 목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탈수증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늘어갔다. 비라도 내리면 좋을 텐데 야속하게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알라리크는 말을 죽여서 피를 마시라고 명령했다.
“말을 죽이라니요?”
기병들은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말이 없으면 전투를 할 수도 탈출을 할 수도 없었다. 알라리크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인가.
“어차피 이 곳은 산이라 말은 별로 필요 없어. 최소한만 남기고 죽여.”
에우트로피우스가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가정 하에 알라리크는 계획이 있었다.
말과 가축을 도살해서 그 피를 나눠 마셨다. 쓰러졌던 사람들이 잠시 기운을 차렸다.
알라리크는 초조하게 콘스탄티노플로 갔던 연락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에우트로피우스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럴 리 없다. 그에게는 스틸리코를 제어할 세력이 필요하다. 그가 서고트족을 버릴 리 없다. 알라리크는 그를 짓누르는 중압감을 떨치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연락병이 돌아왔습니다.”
알라리크는 그에게서 에우트로피우스의 답변을 전달받았다.
“말씀하신 시간과 장소에 배를 보내겠답니다.”
알라리크는 비로소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의 도박이 성공했다. 이제 살아날 문이 열렸다.
허나 그 문까지 가는 길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배가 오기로 한 바닷가로 가려면 우선 로마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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